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pt Oct 16. 2021

모든 것은 돌고 돈다. 예기치 못한 영화도 돌아 온다.

누벨바그, OTT, A24, 잔다르크의 수난, 뉴 노멀. 그리고 다시.

어떤 시작


1954년, 스물 두 살 햇병아리 평론가였던 '프랑소와 트뤼포'가 영화 잡지에 글을 하나 기고한다. '앙드레 바쟁'이 1947년에 창간한 그 잡지는, 영화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잡지라 평가받는 '까이에 뒤 시네마'이고, 트뤼포가 쓴 글의 제목은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이다.

당시 프랑스 영화계에서는, 훌륭한 문학작품을 각색하여 스크린에 옮겨놓은 시대극이나 로맨스극이 인기를 끌었는데, 단지 인기를 끈 것 뿐만이 아니라, 훌륭한 문학이 지닌 양질의 유산을 이어받아 무리없이 영상화하는 것이 영화의 '예술적'인 척도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러니, '영화적'이라는 말은 그때까지만 해도 존재감이 미미했다. 설령 영화적인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느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문학적'이지도 않고 '예술적'이지도 않으니 다소 가볍고 천한, '신기한 유희적 순간' 정도와 동의어 취급을 받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면 깜짝 놀래키거나 신기한 합성 장면으로 관객을 즐겁게 하거나, 이름만 불러도 경이로움과 미소를 불러일으키는 '버스터 키튼'과 '찰리 채플린'의 슬랩스틱이 자아내는 웃음이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그토록 노골적으로 환하게 비춰보임으로 인해 느낄 수 있는 화끈거리는 순간 같은 것들이 소위 그 당시의 '영화적'이라는 말의 함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영화적인 볼거리'마저, 이미 영화의 탄생 초창기에 영화를 신기한 구경거리라 생각했던 구경꾼들과('열차의 도착'과 혼비백산한 관객들.) 그 구경꾼들의 기대에 정확히 부응하는 영화를 만들던, 하지만 그 자신은 끝까지 스스로를 감독이나 작가가 아니라 마술사로 여겼던 '조르주 멜리에스'의 수많은 영화들로 인해 이미 완성과 쇠락의 시기까지 모두 거친 후였으니, 사실 '영화적'이라는 말은 잘 쓰여지지도 않는 이상한 말이었던 것이다.

하물며 영화가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드문 수준이 아니라 없다시피 했는데, 생각해보면 영화가 탄생한지 기껏해야 오십 년 남짓 지난 때였던 그 시기에, 예술이라는 것은 모름지기 인류의 탄생과 함께 지금까지 계속 존재해온 숭고한 인류의 엄선된 자리인데, 영화가 그 곳에 기웃거리기라도 하려면 천년의 짬밥은 더 필요해 보였으리라.


영화가 어찌 문학과 같을 수 있으랴. 어찌 희곡과 음악과 회화와 건축과 조각과 나란히 설 수 있으랴. 그러니, 카메라와 필름과 영사기라는 신기술을 이용한 요란법석을 떠는 신기한 오락거리가, 그나마 예술적인 가치가 있는 척이라도 해서 그걸 즐기는 이들의 자존심을 세워주려면, 그 유일한 해법은 당연하게도 다른 예술을 잘 흉내내는 것이다. 이것이 트뤼포가 말한 그 '어떤 경향'이다.


트뤼포는, 그 경향을 비웃는다. 트뤼포는 '영화는 그 자체로 예술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 감독은 희곡이나 문학작품의 '작가'와 같은 지위를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작가주의'에 입각한 진지한 영화 비평이 시행되어야 하고, 그 비평의 방향은 단지 네러티브의 그럴싸함, 그러니까 소위 문학적인 면, 혹은 상상만 하던 장면을 잘 구현해 낸 정성, 그러니까 볼거리에 찬탄하는 것으로 '영화를 평가하고 분석했다.'고 만족할 것이 아니라, 영화가 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가늠하여,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지닌 고유한 면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영화적' 성취가 그저 그런 감독과 '작가'를 가를 것이라 말한다.


'영화가 예술이면 그럼 누가 영화 작가냐?' 고 묻는 수많은 이들의 질문에, 그 당시 주로 까이에 뒤 시네마에 모여 있던, 트뤼포를 위시한 젊은 영화평론가(라고 쓰고 그냥 영화에 미친 애들이라 읽는다.)들은 막힘없이 자신들이 자랑스레 생각하는 '작가'들을 끝도 없이 읊어대기 시작하는데, 콧대 높으신 영화종주국 프랑스의 교양인들은 그 리스트를 듣고 더 광분한다.


"언제나 자기 영화에 금발의 미녀를 등장시켜서, 걔가 죽네사네, 등장인물들이 밥을 먹는 탁자 아래 째깍째각 초침이 흐르는 시한폭탄이 있다는 걸 니들한테만 미리 보여줘야 니들이 더 긴장한다는 걸 나는 잘 안다며 세상 쫄깃한 영화로 사람들 안절부절 못하게 하는 저 뚱보가! 너희 영화미치광이 백수들이 말하는, 진정한 작가라고?"

'알프레드 히치콕' 말이다. 예술을 뭘로 보는 거냔 소리가 터져 나온다. 트뤼포와 친구들은 전혀 주눅들지 않는다. 오히려 바라던 바다. 그들은 영화적 완성도의 개념과 작가주의 영화의 정수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한 술 더 떠서, 이 모든 소란의 진원지, '까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장 '앙드레 바쟁'이 드디어 입을 연다. 그는 '영화란 무엇인가?' 라는 저서에서 예술에 관한 썰을 하나 푸는데, 내용은 대충 이렇다.


인류가 동굴에서 그림을 그리고 모닥불 앞에서 춤을 추고 나란히 서서 노래를 부르고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매끈하게 잘 만든 밥그릇에 갑자기 무늬를 새기고... 그러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이데아를 향한 본능적인 몸부림인지,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영혼이 느끼는 갈증인지 뭔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 뭔지 모를 어떤 욕망 때문에,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창조하고 표현하고자 노력해왔는데, 우리가 그것을 '예술'이라고 부른다면, 아직 '그 궁극의 예술'은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냐고 말한다.

