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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pt Oct 10. 2021

'장르'고 나발이고, '역사적 비극'을 이야기할 때엔

제니퍼 켄트의 "나이팅게일"이 의도대로 성취한 것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

'다시 생각해봐야 돼.' 라는 말.


초등학교가 국민학교였던 시절이 있었는데, 몇 안 되는 그 때 기억 중 하나로, 4학년 담임 선생님이 우리에게 선사한 혼란스러운 질문 두어 개가 있다.


1.

뚱뚱한 친구를 보며 돼지라고 놀리는 건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돼지가 뚱뚱한 건, 그런 몸집이 되도록 인간이 계속 먹여서일텐데, 초딩들이 그걸 감안할 리가 있나. 한 두 살 많은 상급생들이 뚱뚱한 친구를 돼지라 놀리니 그걸 듣고 배운 걸테지. 우리 반에도 역시 그렇게 불리는 애와 그렇게 부르는 애들이 있었다. 당연히, 양쪽 모두 기분이 좋을 땐 싸움으로 번지지 않지만, 어느 한 쪽이 기분이 나쁘면 마치 싸움을 시작하기 위해서라도 의례히 그 동물이 소환이 되는 법이다.


그 날은 생각보다 크게 싸움이 났다. 돼지라 불리는 애는 참지 않고 달려들었고, 돼지라 부른 애는 실컷 무시하고 놀리던 그 친구가 달려들자 도망을 가기 시작했는데, 잠자코 보던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교실의 앞 뒤 문을 막고 그 둘을 빙 둘러쌌다. 싸움에 있어 무시할 수 없는 요소로 체격을 들 수 있는데, 그러니 쉬는 시간 내내 실컷 놀려대던 가해자는 바닥에 깔려 순식간에 폭행의 피해자가 될 운명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담임 선생님이 종 치기도 전에 교실로 들어서서 사건은 급히 마무리되었다.


의기양양하게 놀려 대던 아이는 머리가 다 헝클어지고 얼굴에 멍이 났고, 참고 참다 폭발한 아이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눈물까지 글썽였다. 담임 선생님은 굳이 누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말하지 않아도 무엇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초딩들이 항상 그렇듯, 선빵을 맞은 애는 '쟤가 먼저 때렸어요.'라 말한다. 그 다음 순서는, 선생님이 때린 애에게 왜 그랬냐고 묻는 것이고, 그 순간 울먹이던 아이는, 자기 입으로 그 단어를 내뱉는 것조차 힘든 양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00가 맨날 저보고 돼지라고 놀리잖아요.'


그 다음 순서는 모두가 조금은 숙연해지는 것이고,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선생님은 '그렇게 놀린 니가 잘못했지? 그리고 그렇다고 친구를 때리면 너도 똑같이 괴롭히는 놈 되는 거야.'라는 정답을 내리고, 그 명쾌하고도 뻔한 판결을 듣게 된 우리는, 이후에 진행될 상호 간의 악수와 사과의 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 정석인데, 이 때 우리 담임 선생님은 우리 모두를 일시정지 시켜버린 한 마디를 내뱉는다.


"돼지가 왜?"


눈물을 닦고 진정하던 아이가 눈이 똥그레지며 되 묻는다. "예?"

"뚱뚱하다고 돼지라고 놀리는 게 그렇게 화가 나면, 너도 돼지가 뚱뚱해서 싫다는 소리잖아. 돼지가 어때서? 저 놈이 너한테 돼지라고 하든 말든."


헐. 나는 그 순간 내가 김치를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1학년 때부터 줄곧 나의 성씨가 배씨라라는 이유로, 창의성 드럽게 없는 놈들에게 '배추'라고 불리던 나는, 사실 김치를 좋아하고, 김치의 원재료는 배추, 그러니 그 놈들이 나를 배추라 부르든말든, 나는 배추가 좋은데 왜? 화낼 이유가 없잖아. 라고 내가 생각했..을리 없잖아! 내 옆에 앉은 신씨 성의, 별명이 '신발장'인 녀석은 그럼 신발이나 목공을 사랑하게 되면 되는걸까. 하지만, 과연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볼 문제였다. 그러게, 돼지가 왜? 나는 일기장에 저 대화를 적었다. 생각의 결론은 내지 못했다. 아마, 갑자기 돼지고기 반찬을 먹는데 왠지 맘에 걸린다는 따위로 대충 마무리 지었던 것 같다. 선생님은 그 일기에 '참 잘했어요' 도장을 급하게 대충 찍어 자국이 옆으로 밀렸던 것도 같다.


2.

한 번은 선생님이 수업을 하다말고, 갑자기 흥부놀부 이야기에 대해 너희 부모님들이 어떻게 생각하냐고 집에 가서 물어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냥 그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냐고 묻지 말고 선생님이 그렇게 물어보라고 했다고 말하면서,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해보라 했다. 숙제를 내듯 공식적으로 말한 것은 아니고,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어떤 맥락이 있었는데, 요즘 세대 어쩌고 하다가 그런 이야기를 한 것 같다. 아무튼, 나는 그걸 꼭 물어보고자 마음 먹었다. 엄마와 같이 수건을 개다가 기회가 왔다.


"엄마, 선생님이 흥부놀부 이야기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래."

"뭘 어떻게 생각해? 책에 적힌 대로지. 욕심부리지 말고. 니들도 형제 간에 서로 돕고."

"음..."

"그 얘기 너도 알잖아. 선생님이 뭘 물어보라고 했는데?"

"선생님이, 너희 부모님들은 그 이야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하랬어."

"음..."


손에 쥔 수건을 탁 털고 삼등분으로 정확히 접어서 바닥에 놓는 동안, 엄마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다음 수건을 집어들면서 숨을 한 번 들이 쉰 후, 엄마의 청산유수같은 답변이 시작되었는데, 난 그걸 일기에 적지 않았다. 그 일기를 선생님이 볼텐데, 그럼 엄마가 혼이 나는 건 아닐까, 혹은 만약에 선생님도 엄마도 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그걸 기록하는 건 잘못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책임지지도 못할 놈이 아무 생각없이 자식은 수십 명을 낳아놓고, 능력도 없어서 결국 온 가족이 형한테 얻어먹어야 될 형편으로 만들었지, 오지랖은 좀 넓어? 그 놈은 혼나도 싸지. 결국 지가 한 게 뭐가 있나, 제비 다리를 고쳐주고 받은 박씨에서 보물이 쏟아졌다고? 그게 그래 흥부가 다 잘해서 된 일이라고? 무슨 그런 이야기가 있냐."