그리고, 급기야 앙드레 바쟁은 정신나간 것 같은 소리를 하는데, 만약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그 예술이 완성에 가까워진다면, 이상적인 그 예술, 우리가 그토록 되찾고 싶은 그 이데아의 흔적은,  "바로 그 예술은 아마 '영화'일 것이다." 라고 말한 것이다.


바쟁의 이 주장을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화는 영화가 존재하기 이전에 이미 사상으로써 먼저 존재했는데, 사상으로써 존재하던 영화는 그야말로 '완전한 영화'이고, 그것은 영화라기 보다는 완전한 예술의 형태로써의 개념에 가까운데, 말하자면, 바쟁은 '완전영화의 신화'를 주장한 것이다. 우리 안의 이 신화가,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지금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먼저 빛을 관찰하던 회화에서, 빛을 담는 것으로의 전환이 일어나 사진이 탄생했고, 사진을 접한 인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치 운명처럼 영화를 창조했다. 영화 속에서는 빛이 시간을 견딘다. 그러니, 말하자면, '빛이 있으라.' 이건 창세기잖아?


그러니까 이 말이 뭔가? '영화도 예술이다.'가 아니라, '영화가 니네가 그토록 목 놓아 부르는 예술 중에서도 바로 그 궁극의 예술이야.' 라고 말한 것인데, 잘 실감이 나지 않는 분들을 위해 예를 들어보자면, 저 말은 마치 "이제 세상은 며칠 전에 만들어진 도지 코인으로 통일될텐데, 그게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금융체계의 미래라서 그런 거구요, 이렇게 되는 것이 우리 인간의 꿈이었다구요."라고 하는 것 만큼 어처구니 없는 소리다.


그런데, 저 한 애송이의 '어떤 경향 모두까기'와, 진지한 줄 알았던 어떤 편집장의 '사실 영화가 짱' 이라는 고백은, 한낱 해프닝으로 끝이 나지 않고 세상을 뒤집어 놓았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홀라당 뒤집히던 그 때의 난리통을, 우리 말로 하면 '새로운 물결', 영어로 하면 'new wave' 쯤 되는 단어로 명명했다. 그 난리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으니 그들이 불어로 말하기를, 'Nouvelle Vague.' 누벨 바그의 시작이었다.




누벨바그 스똬일


그 때 일어난 일들과 그 의미와 영향력을 모두 소상히 말할 순 없겠지만,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게 될 만큼, 지금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고 왠지 익숙한 일들이 그 때에도 일어났다는 것을 되짚어 보는 것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러니 그 때 얘기를 조금 더 해보자.


트뤼포가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을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까이에 뒤 시네마'에서 같이 영화비평을 쓰던 '장 뤽 고다르'가 직접 자기 영화를 찍는다. 그들과 함께 십대 시절을 씨네마떼끄에서 온갖 영화를 보는 것으로 탕진한 다른 친구들도 직접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씨네마떼끄의 출입문을 열고 그들을 맞이해줬던 형, 누나들도 마찬가지.


그들은 영화를 만들고 서로의 영화에 관해 비평문을 쓰고, 그 비평에 반박하고, 그 반박에 관한 또 다른 영화를 만든다. 다른 동네에서 그들의 영화를 보고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들은 이들이 이 흐름에 합류한다. 영화가 그 자체로 실험이자 증명이자 고백이자 논거이자 취향의 고백이자 자기확신이자 물음이 된다. 문제의 글을 쓰고 4년 뒤, 트뤼포도 자신의 첫 장편영화를 완성한다. 그는 '400번의 구타'라는 제목의 그 자전적인 데뷔작으로 깐느에서 감독상을 받는다.


3,4년 남짓한 기간 동안,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 각지에서 170여 명의 신인 감독이 자신의 영화를 만들었다. 카메라를 든 젊은 감독이 그야말로 죄다 길에 뛰쳐나와 '자기만의 영화 만들기'에 모든 것을 건다. 이게 과연 정말로 만들어질지, 이런 것도 영화가 되긴 할지, 도대체 어떻게 완성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방식으로 기어이 완성시킨 수 많은 영화들이 극장에서 상영된다.


어떤 예술 사조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 전후 상황과 배경과 분위기, 당시의 가치관, 피어 오르던 변화의 징조 등을 분석하고, 그리하여 구축된, 그 전이나 이후와는 구분되는 형식과 스타일과 주제의식을 말한다. 그런데, 예술이 대한 지식이 일천한 내가 보아도, 누벨바그는 좀 유별난 구석이 있다.


물론 누벨바그도, 그 이전에 일어난, 세계대전 이후의 이탈리아에서 태동한 '네오 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았고, 누벨바그 또한 그들이 작가주의 영화로 새로이 주목하여 추앙하던 미국 장르영화에 또 다시 영향을 끼쳐 '아메리칸뉴시네마'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아메리칸뉴시네마'의 스피릿은 또 다시 프랑스로 이어져 '누벨이마주'를 부추긴다. 그리고...


이런 분석이야 어떻게든 퍼즐을 맞추면 정리가 된다.


하지만, "그래서 '누벨바그 스타일'은 대체 뭔데?" 라고 누가 물으면, 우린 또 다시 아까 내가 말한 트뤼포의 대찬 딴지와 앙드제 바쟁의 놀라운 선언과 그 친구들 한 명 한 명의 이름과 그들의 영화의 제목과 그 영화들에서 그들이 저질러 버린 수많은 말도 안되는 짓들을 하나하나 언급해야 된다.


이를테면 점프컷, 예컨데 비선형 편집, 내재적 사운드와 외재적 사운드와 화면의 의도적 불일치, 제4의 벽을 일부러 깨부수는 등장인물의 시선, 촬영자가 들고 뛰는 카메라, 흔들리며 끝없이 지속되는 쇼트, 불편하기 짝이 없지만 가만 보면 정교하게 계산된 프레이밍, 도무지 해석이 불가한 네러티브, 의미 없는 대사와 침묵과 그 시간을 버티길 강요하는 편집, 같은 주제를 같은 방법으로 반복하고 변주하는 연작으로 채우는 일생 동안의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전하는 주제, 자기 영화를 패러디하는 후속작, 다큐와 픽션의 의도적인 병치로 야기하는 혼란...