지금의 내가 그 때의 엄마보다 서너 살 더 많다. 삼십 대 후반으로 향하던 나의 모친과, 그 당시에 이미 환갑에 가까웠던 나의 담임께서는, 어쩌면 4학년 짜리 애들과 허심탄회하고도 진지한 대화를 시도한 걸지 모르겠다.


3.

이런 걸 뭐라 말해야 할까. 인식의 대전환? 너희가 그냥 수긍하고 넘어간 것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된다는 주장. 저 두 사례는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 뻔하고 단순하고 강렬한 메세지, 혹은 인정삽화의 한계는 분명하다. 놀린 너도 잘못이고, 그렇다고 맞서 욕하고 싸운 너도 잘못이란 말을, '돼지' 라는 단어가 아니라 '병신' 이라거나 '깜둥이' 라는 단어를 기점으로 시작된 싸움에 똑같이 적용하면, 표면적인 갈등을 봉합하기만 할 뿐 그 기저에 깔린 차별적 인식에 대해 지적할 수 없게 된다. 착한 흥부는 불쌍하고 놀부는 나쁜 놈이라고, 하지만 흥부는 복을 받을 것이라고, 그러니까 착하게 살라고 주장하기 위해 조선시대 때 쓰여진 저 이야기는, 10살 짜리 자식을 둔 20세기의 부모에겐, 자신에게나 자기 자식에게나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니,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날카로운 시각은 때로 매우 유의미하다.


하지만 그걸 이해하기엔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겐 '새로운 시각으로 재고해 보는 것'은 혼란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이럴 경우엔, 그러니까, 제대로 조준되지 않은 '생각 재고 강요'와 '논의의 지평을 넓혀보기', 달리 말해 '다시 생각해보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이야기는, 그 새로운 시각에 의거한 자신의 메세지를 위해 다른 모순이나 원래 이야기의 순기능을 무시하고 단순화되어 버릴 한계를 지니게 된다. 쉽게 말하자면, 그 말 자체가 또 다른 흥부전이나, 피해자를 앞에 두고 내뱉는 '돼지가 왜?'가 될 수도 있다는 소리다.



'이 시대에 꼭 필요한'과 '놀랍도록 실감나는'


'바바둑'이라는 무시무시한 영화로 단숨에 사람들에게 각인된, 제니퍼 켄트 감독의 2020년 작 '나이팅게일'의 야심과 뚝심은 대단하다. 대작을 만들겠다는 욕심이 들끓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굉장히 미니멀한 영화고, 화면비도 16:9가 아닌 1.33:1의 비율을 채택했는데, 그 규모와 형식을 취함으로 인해 담보된 전체적인 만듦새도 훌륭하다.   


이 영화의 포스터에 적혀 있는 수 많은 매체들의 극찬이 이를 반증한다.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 Slash film -

"끊임없이 몰아치는 강렬함" - Guardian -

"영혼까지 파고드는 영화" - Independer -

"숨이 멎도록 놀라운 걸작" - Little white lies -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영화" - Times UK -

"놀랍도록 실감나는 스릴러" - nerdly -


영화 포스터에 적힌 문구라는 것이 언제나 호들갑스럽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 엄선된 멘트들에서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다. 저 문구들을 읽다보면 이들이 의도치는 않았을 흥미로운 지점이 발견되는데, 마지막 두 평가를 나란히 놓고 보자면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건 '놀랍도록 실감나는 스릴러' 영화라는 건가?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고 끊임없이 몰아치는 강렬함으로 영혼까지 파고드는 숨이 멎는 걸작'이란 말은, 다 이어붙여도, 뭐 그럴 수 있다 싶다. 물론 정말 이런 영화라면 영화사에 길이 남지 않을 수 없겠지만, 내가 오늘 보러 온 영화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바로 그 영화일 수 있단 것은 행복한 일이니까.


뭐, 사실 마지막 두 문장을 이어놓고 보면 자연스럽지는 않다 싶지만,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 영화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지금 당장 보아야만 하는, 시대정신을 담은 걸작인 동시에 재미도 있는, 탁월한 장르영화라는 말이 된다. 얼마나 좋아?


아마 모르긴 몰라도 세상의 모든 영화감독들이 만들고 싶은 영화는 '영화사에 영원히 기록될 걸작'이라는 만신전에 오르는 궁극의 영화가 아니라, 그 보단 좀 더 가까이 있는 듯 보이고, 어쩌면 자기 생애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은, 가능한 최정점으로써의 '사회문제와 시대정신을 담은 동시에 재미있기도 한 탁월한 장르영화' 이리라.


그러니, 이 영화에 대해 잔뜩 기대는 하되, 이 영화가 부디 저 '감독들이 비밀스레 욕망하는, 자기 딴엔 겸손하게 상정해 놓은, 가능한 최정점'으로서의 영화가 아니길 간절히 바라는 수 밖에.


그리고 결과는?

나는 처음부터 그걸 노리고 만들어진 영화가 그걸 이뤄 낸 역사를 본 적이 없다.



원래 이 길이었어, 생각 없이 따라 온 니들이 몰랐던 거고.


1. 장르


이 영화가 왜 '처음부터 그것(사회문제와 시대정신을 담는 동시에 재미있기도 한 탁월한 장르영화)을 노리고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지 말하자면 우선 이 영화의 장르를 말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여러분에게 미안하지만 조금은 듣기 거북한 단어를 써야 한다.


이 영화의 장르는 '강간 복수극'이다. 비아냥대는 말이 아니라, 그 장구한 계보를 따져볼 수 있는 엄연한 하나의 장르다. 가까이로는 '리벤지', 영화사에 기록된 선배 영화로는 '복수의 립스틱'이 그 대표격일 것이다.