왜 꼭 누벨바그에 대해 말하려 하면 꼭 이런 사태가 일어나고야 말까. 시간이 많아서는 아니고, 그냥 그래야 이 글이 안 끝나니까, 끝나지 않는 주절거림이 요즘 나의 재미라서 저 문제를 혼자 한 번 고민해봤는데,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렇다.


'누벨바그'는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에띠뜌드의 문제다.


그러니, 다시 곱씹어보자. 우리가 사후적인 분석에서 누벨바그에 대해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시작된 시기와 지역(50년대 중반에서 60년대 후반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이상하게도, 누구든 누벨바그에 대해 한마디씩 할 수 있을 것만 같을텐데, 누벨바그에 대해 운을 뗀 자라면 그 누구든, 그 때 거기서 '영화로 작가 되기'를 마음 먹고 그것을 실행한 감독들이 여태까지 만든 영화들의 갯수 만큼이나 다양한 주장을 펼칠 수 있게 되고, 그러는 것에 대한 거리낌도 없어진다.


누벨바그 스타일이라 칭해질 수 있는 것들은 미학적, 문학적, 주제의식적 측면에서 우리의 관심이나 흥미를 자극하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 자기 멋대로, 되는대로 영화를 만들었다. 각자의 필모그래피 안에서도, 평생 동어반복을 지속하는 이와 일관성 하나도 없음을 증명하는 이들이 공존한다. 그리고 그 당시의 모두는, 모든 영화는 하나같이 유일한 방식으로 유의미하다고 확신했고, 그들의 집단지성이 이룬 강렬한 자기 인식을 기반으로 실제로 현실세계에 작동한 무브먼트가, 영화라는 매체 자체의 등을 떠 밀어 앞으로 전진시켰다.


누벨바그의 일대종사, '장 뤽 고다르'의 대표작 제목을 빌려 보자면, "네 멋대로 해라."


그러니, 누구나 누벨바그의 스타일에 대해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는 데에는, 그리고 각기 다른 소릴 하면서도 그 모든 것이 바로 누벨바그 스타일라고 수긍할 수 있는 데에는, 그렇게 운을 떼 한 마디 시작하는 것으로 '누벨바그에 관한 대화에 나도 적극적으로 발 한 쪽을 밀어넣을 수 있고, 그렇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태도' 자체가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데, 그 확신에 찬 태도로 참여한 대화가 무궁무진하게 진전되고 있노라면, 누벨바그에 대해 뭔가 말할 것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지금 그 태도가 바로 그 '누벨바그 스타일'인 걸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스타일에 의거해, 저 옛날 불란서에서 일어난 일 말고, 우리가 겪은 일들을 한 번 소환해보자. 그 비슷한 스똬일로다가 세상이 바뀐 경우. 힌트를 두어개 말해보자면, 우선, 누벨바그가 일어난 분야와 전혀 다른 영역의 일이 아니다. 두 번째 힌트는, 트뤼포의 데뷔작 '400번의 구타'는, 당시 기준으로 카메라가 작고 가벼워져서 길거리에서의 자연스러운 촬영이 용이했기에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고, 그렇게 찍은 영화의 내용은 트뤼포 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에 관한 것이다.


뭘 말하고 싶은거냔 여러분들의 볼멘 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오니 그냥 말하겠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거다.


dslr, 인터넷 스트리밍, 전자상거래.


나는, 저것들이 한 점으로 모여 가능케 한 하나의 에띠뜌드가 있다고 생각한다. 좀 더 풀어서 말해보자면 이런 태도.


'누구나 쉽게 크리에이티브를 발휘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것이 미래다. 우리가 바라던 전방위적인 소통의 형태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러니 나도 나의 이야기를.  무엇이든 의미있다. 그러니 일단 해보자. 이 마음을, 지금의 나를 모두 걸어보자. 그렇게 한다면, 그걸 알아본 사람들이 반응할 것이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좀 더 짧게 말할 수 있을까. 그런 방법이 있을까? 있는 것 같다.


"Nouvelle Vague."



오래된 신세계


누벨바그 스타일로 콘텐츠를 창조하고 향유하는 것이 더 이상 새롭다고 느껴지지도 않게 된지가 한참이 지났다. 어쩌면, 실제로 70년 쯤 전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그 현상을 누군가에게 말해주어도, 그걸 듣는 이가 내심 '지금이랑 뭐가 달라?' 라거나, 어쩌면 '지금이 더 경천동지할 시대인 거 같은데?' 라고 생각할 지 모른다. 70년 쯤 뒤엔, 멀티버스의 비대면 세미나에 앉은 아바타들 사이에서, 펜데믹의 시대에 얼마나 세상이 급변했는지에 대한 논문이 발표되리란 예상을 하는 것도 새롭지 않을 지경이다.


나는 지금 브런치라는 오픈 플랫폼에 글을 쓰고 있다. 이 글들은 하나의 매거진으로 묶여 불특정 다수에게 무작위로 전해진다. 매거진의 글이 어느 정도 모이면 브런치북이라는 이름으로 엮을수도, 전자책으로 만들수도 있다. 누군가는 매우 유용하고도 재미있는 내용의 전자책으로 꽤나 많은 수입을 거두어 들인다. 널리 전파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성과 없이 이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 어떤 내용이든, 그것이 필요한 사람을 어떻게든 찾을 수 있다. 크나 큰 다행이자 위안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우린 뭐든 써서 내놓아도 된다. 기준은 없다. 기준과 수요와 목적을 내가 만들면 된다.


사진이든 영상이든, 빛을 이해하고 빛을 통제하는 것이 전부라 배웠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쉽게 손에 넣을  있는 디지털 장비들은 우리의 눈보다  많은 데이터를 이미지에 담는다. 8K 해상도의 이미지를 RAW 파일의 형식으로 담아, 까페에 앉아 노트북을 열어 어도비 라이트룸을 사용해서 보정을 하면, 보이지 않던 그림자 아래의 형상이 되살아나고, 하늘과 피부의 색이 바뀌고, 노이즈가 사라진다.


그러니, 실패가 있을  없다. 아니, 실패가 있으면  된다. UHD TV 감상하는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사활을 걸어야 하는 소개팅에 나설 때보다  빡세게 메이크업을 해야 하는데, 소개팅의 상대는   없는 모공과 주름을 거실에 앉은 시청자는   있기 때문이다. 기준은  없이 높아진다. 내가 상정한 수치는 무의미하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모두에 대응할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


파란 벽을 둘러세워 놓고 적당한 간격으로 일정하게 점을 찍어두면, 존재하지 않는 배경을 만들 수 있다. 평범하게 길거리를 걷는 장면조차, 부둣가가 될 수도, 도심 속이 될 수도 있으니 러닝머신 위에서 걸으며 촬영한다. 뭐든 가능하다. 누구나 할 수 있다. 해내기 위해 필요한 지식은 어디서든 어떻게든 알아낼 수 있다.    


이렇듯, 디지털 카메라, 인터넷 스트리밍, 전자상거래 같은 몇 몇 획기적인 기술로 인해, 이제 이 '궁극의 영화'를 더 쉽고 가깝게 만들었다. 마음만 먹으면, 이론 상으론 혼자서 CG, 색보정, 편집, 촬영, 연출, 배급까지 모두 해낼 수 있다. 다룰 수 있는 이야기의 한계도, 지켜야 할 틀도 없다. 배워서 할 필요도, 굳이 제한을 둘 필요도 없다. 일단 부딛혀 해보는 것이 결과물로 완성되어 타인의 반응을 이끌어내고 수익을 창출해내기까지 하는 데 필요한 과정이 지금처럼 쉬웠던 시대는 없다.


기술의 적극적인 수용과 그로 인한 변화가 탐탁치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심지어, 영화는 인간의 욕망이 자연스레 표출되고 서서히 축적되어  다른 매체나 예술들과 달리, 처음부터 특정 기술이 있었기에,  기술에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했기에, 그제서야 마침내 만들어진 존재다.


하여, 길지 않은 영화의 역사 속에서, 영화  장면을 구현해내기 위해 개발된 기술들이나 영화  이야기의 일부로 선보여진 상상의 산물들이 실제 현실세계에 영향을 끼친 예가 수도 없고, 지금도 최첨단의 기술이 집약된 산업이 바로 영화 산업이지만, 이제 누구도 영화가 신기술의 산물이라 말하지 않는다. 영화는 기술과 인문학의 완벽한 조화의 장이자, 가장 거대하고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엔터테인먼트다.


그리고, 아날로그 방식은 언제까지나 최후의 보루로써 소멸되지 않을만큼만 명맥을 유지하게 하고, 모든 것이 디지털로 대체가능하게 여겨지는 지금에는, 변화와 혁신의 속도가 우리의 상상을 아득하게 뛰어넘는다.  또래의 사람들이 우리 생애 중에 전세계의 모든 자동차 회사가 특정 년도 내에 내연기관 생산을 완전히 중단하겠다고 선언하리라고 예상할  있었을까?


이제 게임도 영화의 경계를 넘나든다. 이미 게임의 특정 구간에서 유저가 캐릭터를 조종할  없고 게임의 내용이 전개되어야  때엔, '시네마틱 영상' 펼쳐진다. 영화 마저 분기점에서 시청자가 취한 선택으로 내용이 바뀌는 인터렉티브를 실험하고 있다. 숏폼이, 웹드라마가, 핸드폰 세로 화면으로 쌍방향 소통하는 예능프로그램이 만들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2배속으로 보는 유튜브 영상들을 보느라, 네러티브를 소화할 시간도 여력도 없다. 여운은 없을수록 유리하다. 새로움으로 지금 당장   버린 자극의 공백을 당장 매꿔야 한다.  


그러니, 누벨 바그가 펼쳐질 때나 아메리칸 뉴시네마나 누벨 이마주라는 이름이 붙었던, 당대를 전복시켰던 영화들이 여타 다른 기존의 영화들과는 달리 보여서 수여받은, '새로움' 이라는 수식과, 이미 신세계가 펼쳐진지도 오래된 지금의 영화에 이식되는 '새로움'  양상이 다르다.


 때의 새로움은, 걸음마를  떼고, 조금씩 걷고,  달리기 시작하던 '영화' 전진시키는 것이었다. 지금의 새로움은, 전력질주를 하면 얼마나 빠를지 아직 미처 알지 못하는 '영화'라는 선수를 트랙에서 굳이 계속 뛰게 해야하는지 묻는 듯하다. 영화의   남짓한 역사 중에  번의 '새로운' 물결이 끼친 영향력이 아직 유효할까?


그러니까, 모두가 무얼 보아도 '영화 같다'고 말할 수 있는 오늘날은, '영화적'인 게 뭔지 묻는 질문이 제대로 이해되는 세상인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아직도 '노매드랜드' 같은 영화가 존재한다고. 그리고, 그 영화의 감독 '클로이 자오'가 '이터널스'도 만드는 세상이라고. 그 둘은 공존하고 있다고. 올해도 부산의 영화의 전당은 불을 밝혔고, 선댄스의 세례를 받은 영화가 개봉을 기다린다고. 화제의 데뷔작을 만든 바 있는 재능 있는 감독이 올해 자신의 두 번째 영화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다고. 천문학적인 자본을 들여 만드는 블록버스터들도 이야기의 깊이를 놓치지 않으며, 좀처럼 이해되기 힘든 독특한 이야기에도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많은 자본과 좋은 스텝, 배우들이 가세한다고, 그렇게 그 진가를 더 빛나는 영화들, 소위 아트버스터들도 각광받고 있다고.


 모든 말들에 나는 달리 반박할 말이 없다. 모두 맞는 말이다. 트뤼포처럼 쏘아붙일 생각도 없고, 내가 그렇게   있게 해줄 '어떤 경향'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내게 익숙한 '어떤 영화'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말이 과장이며 억지라는 것을  안다.