 

장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가 어떤 것인지 굳이 찾아볼 필요 없이, 저 단어로 인해 그려지는 플롯과 기대되는 바는 명확하다. 처음, 중간, 끝이 모두 그려진다. 그럼 그렇다고 이 영화가 뻔하다는 소리를 하려는 거냐고? 아니. 오히려, 모든 좋은 장르 영화는, 보기 전에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와 무엇이 충족될 것인지가 명확하다. 그것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으면 더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애초의 기대를 충분히 충족시켜주기만 해도 좋은 장르영화라는 평가를 받는다.


어떤 특징이 예상된다는 것은, 장르를 평가하는데 마이너스가 아니라 플러스다. 달리 말해, 뻔한 장르는 없다. 뻔한 영화가 있을 뿐이다. 영화가 뻔해지는 것은 장르의 클리셰와 심플한 플롯이 아니라, 클리셰를 지키면서 심플하고도 강렬한 서사와 매력적인 캐릭터를 구축하지 못한 시나리오와 연출력의 문제다.


그러니 장르영화를, 만들기 어렵지 않은 뻔한 영화라고 생각하고 자기도 한 번 만들어보겠다고 덤볐다간 큰 코 다치기 십상이다. 그래서, 나름 뭔가 뻔하지 않은 지점을 어떻게든 만들어보려고, 다 보고 나면 사실상 없는 것이 훨씬 좋았을 법한 뜨악한 설정과 디테일을 잔뜩 집어넣거나, 그래서 영화 절반이 내내 고구마였다가 클라이막스 직전에 설명을 맡은 인물 하나가 관객을 향한 프리젠테이션을 시전하고 갑자기 반전의 사이다를 들이붓는다거나, 실컷 카메라를 휘두르며 냅다 달리던 이야기의 피날레에 갑분신파로 쳐바르는 영화가 부지기수다.  ('마녀','악녀')


다시 이 영화의 장르로 돌아오면, 우리 앞에 놓인 것은 명확하다. 우선 그 일이 일어나야 한다. 그 일을 목격한 우리는, 주인공이 그들을 응징하길 바란다. 그 참혹한 사건을 단지 관객의 감정을 움직이기 위한 도구로 쓴다는 혐의를 벗을 수는 없겠지만, 대신 그 때문에 복수에 성공하게 되는 것을 보게 해준다면 그 고통은 충분히 상쇄되고, 우리는 보상받을 것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그 일이 고통스럽고 충격적으로 묘사될수록, 우리의 바램은 커지고, 그럴수록 복수를 실행하는 주인공은 가해자보다 더 잔혹해져야 하고, 그의 잔혹함은 정당화된다. 그렇게 되어야 복수의 순간에 우리가 느낄 카타르시스는 더 커진다.


여기서 줄타기가 필요하다. 복수극을 봄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적당한 고통과 적당한 카타르시스를 원하는 이들에게, 너무 고통스러운 사건은 거부감을 준다. 어쩌면 준비 없이 맞닥뜨린 영화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끄집어내는 트리거가 될 위험도 있다. 반대로, 어떤 고통스러운 장면이라 할지라도 감내할테니, 더 화끈하고 속 시원한, 현실 세계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복수의 완성을 보여달라고 요구하는 관객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단지 '장르'라는 틀 안에서만 판단해보자면, 무엇이 맞고 틀리다고 말하기 어렵다. 어딘가에 갇혀서 억지로 끝까지 보아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서 이 영화들을 보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호러 영화인데 아무도 죽지 않아요.' 라고 하면 애초에 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반대로, 액션 영화지만 아무도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지 않고 피가 너무 많이 나오지 않고 다친 사람의 상처를 잘 보여주지 않는 영화(대부분의 성룡 영화)를 애타게 찾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 이건 그러니까 취향의 문제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취향을 말해보자면, 존경해 마지 않는 감독의, 훌륭한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아직도 떠올리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딱 하나의 컷이 떠오른다. 최민식이 분한 살인범이, 자신이 유괴한 아이들의 부모에게 협박용으로 보낸 VCR을 부모들이 보는 장면이다. 그 장면 자체는 반드시 필요한 장면이다. 내가 아직도 납득할 수 없는 것은 그 장면 중의 아주 짧은 찰나다. 지금도 그 찰나가 기억에 생생하여 분개하게 되니 어쩌면 이 영화에서 그 순간은 의도된 제 몫을 다 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겐 그 찰나를 보고 나서 겪은 분노가 필요치 않았다. 나머지 모든 장면들로도 충분했다.


문제의 그 순간은 이렇다. 책상 위에서 줄에 묶인 아이가 울면서 자기 부모들을 애타게 부르는데, 최민식이 화면을 바라보며 아이에게 어서 빨리 너희 부모님들에게 돈을 보내고 널 구해달라고 말하라고 시킨다. 아이는 시킨 말을 울먹이면서도 끝까지 한다. 그리고, 그 때 최민식이 '어이쿠' 하는 장난스런 말을 하며 줄을 당긴다. 우당탕 소리가 난다. 불행 중 다행으로 (감독의 디테일한 연출 의도 그대로), 우리는 그 순간을 직접 보진 못한다. 바로 그 순간 그 VCR을 보고 있는 부모들이 눈을 질끈 감는 컷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린 이 감독이 이 영화 직전에 만든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달수가 말한 대사를 기억한다. "인간은 상상력이 있어서 비겁해지는 거래. 그러니까 상상을 하지 말아봐, ㅈㄴ 용감해질 수 있어." 우린 상상하고 또 상상하게 된다. 감독은 상상을 하지 않고서 그 컷을 연출해서 그렇게 용감했던 걸까. 아니면, 그 컷을 집어넣고 우리에게 자신이 의도한 그 고통을 정확하게 느끼게 한 것이니 용감한 걸까. 아님, 그건 사실은 비겁한 걸까.