필름이 아닌 메모리 카드에 담긴 데이터도 여전히 24p 재생되며, 펜데믹도 언젠가 끝이  것이고, 펜데믹의 시대에 영화제 심사위원장으로 임명된 위대한 감독의 개회선언처럼 '영화는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계속되기 위해 진화하고 혁신할 것이지만, 그리하여 계속되는 영화는, '새롭지만 여전히 영화'  아니라, '새로워진, 그래서 영화가 아니라고 해도  무엇'   같다는 생각이 가시질 않는걸까.


오래된 신세계에서 널리 통용되는, 이제는 익숙해진 어떤 경향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드디어 찾아냈다. '어떤 경향.') 전기로 달리는 바퀴 달린 탈 것은 자동차라 불러야 하는가 이동도 가능한 디지털 디바이스라 불러야 하는가. 애플 워치는 시계인가 새로운 무엇인가. 우리는 쇼핑을 가는가, 놀러 가는가. '무엇은 무엇이다, 라고 부르지 않게 되는 것이 더 좋은 것 아냐?' '무엇은 무엇이고, 그것은 이래야 한다는 말이 뭐가 중요해?' 라는 감각. 그래서, 이 신세계에서의 '새로움'은 변화가 아니라 변신처럼 보인다. 경계가 흐릿해지고, 연결은 쉬워지고, 전환은 빨라지고, 적용되는 최신 기술은 일괄적이게 되는.


맹금류의 수장이, 우리가 어떻게 변신해서 살아남게 될지, 그 최종 진화의 형태가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가장 강력하고 새롭고 여전히 존재하는 무엇일 것이라고 말할 때, 그걸 듣고 있는, 갓 태어난 새끼 새가, 이제 막 사용법을 알게 된 이 부리와 날개죽지가 마음에 든다고 말하는 건 얼마나 한심한 소리로 들릴까. 지금 내가 하는 말이 그런 말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그렇게 말해야 되는 걸 어떡하나.


나는 물은 무서워하면서도 상어는 좋아한다. 수만  전부터 지금까지, 다른 동물들이 어떻게 진화했건, 상어는 계속  꼴로 태어나서 거의 변화 없이 그렇게 살아왔다고 여겨지는 것이 학계의 정설인데, 좋게 말하면  때부터 진화의 최종형태였단 소리고, 달리 말하면 '' 그렇게 살아왔다는 소리다.


그래서 상어가 머리부터 꼬리 끝까지,  언밸런스한 동글동글한 눈매와 하루가 멀다하고 쑥쑥 빠지고 다시 나는  무시무시한 이빨과 지느러미와 독특하게 찢어진 아가미의  모양 하나하나가   모여서,  그대로 그토록 상어 답게 보이는 것인데, 나는 영화도 내가 생각하는 영화다움을 계속 그냥 지니고 있으면 좋겠다 싶은 것이다. 아마  글의 중반 이후에 쓰여진 대부분은 쓸데 없는 나의 기우일 것이다.  또한 알고 있다. 그리고,  글은 이런 황당한 걱정과 망상으로 마무리하려고  글이 아니니 걱정 마시길.



뻔한 두 단어, '예술'과 '콘텐츠'


나는 지금 무슨 이야길 하려고 이러고 있는걸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트뤼포는, 문학작품을 각색해서 만드는, 마치 연극무대 실황녹화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천편일률적인 영화들을 보며, 영화 고유의 가능성에 대한 도전과 시도와 파괴와 창조가 없는 그 타성에 젖은 경향성에 분노했다. 그와 누벨바그 친구들은 영화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정해진 것은 없고, 이제 막 탄생한 궁극의 예술에게 필요한 영양분은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들어내야 하고, 자신들이 그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말을 증명했다. 영화는 제7의 예술이 되었다.


여태 내가 쓴 글의 요지에 따르면, 누벨바그라 불리는, 그 들끓는 영화광들의 영화 만들기 광풍의 시대보다, 지금이 더 누벨바그 스타일이 팽배한 시대다. 모두가 콘텐츠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산다. 평범하게 사회생활을 하는 일반인에게조차, '사람이 자기 콘텐츠가 있어야 된다.'라는 식의 말을 한다. 지금 나는 의도적으로 '영화'와 '콘텐츠'를 같은 항에 놓고 섞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별로 이상하지 않은 것이 요즘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그걸 굳이 뭐하러 따져? 무슨 의미가 있어?'


당연히 영화는 콘텐츠와 동의어가 아니다.   무엇이  우월하다거나 상위 개념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자기 콘텐츠가 있어야 된다는 말에서, 콘텐츠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살아온 역사와 그를 통해 깨달은 통찰 등이 그것이리라. 영화가 언제나 통찰을 주는 것은 아니다. 요즘에는 영화라는 단어는 오히려 즐거움과 화려한 오프라인에서의 이벤트, 혹은 차분하게 즐기는 지적이고 감상적이고 고요한 자기만의 시간 같은 이미지를 불러 일으킨다.


그런데, 모두가 크리에이터이자 콘텐츠 마니아인  시대에, 영화는 어쨌든 콘텐츠의 하위 개념이   하고, 콘텐츠라는 것도, 그것을 스스로 만들어내기 쉬워진 만큼, 그것을 향유하는 행위 또한 쉬운 일로 여겨지는  하다. 그러니, 콘텐츠를 소비한다고 하면 떠올리는 것은 치맥과 노트북과 수면바지이고, 영화를 본다고   떠오르는 것은 넓은 로비와 팝콘과 같이 보러  친구와 나름 꾸민  모습이 되는  하다.

  

그리고, 또 어떨 땐, 굳이 영화라는 특정 매체와 더 포괄적인 개념의 콘텐츠라는 단어를 굳이 왜 나누냐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런 생각을 하는 이에겐, 극장이나 자기 집 프로젝터나, 데스크탑의 모니터나 노트북은 큰 차이가 없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1.5배속이나 정배속이나 크게 보면 같은 게 된다.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지.'라는 소릴 하려는 게 목적은 아니다. 오히려, 나보다 더, 특정 영화는 극장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마블의 모든 영화,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모든 영화는 반드시 극장에서, 가능하다면 용산 아이맥스나 돌비 애트모스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제 흔하다.