감당할 수 있을만한 고통과 그에 따른 복수만큼 강렬한 서사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복수극은 애초에 별로 내 취향이 아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만큼만 고통스러운 일을 겪은 이가, 내가 다소 죄책감을 느끼지만 잔혹해진 주인공을 그럭저럭 응원할 수 있을만큼 잘 정제된 복수극이라 할지라도, 끝끝내 복수에 성공한 이야기를 되돌아보면, 더 강렬하지 않고선 뭔가 밍숭맹숭한 기분이 들 수 밖에 없음을 씁쓸해하는 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건 그냥 오락이야.'라는 자세로 일관하는, '킬빌'이나 '존윅' 같은  액션영화는 제외하고.)

 

하지만, 이 글은 '난 복수극 시러~ 그래서 이거 별로야~' 이딴 소릴 하려 쓴 것이 아니다. 다시 한 번, 신성한 '장르'의 룰에 입각한 링에 올려놓고 보아도, 이 영화 '나이팅게일'은 역대급으로 어마어마한 영화인데, (이번엔 비아냥이다.) 아까 내가 묘사한 '금자씨 최악의 순간'은, 결정적인 순간에 카메라가 화면을 돌렸지만, 이 영화는 그 순간을 내내 똑바로 직시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자신이 그 순간을 직시를 하고 있다기 보단, 우리한테 직시를 시키는 거겠지.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좀 있다 설명하겠다.)  


이 단락부터 영화의 도입부에 대한 스포주의 혹은 내용상의 충격주의 .(이렇게 까고 있는데 누가 보겠냐만.)

그러니까, '나이팅게일'이라 불리는 주인공 클레어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죄수 출신의 아일랜드 사람으로, 같은 아일랜드 출신의 남편과 결혼하여 갓난아이도 있는데, 그 곳에 주둔해 있는 부대의 부대장인 호킨스 중위에게 지속적으로 위계에 의한 성추행과 희롱과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걸로 보이는데, 영화가 시작하자 마자 여러 차례 (한 번이 아니다.) 강간을 당한다. 호킨스 중위는 또 다른 지역으로 발령받았기에, 떠나기 전 실컷 클레어를 범한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클레어는 이미 형기를 마쳤는데도, 호킨스는 클레어를 자기 곁에 노리개로 두려고 클레어를 자신의 부임지로 끌고 가려 한다. 그걸 항의하러 온 클레어의 남편은 호킨스의 심기를 거스르게 되고, 호킨스는 당연히 그에게 앙심을 품고, 부임지로 떠나기 전날 밤에 자신들의 부하를 이끌고 클레어의 집에 들이닥친다.


호킨스는 남편이 보는 앞에서 부하들과 함께 클레어를 윤간하고, 그 동안 반항하던 클레어의 눈 앞에서 남편은 죽임을 당하고, 갓난 아이도 그걸 다 보고 있는데, 그러는 동안 애가 시끄럽게 울기 시작하자, 부대원 하나가 아이도 벽에 던져서 죽인다. 아이가 죽고 이 상황이 끝이 나냐면, 그게 아니라 부대원들과 호킨스 중위는 하던 일을 끝끝내 마저 계속 하는데, 그러고 나서는 남자와 아이의 시체가 널부러진 집 탁자에 시체처럼 누워있는 클레어를 내려다보다가, 클레어마저 죽이고 집을 불태우고 부임지를 향해 떠난다. 그런데, 그렇게 죽은 줄 알았던 클레어가 집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동안 기적적으로 깨어난 것이다.


사건의 전말을 유추하면서 내용을 따라가게 되는 영화가 있고, 체험하듯 끌려가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후자다. 그러니까, 카메라가 화면을 돌리거나 씬이 점프하여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고 하나하나 차근차근 과정을 좇는다는 소리다. 내 취향 이야기를 다시 하지는 않겠다. 최대한 건조하게 말해보자면, 이 영화의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강간 복수극 장르의 도입부로써는 관객의 기대치를 거의 역대 최고로 올려두었다고 정리하자.


2. 뭣이 중헌디


클레어가 제 정신일 수 있을까, 보고 있는 우리도 정신이 나갈 지경인데. 클레어는 정신줄을 놓지 않는다. 정신을 차린다. 최소한 어떻게든 제 정신을 유지하려는 듯 보인다. 호킨스 중위가 클레어의 가족을 얼마나 괴롭혀 왔는지 알지만 나서서 그 무엇도 해줄 수 없었던 마을 사람들이, 넋이 나간 듯, 피를 흘리며 마을로 돌아온 클레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고 묻는다. 클레어는 말 없이 총을 챙겨 말에 올라탄다. 사람들은 호킨스가 어느 방향으로 언제 떠났냐고 묻는 클레어에게 방향을 알려준다. 하지만, 그들이 떠난 방향은 황무지를 통과하는 길이고, 그곳은 무장한 부대들도 횡단을 꺼리는 험지다. 클레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두들 알아채지만, 클레어를 따라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클레어가 절망감과 비탄에 빠져 울지 않고 결기에 찬 눈으로 금새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다소 안도하게 된다. 그 이후로는 기대감이 더 커진다. 그래, 지나온 것들은 지나간 것들이고, 이제 남은 건 그런 게 아니니까. 그리고, 그 험한 여정 속에서 클레어를 도울 원주민, 든든한 길잡이 '빌리'도 합류한다. 오스트레일리아 태즈메이니아 지역 원주민인 '빌리'는 아일랜드 출신 죄수인 클레어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존재이지만, 그에게 이 땅은 그들 조상들의 터전이었고, 그가 이 땅에서 야영을 하고 길을 찾는 능력은 그 어떤 문명인의 능력보다 출중하다. 다행이기도 하고, 포스터 문구에 적힌 그대로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몰아치는 강렬함'을 이제 보여줘.


클레어는 빌리의 도움으로 추격에 박차를 가한다. 마침내, 문제의 그 날에 클레어와 클레어의 남편에게 부대원들이 한 짓에 유일하게 반대했던, 소심하고 유약한 병사 하나가 부대원들의 행군에서 낙오한다.


클레어가 그를 따라잡는다. 우리는 클레어의 총에 다리를 맞아 기어가는 그를 본다. 두려움과 죄책감과 후회로 뒤섞인 그가 우는 것을 본다. 우리는 클레어가 그에게 무슨 짓을 하든 개의치 않기로 한다. 클레어가 그의 눈 앞에서 총구를 겨눈다. 총이 발사되지 않는다. 순간, 그가 달려든다. 우리는 곧바로 알아챈다, 그가 곱게 죽을 기회는 물 건너 갔다는 것을. 클레어는 그와 진흙바닥을 나뒹굴며 사투를 벌이다, 그의 단도를 뺏는다. 단도로 찌르지만 서투른 클레어의 손도 상처를 입고 피로 물든다. 둘 중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끔찍하고 처절한 싸움이 계속되다가, 드디어 클레어가 그의 가슴팍을 수십 차례 찔러 죽인다.  


아, 얼마나 기다려왔던 순간인가. 그런데, 어쩌면 앞으로 죽는 악당들 중 가장 쉽게 죽는 인간이어야 할 인물이 이렇게 잔인하게 죽는 것을 지켜보게 만들었다면, 이 모든 것의 원흉인 호킨스의 최후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 걸까. 뭘 그런 걸 생각해, 계속 따라가기나 해. 전투로 상처 입은 클레어가 얼른 회복하길 바라기나 하라고. 이런 마음이 오가는 동안, 영화는 계속 나아간다.


아래부터 또 다시 스포주의.(이지만 이 글의 맥락을 따라가려면 엔딩을 알아야 하는데, 에라이, 몰라.)


마침내 온갖 고난을 이겨 낸 클레어는 호킨스를 마주한다. 호킨스가 새로 부임한 마을의 군인회관에는, 호킨스가 잘 보여야 하는, 절대적인 권력을 쥔 주둔군의 고위 장교들이 한 가득 모여있다. 클레어는 그 곳으로 향한다.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 그 곳에서,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마침내 호킨스의 바로 앞에 선 클레어. 클레어를 본 호킨스는 놀란다. 그 지옥 같은 땅을 통과하고, 자기 부하들과 사투를 벌이고, 끝끝내 여기까지 온 거냐며, 무엇을 위해서냐며, 지금 여기서 복수라도 할 생각이냐며 황당한 듯 묻는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수많은 장교들이 이 둘을 흥미롭게 바라본다. 호킨스는 야만적인 이전 주둔지의 먼지를 모두 털어내고 근사한 문명의 세계에 막 자리잡으려는 참인데, 그 곳에서부터 딸려 온 징글징글한 아일랜드 여자 하나가 자신의 체면을 모조리 깎아내리고 있다. 그 화룡정점은, 호킨스에게서 '나이팅게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이유였던, 클레어의 청아한 목소리로 부르는 아일랜드 전통 노래다. 클레어는, 호킨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 노래를 부른다. 호킨스는 당황한다. 호킨스를 보는 다른 모든 장교들이, 짐짓 호킨스가 어떤 놈인지 알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클레어는 당당하게 그 곳에서 걸어 나온다.


뭐? 군인회관에 찾아가서, 자신이 끝까지 쫓아왔다는 걸 알려주고, 그 자리에서 노래를 불러서 모멸감을 줬다고? 뭐하자는 거지?


다행스럽게도, 여러분의 우려와 달리, 호킨스는 죽는다. 얼마나 잔인하게 죽을까? 김 빠지는 말이지만, 자길 죽이러 온 이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매춘부와 꿀잠을 자다가, 문이 벌컥 열리고 창이 날아들어 몸이 꿰뚫려 순식간에 죽는다. 이런 말 하기 싫지만 진짜 너무 편하게 죽은 거 아니야?


어쨌든 클레어가 심기일전하여 창을 들고 난입하여, 드디어 복수가 완성된 것 아니냐고? 복수는 완성되었다. 다만, 빌리의 복수가. 유럽의 백인들에 의해 몰살당하고, 결국 테즈메이니아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 자신의 민족을 위해, 원주민 빌리가 주둔군 호킨스를 죽인다. 클레어가 완력이 강한 빌리에게 그것을 종용한 건 아니냐고? 아니. 클레어는 나이팅게일 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 뒤 군인회관을 빠져나와 멜랑꼴리하게 해변에 앉아 잠 못들고 있었는데, 빌리가 담요를 덮어주어 그런 클레어를 잘 재운 뒤에, 원주민의 전통적인 페이스페인팅을 하고 단도로 나무를 깎아 날카로운 창을 만들더니, 호킨스가 묵고 있는 여관으로 가서 아직 살아있던 호킨스의 남은 부하 병사와 호킨스를 죽이는데, 그리고 자기도 총상을 입고 다시 바닷가로 돌아온다.


빌리가 호킨스를 죽이고 돌아온 것을 알게 된 클레어와, 총상을 입었지만 민족의 복수를 완수한 빌리는 뜨는 해를 바라보고, 빌리는 원주민의 노래를 부르다 천천히 쓰러져 세상을 떠난다.


3. 아노미 상태를 각성이라 착각하고, 전진한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내가 앞서, 이 영화는 이 모든 것을 직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것을 직시하라고 시키는 것이라 말했었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것을 깨닫게 된다.


이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감히 다른 곳으로 눈알도 굴리지 못하도록 몰아붙이면서, 자신은 멀찍이 떨어져 이 모든 것을 통해 우리의 감정을 해소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을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었음을 마지막에서야 드러낸다. 이걸 알고 나면 이제 이 영화의 이상하게 깨진 균형을 이해하게 된다.


앞서, 클레어가 가장 처음 마주친 병사와 처절하게 싸우다 참혹하게 살해하는 장면을 말했었다. 산통 깨는 이야길 해보자면, 클레어가 벌이는 그와 비슷한 강도의 액션은 더 이상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또 다른 약자, 그러니까 이제 그들이 왜 자꾸 나오는지 알게 된 그 '원주민'들이 괴롭힘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시체가 널부러져 있는 모습은 줄기차게 등장한다.


나는 간혹, 조금은 생소한 결단과 무례함과 그 모두를 감싸고 있는 어색함을 겉으로 드러내는 사람을 볼 때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어떤 성향의 사람이 그렇다라기 보다는, 아마 내가 적극적으로 예민하게 느끼려고 하면서 내 안에서 그런 사례의 패턴을 분석해보게 된 결과로 알게 된 것 같다.