 지점에서 나는 질문을 하고 싶어진다. 그들이  영화들을 왠만하면  화면과 끝내주는 사운드 시스템이 갖춰  곳에서 보고 싶다고 말할  바라는 것은, 사실 놀이기구를 타는  같은 체험의 영역에 속하는  아니냐는 질문. '열차의 도착' 시대로의 순간 이동. 물론,  영화들도 영화다. 그런데, 우리는 어떨  영화를 광범위한 '콘텐츠'라는 개념 안에 섞어 넣어 버리다가, 어떨 때는 매우 좁은 범위로 한정하여 영화의 '영화적' 면을 축소시킨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영화적 경험' 편협함 아닐까?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모든 '누벨', '', '새로움' 지나  '신세계' 도래한 '실제 같은 체험' 욕망. 그러니, VR AR로의 전환도 자연스레 이해가 간다. 동시에 의문이 든다. 사람 간의 접촉은  영역에 그대로 두고, 2차원의 스크린과 디지털 가상현실은 자신의 영역에서 다른 새로움을 향할 수는 없는가?


결론을 내자. 영화는 쉽고 강력하고 친숙하고 즐겁고 익숙하지만, 정확하게 그와 반대일 수도 있다. 그리고, 예술은 그래야만 할 때도 있어야 한다. 당연하게도, 영화는 그 자체로 다른 무엇과도 비교 불가능한 고유의 예술이기도 하다. '취미 : 영화감상' 이라는 말이 그 누구에게도 별다른 거부감을 주지 않을 만큼 영향력이 큰 영화는, 뻔한 동시에 그만큼 독특한 예술이다.


다른 예술과 영화는 뭐가 다른 걸까? 영화가 다른 예술에 비해 압도적으로 대중적이니,  독보적인 위상은 오히려 영화만의 장점이라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미술도 음악도, 아니 어쩌면 미술과 음악이 우리에게  익숙하고 쉽게 접할  있는 시기가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연스레 노래하고 춤추고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읽고 쓴다. 동화책을 보는 것보다, 컴퓨터의 편집 프로그램을 열어  편집을 먼저 하는 아이들은 드물다. 그렇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회화와 음악과 문학은 진지하게 다뤄진다.


영화를  잡고 긴장해서 봐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는 일단 즐기고 생각은 하고 싶을  하는 매체로 여겨지는 것이 당연한  아니지 않나. 우리 모두, 예술로서의 영화에 대해 말하면, 고리타분하다거나 있어보이려고 재미도 없는 것에 괜히 의미를 부여하는 먹물이라고 여기는 마음이 어느 정도 있지 않나. 그림을 사서 모으거나 전시를 보러 다니는 것을 즐기는 이들을 보며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하진 않지 않나.


어쩌면 영상 매체가 익숙해져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예전엔 어린 학생들에게 취미를 적으라고 하면 그저 생각없이 독서라고 적었듯이, 요즘은 그것이 영화감상으로 바뀐지 오래되었기도 했고,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보정하거나,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고 편집해서 블로그나 유튜브에 업로드하는 것이 특별히 어려운 일이 아니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에는 사실 약간의 괴리가 생기게 되는데,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거나 즉석에서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흥에 겨워 춤을 추는 것과는 달리, 영상물을 만들어내는 것에는 그보다는 계산과 체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길을 가다 발견한 길고양이를 찍은 영상 같은 건 논외로 하자. 그리고, 글을 쓰는 것 또한 여기서는 제외하자. 네러티브에는 어찌되었건 그 안에서 논리가 작동해야 되니까.)


그러니까, 거칠게 말해보자면, 순수예술과 영화는 좀 다른 면이 있다고 느껴지는데, 앞서 말한 바 있는 것처럼 영화의 태생은 특정 기술의 탄생과 동시에 시작된 것이라서, 그 기술을 사용한다는 개념이 영화를 보고 만든다는 행위와 너무 밀접하기 때문에, 영화를 다루는 것은 그 기술을 향한 관심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착각을 주기 쉽다. 그래서 진입장벽이 있는 동시에 왜곡되기 쉽다. 쉽게 말하자면, 영화는 특정기술에 대한 취미와 착각되기 쉽고, 생각보다 체계가 선행되어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생각보다 미완으로 남겨지기 쉬운 예술이다.


그러니, 영화는 막상 만들려면 어렵고, 그렇게 어렵게 만들어진 영화일수록 보기엔 편하고, 그러니 우린 만들어진 영화를 보며 느끼는 쉬운 감동과, 우리가 만드는 영상물의 손쉬워 보임과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면모 때문에, 우리는 영화가 예술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인지하는 것을 어려워 한다.   



그야말로 뉴 노멀


사실, 얼마 전 극장에서 본 영화 한 편과, 집에서 편하게 누워 유튜브로 본 또 다른 영화 예고편 한 편을 보고 문득 든 생각 하나가 이 길고 긴 헛소리를 시작하게 한 것이데, 그 영화는 데이빗 로워리 감독의 '그린 나이트'이고, 그 예고편은 조엘 코엔 감독의 '멕베스의 비극'이다.


이 둘을 나란히 놓고 보니, 또 다른 몇몇 영화와 아직 개봉하지 않은 영화나 드라마들의 예고편들도 한 데 엮였는데, 줄 세워놓고 보니 내가 기대를 하고 있는 것들이거나, 보고 나니 역시 기대를 충족시켜준 것들이다. 아직 보지 못한 '세인트 모드'와 '퍼스트 카우'의 예고편, 보고 흡족해 했던 '미드나이트 스카이', '노매드랜드', '결혼 이야기.'


다시 이 리스트들을 뜯어보면, 우선 'A24'라는 제작사가 눈에 띈다. '문라이트', '룸', '플로리다 프로젝트', '미나리', '고스트 스토리' 등을 제작한 회사. 위에 언급한 '세인트 모드', '퍼스트 카우', '그린 나이트', '멕베스의 비극' 도 죄다 A24의 라인업들이다. 나는 그저 A24가 제작한 영화들을 좋아하는 취향이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일견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어떤 것에 A24가 부합한다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일 것이다.


'칼 드레이어' 라는 덴마크 감독의 '잔 다르크의 수난' 이라는 무성영화가 있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해는, 누벨 바그가 도래하기 수십 년 전, 그리고 최초의 유성영화가 만들어진지 불과 1년 뒤인 1928년이다. 이 영화는, 영화가 탄생하고 나서 슬랩스틱의 원초적인 재미나 흥미로운 장면을 보여주어 놀라움을 자아내는 순간과 이야기 전달에 집중하는 넓은 컷 일변도의 양식을 막 벗어나기 시작할 시기의 대표적인 걸작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영화사적으로 지니는 중요성을 단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로 '클로즈 업'이다. 이 영화는 지금은 누구나 익숙하게 사용하는 클로즈 업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영화였다. 그 전까지의 영화는, 전체적인 상황을 잘 보여줄 수 있는 풀 샷 일변도의, 한 씬 안에서의 컷 나뉨도 거의 없다시피한 구성을 지녔는데, 이 영화는 영화의 대부분이 인물의 표정을 비추는 데 집중함으로써 보는 이에게 충격적인 감정의 파고를 느끼게 만들었다.


잔 다르크의 재판이 진행되는 재판장에서의 대화가 주를 이루는 이 영화는, 그나마 만들어놓은 재판장 세트를 보여주는 컷마저 극도로 자제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이 미니멀한 영화로 남아있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느냐? 심지어 무성영화이니 오죽하겠냐 싶겠지만, 흑백 무성영화를 보는 것이 익숙하지 않음에서 오는 생소함을 버티고 나면,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잘난 척하고 싶어 저 헤묵은 무성영화를 들이민 것은 아니다. 고도로 계산된, 그 의도와 실행의 결과가 일치하는, 집중하는 바가 확실하고 극도로 절제된 미니멀한 영화가 주는 재미와 감동에 대해 말하고 싶었기에 예를 든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그 당시 사람들이 느꼈을 클로즈업의 놀랍도록 파괴적인 효과가 지금에 와서는 그렇게까지 대단치 않아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기발한 시나리오도 아니다. 이미 있던 소설을 각색한 단순한 이야기. 만약 그렇다면 이 영화는 어쩌면 트뤼포가 말한 저 '연극실황을 건조하게 촬영해놓은' 문학작품을 각색한 '뻔한 경향 아래의' 그 영화들 중 하나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제야 이 길고 긴 글의 핵심을 밝혀야 할 때가 왔다.


트뤼포가 말한 '영화적'인 것에 대한 연구와 시도는 누벨바그 이래 계속되어 왔다. 내가 앞서 기우에 가까운 우려를 한대로, 오히려 영화가 더 이상 영화가 아닌 모습이 되어버릴 것을 걱정할 만큼, 그 진화는 점점 가속화되고 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둘러보니, 내가 '영화적'이라고 느끼는 영화는 오히려, 그 수많은 새로운 기술과 화려한 효과와 복잡하기 이를데 없는 플롯과, 얽히고 섥히고 확장되어 매체를 넘나드는 시도를 계속하는 세계관이 지속적으로 개발되는 '죽여주는 킬러 콘텐츠'가 아니라, 잔 다르크의 얼굴을 가까이서 들여보는 것으로 충분히 목적한 바를 다 이뤄낸 한 무성영화처럼,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영화들이다.


어쩌면, 어떤 새로운 시도도 보이지 않는 듯한 '노매드랜드'는, 가볍디 가벼운 디지털 씨네캠코더 하나와 열댓명의 스텝들로 완성되었다. 그 영화를 만들고 나서 지금 세상에서 가장 비싼 영화 중 하나인 '이터널스'를 만든 '클로이 자오'는, 그 엄청난 배우들에게 슈퍼히어로 슈트를 입히고는,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려 해안가에서 해 지는 장면을 찍었다. 어떠한 새로움도 없이, '노매드랜드'를 찍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태까지 수십 편의 마블 영화 예고편을 보아왔지만, 숭고함이 조금이라도 느껴지는 마블 영화는 아직 보지도 않은 '이터널스'가 유일한데, 그건 거기 나오는 노을이 진짜여서 그 은은한 빛이 닿은 단역 배우의 피부가 정말 따뜻함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마치 내 팔도 따뜻해지는 착각이 든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오바하지 말라고 할테고, 나는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무언가가, 예술과 콘텐츠를 가르는 가장 명확한 기준이라고 말할 것이다.

'클로이 자오'의, 진짜를 담는 방법과는 또 다른 방법을 취한, 제작의 형태도 판이하게 다른,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결혼이야기'도 예를 들 수 있다. 스칼렛 요한슨과 아담 드라이버의, 잊을 수 없이 살벌한 말다툼 장면은, 서로가 서로의 말을 끊고 자르고, 소리 지르고, 주저 않고, 침묵하다가 말을 이어가고, 급기야 폭발적인 몸짓과 오열의 순간을 지나 착잡하게 마무리된다.


그 동안 배우들의 움직임과 서로의 대사를 씹는 순간 등을 보며, 마치 모든 것이 실제로 일어났거나 애드립으로 가득 차 있는 어떤 순간을 내가 목격한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나중에 그 영화의 시나리오를 구해서 보고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놀랐다. 영화에 나오는 모든 것들은 시나리오에 그대로 적혀 있었다. 말줄임표 뒤에 어느 순간에 상대 배역이 어떤 단어를 어떻게 발음할 때 그 말을 끊을지, 언제 슬며시 앉기 시작할지, 언제 말을 더듬을지... 모든 것이 적힌 그대로였다. 이건 진짜가 아니라고 말할텐가.

무대에서의 인물 동선을 블로킹이라고 한다. 컷 편 집이 존재하지 않는 연극 무대에서, 이 블로킹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다. 영화에서도 그 블로킹이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콘티다. 어떤 컷을 어떤 위치에서 어떤 사이즈로 촬영할테니, 그 때의 인물의 움직임과 위치, 그리고 카메라의 움직임을 미리 정해놓고, 그 컷들을 이어붙이면 씬이 어떻게 완성될지를 미리 알 수 있는 설계도가 바로 콘티다. 누벨바그 시대의 그 생동감 넘치고 예측불가능하던 새로운 영화들과 비교해 보면, 완벽한 콘티와 스크립트 그대로를 구현해낸 '결혼 이야기'는, 그래서 '어떤 경향' 아래 있는, 구식 영화인가?