그게 뭐냐면, 간혹, 약자의 입장에 있던 자가 어떤 고통스러운 일을 겪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각성을 이루려 할 때, 그래서 지금과는 달리 행동하려 첫 발을 내딛을 때, 주변의 조력자, 혹은 눈 앞에 맞닥뜨린 상대적 약자에게 무섭도록 냉정해지거나 과하게 공격적인 긴장상태를 표출하는 경우다.


말로 설명하려니 장황하긴 한데, 그걸 볼 때 드는 생각은 이렇다. 고난을 이겨낸 후, 이제 달라져야겠다고 의지를 굳힌 상태에서, 마치 자신의 본 모습이 언제나 피해자나 약자의 입장에 있어왔기에 감지할 수 없던 촉이 새로 생겨나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것처럼 행동하게 되는 거랄까.


상대적 약자나 혹은 자기에게 우월감을 조금이라도 보이려고 하는 위협적이지 않은 주변인에게, 자신이 여태 이렇게 해보지 못했고, 여전히 지금처럼 이렇게 할 수 있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바로 이 기회를 놓쳐서는 절대 안된다는 본능적 자각에 의해,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당해왔던 뻔한 방식대로 과하게 갑질을 하게 되는 사례.'


비약해보자면, 이 영화에서 복수가 시작된 시점부터 클레어의 첫 살인이 일어나기까지의 양상이 이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클레어는 즉각 복수의 길에 나섰다. 무장한 군인조차 횡단하기 힘든 불모의 땅을 질주하여, 부대원과 부대장을 몰살시키겠다고 마음 먹었다. 하지만,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력자의 도움이 필요했다. 조력자와 함께 한다해도 성공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아주 운 좋게도, 제일 만만한, 다친 병사를 만났다.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 정도의 양심이 있는 터라, 그 병사는 클레어를 보자 금새 무너졌다. 그리고 클레어는 정작 자신을 강간하지도 않았고 다른 부대원들과 부대장을 만류했던 그를, 이 영화 속에서 가장 잔인하게 죽였다.


복수극 장르의 전형대로라면, 이러한 전개는 영화의 균형을 완전히 망가뜨린다. (얘를 이렇게 죽였으면 이제 점점 더 심해져야지. 그게 아니면 말 그대로 '방황하는 칼날'이 헛심 쓰다 정작 필요할 때 날이 이가 나간 걸 보게 되는 거라고.) 하지만, 이 영화를 다 보고 났더니 이해된다. 이 영화는 클레어의 복수를 향해 달리는 영화가 아니었으니까.


이 영화를 만든 이는 클레어를 각성시킨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나약하고 유약한 클레어를 지속적으로 비춘다.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고 오히려 빨리 결단하고 맹공을 퍼부으며 시작된 복수의 여정이, 끝에 가서 그리 보이는 것이 놀랍기까지 하다. 마치, 마지막까지 와서 자기가 무슨 이야길 전하려 했던 건지 헷갈리는 마냥, 클레어가 호킨스 앞에서 망설이고 두려워 할 수도 있지 않냐고, 짐짓 약자에 대한 세심한 시선을 유지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사실 그 반대다.


영화는 자기가 무슨 이야기를 해야되는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그래서 클레어에게 자신도 모르게 무례한 시선을 유지한다. 클레어는 각성하지 못한다. 아노미 상태에서, 눈 앞의 가장 만만한 이에게 과도한 적개심을 내비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각성이라 착각하게 만든다. 클레어를 강약약강의 무뢰배로 만들었다. 치밀하고 집요한 복수자가 아니라 생각없이 달리다 순간 멈춰서서 두리번거리는 이로 만들었다.


전진은 새로움으로의 변신이 목적이 아니다. 전진은 한 차례의 비가역적인 각성이 아니다. 전진은 부단함이다. 전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전진은 지금은 불가능한 나를 바꿔 가능한 결과를 내기 위해 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전진은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나를 통합해서, 미래의 나를 이루는 것이다.


하물며, 자신의 목숨을 걸고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복수에 나선 이가, 끝내 마주해야 할 최후의 적에게 쏟을 힘을 계산하지도, 그 앞에 선 자신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도 없는 것처럼, 그가 자신에게 치욕적으로 선사한 '나이팅게일'이라는 별명처럼, 노래를 부르는 것에서 멈추게 만들다니.


어떻게 이 모든 것이 이 지경이 되었냐면, 답은 너무나 확실해서 영화조차 이 목적을 숨기지 않고 피날레를 그것으로 장식하고 말았으니, 호주를 침략한 유럽의 백인들과의 전쟁 후 끝끝내 살아남았던 300명 남짓의 테즈메이니아의 원주민들이 결국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결국 몰살당했던 호주의 아픈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는 게 그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 때의 호주를 이야기하려면 반드시 그들의 원혼을 달래주어야 한다는 거겠지. 그런 마음으로 영화의 마지막에 그렇게 목 놓아 부르는 원주민의 노래를 듣고 있자니, 불에 탄 오두막에 누워있다 재가 되었을 단 두 구의 시체의 무게는 잊어도 좋다는 소린가 싶다. 그럼 그들이 죽기까지 겪은 그 지옥도를 직시한 것은 우리인데, 그 지옥도를 만들어 낸 영화는 대체 어떤 마음으로 그 집의 생존자와 함께 호기롭게 길을 나섰던 건가.



그러니, 역사적 비극을 말할 때


1. 장르영화의 소재가 될 수 없는?


장르영화가 감히 다룰 수 없는 소재라는 것이 있을까? 아마, 발생한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그런 논의가 필요할지 모른다. 9.11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고 한다면, 그 이야기를 액션 활극으로 다룰 수는 없을 것이고, 총기 난사 사건 또한 그럴 것이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산업혁명 이전의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수도 없이 많다. 중국의 전쟁사나 고대 유럽의 전쟁사를 살펴 보면,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수의 사람들이 산 채로 파묻혀 죽거나 몇 안되는 용감한 병사들이 국가의 사활을 걸고 싸우다 끔찍하게 몰살당하고 나라가 멸망한 순간을 수도 없이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이 종종 탁월한 오락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또한, 홀로코스트나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여러 편의 영화가 있다.