후반작업에서 cg로 의상도 배경도 나중에 어떻게든 바꾸는 것이 가능한, '새로움의 집합체'와도 같은 영화들도 있다. 이런 영화의 메이킹 필름을 보다보면, 종종 배우들이 자신이 영화 상에서 어떤 장소에 있는 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촬영하는 순간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실로 새로우니 과연 영화적인가. 지금은 너무나도 손 쉽게 가능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수 많은 선택지가 얼마든지 새로 생겨나는 최신 영화의 바로 이 같은 과정을 결단코 막기 위해서, 그와는 정반대의 접근을 위해 고안된 것이 콘티라는 것이다. 무엇이 진화의 모습일까?


'그린 나이트'는 영화의 후반부에, 잊을 수 없는 몽타쥬를 보여준다. 그 몽타쥬 장면을 통해,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어쩌면 전통적인 네러티브에서라면 절대로 써먹으면 안된다고 귀가 닳도록 들어온 바로 그 플롯을 진행시킨다. (전문용어로, "아, ㅆㅂ 꿈.") 그런데, 바로 그 플롯과 그 단순한 편집 때문에, 이 영화는 완벽한 엔딩을 선사한다. 그 여운은 상당하다. 그 어떤 기발함도 없다. 아무리 곱씹어봐도 그렇게 만들 수 밖에 없는, 뻔하디 뻔한 마무리다. 다만, 그 뻔함은 숙명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절묘하게 밸런스를 잡고 있기에 그토록 감탄스럽다.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sf 영화 '미드나이트 스카이'는 어떤가.  쓰여진 장편 소설을 분량에 맞게 잘 각색해서, 튀지 않는 연기와 미쟝센으로 잘 갈무리했다. 하지만, 그 흔한 대규모 인파를 비춰주지도 않는 인류 종말을 다룬 이야기라니. 충분히 예측 가능한 스토리. 볼 것도 없는 단순한 세트. 그렇다면 보는 내내 졸려야 한다. 트뤼포의 십자포화를 맞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물론 이 영화가 걸작은 아니다. 평범한 영화다. 하지만 좋은 영화다.

나는 이 영화를 아이패드 미니로 보았다. 잠이 오지 않은 새벽에 시리얼을 먹고 나서도 한참을 식탁 앞에 멍하게 앉아 있다가 아무 생각없이 보기 시작했는데, 이 영화가 시작하면, 조지 클루니가 아무도 없는 텅 빈 북극의 관측소에서 시리얼을 먹고 있다. 그 새벽의 나의 기분과 이 영화의 배경이 너무 잘 맞아 떨어진 탓에, 손바닥보다 조금 큰 화면으로 그 영화를 보고 있다는 건 금새 잊혀졌는데, 그 뿐 아니라 내가 스탠드 조명 하나에 의지해서 그 영화를 보고 있는 내 방이, 영화 속 관측소 어딘가와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이것이 VR이 아니고 뭔가. SF영화를 그 작은 화면으로 봤다니, 나는 그 영화를 제대로 본 게 아니란 말을 들으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할까?

   

마지막으로, 코엔 형제 중 조엘 코엔이 처음으로 단독 연출을 맡은 신작 '멕베스의 비극'. 멕베스는 숱하게 영화화 되었다. 이 이야길 또 만든다고? A24가 제작하고 애플 TV+에서 공개된다는 이 영화의 예고편은 심플하다. 흑백의 화면에는, 익숙한 배우들의 얼굴이 등장한다. 그들은 화면을 바라보고, 익숙한 멕베스의 대사를 읊고, 고뇌하고, 눈을 치켜 뜨고, 안개 속을 걷는다. 연극 무대 같은 배경 또한 거의 텅 비다시피할 정도로 단순하다. 덴젤 워싱턴의 얼굴에서 깊은 주름이 천천히 꾸물거린다. 프랜시스 맥도먼드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잠시 흔들린다. 이 짧은 예고편을 보고 나자, 갑자기 영화 한 편이 떠오른 것이다. 아! '잔 다르크의 비극.'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든다. 최소한의 인물과 배경, 정밀하게 계산된 프레이밍과 동선, 정확한 타이밍에 전환되는 컷, 절제되었지만 확실한 존재감을 주는 음악. '잔 다르크의 수난'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크게 변치 않았지만 그 어떤 새롭고 복잡한 기술보다 영화 만들기의 핵심이 되는 단순한 기술.


이 기술의 정수가 가득한 영화라면, 그것이 어디서 제작되어 어디서 상영되든, 너무 엄청나서 도리어 실감이 나지 않는 스펙터클을 앞세우거나 복잡하고 장황해서 덕질할 거 많은 네러티브를 내세우는 대규모의 드라마와는 차별화되는 새로운 영화로 떠오를거 같다는 생각.


미니멀하고 단순한, 오래된 기본기로만 만들어진 영화. 그래서 도리어 다시 새로워진 영화.


이게 뉴 노멀이 아니고 뭔가.



다시


이 장황하고 두서없는, 하찮은 통찰이 왜 이 매거진의 마지막이어야 하는가.


이 글의 제목이 그 이유인데, 모든 것은 돌고 돈다. 예기치 못한 영화도 돌아온다.


저 '뉴 노멀'이 새로움과 영화다움의 다음 기준이 될지도 모른다고 멋대로 상상하고 나니,


그런 영화라면, 그런 방법과 모양으로 만들고 싶은 것이 있다.


이 생각이 드니, 한 동안은 리뷰를 더 쓸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지금 돌아온 걸까, 이제 돌아가야 하는걸까.


그렇거나 말거나, 이걸 쓰느라 실컷 재밌었으니 그걸로 됐다.


Fin.

이전 09화 네 눈에 훌륭한 건 대체 어떤 건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