그러니, 재미를 추구하는 장르영화라는 이유로 영원히 다룰 수 없는 소재라는 건 없을 것이다. 언젠가는 만들어질 것이고, 그 영화에서 재미를 느끼는 것이 우리의 죄책감을 동반하지 않을 수 있는 영화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그만큼 확고하고 탁월한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타란티노의 '바스타즈'가 왜 굳이, 우리 모두 사실이 아닌 것을 잘 아는, 히틀러가 기관총에 맞아 즉사하는 장면을 넣었겠는가. 말하자면, '이건 다 뻥이야.'를 위한 쿠션이 아니었겠는가.


같은 배경을 다루지만 좀 더 진지하고 슬픈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주인공이 아들에게 '이건 다 게임' 이라고 말하고, 마지막 순간에 나치 병사에게 잡혀가며 병정인형처럼 걸어가서, 숨어서 그걸 지켜보는 아들에게 웃음을 주는 장면은, 이 영화가 대중적인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홀로코스트를 이야기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태도라 할만할 것이다.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는 핵탄두를 실은 폭격기가 출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일촉즉발의 핵전쟁 위기 앞에, 전쟁의 향방을 결정할 주요인사들이 모두 모인 회의장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이 영화의 장르는 블랙코미디다. 핵의 위험성에 대해 다룬 영화로, 핵폭발 이후의 시민들의 삶을 다룬 진지한 드라마 '그 날 이후' 도 있지만, 사람들은 큐브릭 영화의 탁월함과 재미에 손을 들어준다.


그러니, 다시 한 번, 장르는 뻔하지 않다. 그리고 쉽지도 않다.


2. 재현의 문제

 

역사적 비극을 다룬다고 해서, 당연히 모든 영화가 그 끔찍한 역사를 단지 장르적 재미를 위한 도구로만 쓰는 것도 아니고,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장르의 틀 안에서 더 빛을 발하게 된 영화들도 많다.


그와 반대로, 어쩔 수 없이 소환되는 비극적인 순간들과 슬픈 감정들, 인간성에 대한 회의감과 절망감, 그리고 그럼에도 지켜내야 할 가치들에 대해서, 어느 한 장르에 기대지 않고 이야기하는 영화들이 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러한 태도로 만들어진 소위 진지한 예술영화들은 그 말하는 메세지의 올바름으로 인해 모든 것이 허락되는 것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그 끔찍한 역사를, 재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지하게 조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들 속에서조차 재현의 문제에 관한 논란은 자주 일어난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들 중 관객에게 가장 체험적인 느낌을 선사하는 영화로 '사울의 아들'이 있다. 우리는 마치 1인칭으로 주인공이 된 듯, 그 끔찍한 수용소 구석구석을 헤맨다. 혹자들은 이러한 방식이 윤리적인지에 대해 물었다. 또 혹자들은 좌우가 잘려나간 4:3 비율의 화면으로 주인공의 등 뒤를 바짝 좇을 수 밖에 없게 촬영된 바로 그 방식 때문에, 실제로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참상이 극히 드물다는 것이 이 영화의 훌륭한 설계라고 찬사를 보낸다.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을 정면으로 다루는,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 또한 언급해봄 직 하다. 이 영화는 범인들의 동기를 설명하지 않는다. 플래시백도, 교차편집도, 리듬감있게 잘 쌓여가는 컷도 없다.


단지, 이 영화는 여러 명의 학생들을 따라간다. 한 명의 인물에 한 컷 씩, 스테디캠으로 끈질기게, 실시간으로 이들의 뒤를 좇는 이 영화는, 좀 전에는 화면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 다른 인물을 따라가는 이야기에선 주변인이 되고, 하나의 순간이 여러 시점으로 반복된다.


범인들이 범행을 벌이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 한 명의 인물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인해, 그 비극이 일어나기 전 그 학교의 구석구석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 시간을 보내던 아이들의 아직 살아있던 그 순간을 반복해서 되살린다. 아이들은, 계속 살아있고 서로 지나쳐가고 이야기하고 걸어가고 있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은 그 충격적인 사건에 대한 전말을, 메세지를, 입장을, 판단을, 분석을 위해 이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다. 그는 그 소재를 빌어, 거기 있던 아이들을 거기 '있게' 만들어서, 아이들을, 그 시간을, 살려낸다.


category mistake


그러니, '나이팅게일'은, 장르영화인 줄 알고 쉽게 봤는데 알고보니 역사적 비극에 바치는 살풀이라는 면에서 '영혼까지 파고드는 영화'인가?  장르의 기대를 배신하고 충격적인 묘사로 관객을 얼어붙게 만든다는 면에서, '숨이 멎도록 놀라운 영화'인가? '이 영화는 너희가 기대하던 말초적인 자극보다 더 큰 이야길 하고 있는 거야.'라고 주장한다는 면에서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영화'인가?


글쎄, 아니올시다. 이 영화 속 끔찍한 사건을 만들어낸 것도, 그걸 굳이 집요하게 묘사하여 보는 이가 그 피해자에게 이입하고 가해자를 그토록 증오하게 한 것도, 그 가해자 앞에 선 피해자가 끝내 복수를 하지 못하게 한 것도, 사실 그 사건보다 우리가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되는 건 다른 더 큰 역사적 비극이라며 대단한 걸 가르치듯 보는 이의 모든 기대를 져버리는 것도,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인데, 그의 이 모든 의도 어디에 이 영화의 관객을 위한 일말의 소통 의지가 있나.


그래, 백번 양보해서, 이 영화를 본 결과로,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에게 일어난 비극에 대해 내가 알게 되었다고 치자. (영화에서 충분히 설명해주는 것도 아니다. 영화를 보고 자료를 찾아보니 이 얘기가 그 얘기란 걸 알겠더라.) 또한, 그 진중한 메세지와는 완전히 별개로(영화가 그렇게 자르듯 생뚱맞게 방향을 급변하여 눈에 띄게 구분해놓았으니) 강간당한 여주인공이 남자들 잡아죽이려 쫓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일들을 보며 스릴과 조마조마함과 쾌감을 느꼈다고 치자.


어떤 정보를 전달했다거나, 어떤 감정을 이끌어냈다고 해서 그것이 소통에 성공한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건 그냥 길거리에서 막무가내로 크게 외쳐 길을 걷는 아무나의 귀에 때려박아넣는 소음으로도 가능하다. 소리치는 목청 크기에 비례해서 듣는 사람이 화들짝 놀랐으니 그가 그 말에 귀 기울인거라 말할 수 있나? 반복해서 고함치는 문구가 저절로 외워진다고 해서 그 내용에 동의한 것이라 말할 수 있나? 진지한 자세로 어렵고도 pc한 내용을 다룬 고성방가이므로 함부로 평가할 수 없다고 할텐가.


이 영화는 가장 소란스럽고 무례하고 거만한 방법으로 자신의 일방적인 새롭지도 않은 시각을 배설하듯 쏟아냈다. 소위 '다시 생각해볼만한 것이 있어. 중요한  이거야.' 말하기 위해, '너희가 이런 것에 관심이 없을테니 어쩔  없이 어그로를 끌었는데, 아무튼 그래서 니들이  아님 몰랐을 중요한 것을 이제라도 알게 되었으니 이건 불가피했던 관종짓이었을   원래 진지한 사람' 실행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기본적인 장르의 문법이나, 역사적 비극을 다루는 재현의 문제 중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해내지 못한 이 영화를, 유수의 영화제나 비평계는 바로 그 믿을 수 없는 작태를 이유로 '새롭고 강렬하고 지적인 충격을 주는 용감한 도전' 따위로 취급해줘버린 것이다.


내 생각엔, 이 영화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해낸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면 안되는 것을 그냥 해버렸다는 면에서 일종의 '범주 오류'를 범한 영화 같다.  


아님 그냥 용감한 영화. '00하면 용감하다'더라는 말이 있다지.


덧1.

내가 편애하는 영화,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 중에서도 내가 특히 편애하는 순간 하나가 있다. '금자씨'의 그 최악의 순간과 정반대로, 나는 '엘리펀트'의 이 한 순간 때문에 나머지는 기억조차 못한다해도 이 영화를 계속 사랑할 것이다.


사진부에 속한 짧은 금발의 남학생은 쉬는 시간에 짬을 내서 암실에서 필름을 직접 현상하기도 하고, 학교 복도와 까페테리아와 교실을 오가며 필름 사진을 찍는다. 흔쾌히 포즈를 취해주는 친구들도 있고, 못 본 척 지나치는 아이들도 있다.


이 영화의 구조 상, 같은 장면이 각기 다른 시점에서 여러 번 보여지는데, 이 남학생이 쉬는 시간에 어떤 복도를 지나는 장면도 마찬가지로 두 세 번 보여진다. 그리고 이 남학생이 복도를 걸어가고 있는 그 평범한 순간에, 남학생은 아주 잠깐 옆을 흘깃 보는데, 사실 아무 것도 아닌 그 장면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여러 번에 걸쳐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지나가는 그 여러 번 반복되는 평범한 장면은, 한 번은 그 학생의 옆모습을 카메라가 따라가는 식으로 촬영될 때가 있는데, 그 때 그 남학생이 힐끗 본 그 옆 공간을 우리는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 순간, 그 남학생의 옆으로 한 여학생이 걸어간다.


앞서 가던 여학생과 그보다 뒤에서 걷던 남학생이, 걸음걸이가 빠른 남학생의 속도 때문에 아주 잠깐  동안 속도를 맞춰 나란히 걷게 되는데, 아무런 효과도 후반에서 덧입히지 않은 그 평범한 컷에서, 각기 다른 속도로 한 방향으로 복도를 걷던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의 몇 걸음이 나란히 맞춰진 그 짧은 우연의 순간에, 나는 마치 세상이 천천히 흐르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 남학생은 힐끗 여학생을 보는 게 전부이고, 그 순간은 몇 초 뒤 끝이 난다. 그 여학생은, 영화를 통 틀어 그곳에서 밖에 볼 수 없다. 아마 그냥 지나가는 엑스트라였으리라.


나는, 구스 반 산트가 바로 그 찰나의 순간을 만들어서 봉인하려고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내 멋대로 생각한다.


덧2.

얼핏 '나이팅게일'의 주인공과 닮았다고 생각되는 지인이 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주인공이 겪는 일에 좀 더 몰입이 된 걸까? 글쎄, 그렇지는 않다. 영화를 보고 이 글을 쓰려다보니 비슷하게 생겼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서, 이 영화의 내용을 다시 돌아보고는, 그 지인이 가능하면 아프지 말고 오래도록 잘 살면 좋겠단 정도의 생각을 했다.


그런데 만약, 그가 고통스럽고 불행한 일을 겪는다면, 그래서 자신의 손으로 그걸 되갚아주겠다고 결심한다면, 나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너의 결심이 성공하기를, 그 성공의 순간은 네 자신의 손으로 일궈 낸 것이기를, 가장 최후에 가장 최악의 상대를 마침내 맞닥뜨리길, 그 상대 앞에서 주눅들지 않기를, 거기까지 도달해놓고 다른 우아한 길을 모색하며 피하지 않기를, 그 순간에 너보다 더 큰 고통을 겪은 이들을 돌아보고 공감하며 그들을 위로하는 자의 역할에 있지 않기를, 그리하여 너의 그 여정을 가장 극적으로 네 두 손으로 마무리하기를, 그리고 나서, 자신을 구한 그 힘을 깨달아 스스로 더 강해지고 그제야 비로소 남에게도 그 힘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이건 마음으로 바라게 되는 것이라서, '지금 우리 한 번, 이런 상황에 놓여 있다할지라도 우리에게 실제론 뭐가 진짜로 더 중한지 다시 생각해보아.' 따위의 뻘짓을 할 필요가 있는 사안이 아니다.


그러니까... 감독님, 이게 어렵나요? 도대체 클레어한테 왜 그랬어요?


쉬워 보이는 감정이 아니라 깊어 보이는 생각이 더 중요한가요? 그건 이상한 거 같아요.


아무리 그럴싸하게 갖다붙여도, 영화는 사람을 향해야 되는 거 같아요, 머릿속 생각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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