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년 생일을 새로운 곳에서
학창 시절, 나에게 생일은 '아침에 미역국 먹는 날'이었다.
나도 남들처럼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플레이 그라운드'에서 친구들과 디스코 팡팡을 타며, 치킨을 먹고, 하루 종일 놀던 시절이 있었긴 했었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친구들은 모두 PC방으로, 학원으로 발자취를 돌리게 되었고, 나 역시 친구들이 없는 생일 파티는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나 역시 생일에도 그들과 함께 학원으로 발을 돌렸다. 우리 가족은 행사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촐하게 케이크와 미역국을 먹고 학원으로 향하는 것이 내 학창 시절 기억 속 생일의 전부라 할 수 있다.
고등학교 시절 대학 진학의 막막함과 불안함을 덜기 위해 버킷리스트를 작성했다. '1류의 삶과 2류의 삶의 차이는 내 삶에 대한 의문이다'라는 문구를 붙인 이 공책에는 대학에 가면, 해보고 싶은 것들에 대해 담겨있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대학에 가면 해보고 싶은 것 다 해' , '지금 참고, 대학에 가서 해', '6년만 참아 아니 5년만 참아'라는 말을 들으며 자란 나로서 당장 도전해보고 싶은 것, 당장 읽어보고 싶은 책들은 언제나 대학 진학 후로 미뤄놓았었다. 대신 내가 해보고 싶은 것들을 까먹고 20대에 하지 못할까 봐 공부를 하는 중간중간 떠올랐던 버킷리스트를 기록해두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부모님의 말씀,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가끔 해보고 싶은 것들을 했어도 좋았을 텐데, 미성년자인 나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기도 하고, 혼나는 게 두렵기도 했었다.
3년간의 고등학교 시절 동안 나는 185개의 버킷리스트를 작성했다. 그리고, 그중 이 글을 쓰게 된 계기인 65번 버킷리스트, '매 년 생일을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보내기'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처음 만난 2016, 2017년 생일은 끔찍했다. 대학에 아직 합격하지 못한 나는 집 골방에 갇혀 숨만 죽이고 있었다. 집에서 눈칫밥만 먹으면서 휴대폰만 만지작 거렸고, 심지어 2017년 겨울에는 가출까지 감행한 상태였다. 케이크는 먹지 못했지만, '미역국을 먹지 못하면 그 해 인복이 없다'는 개인적 신념으로 인해 편의점에서 미역국 라면을 사 먹었고, 혼자서 조촐한 생일을 보냈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나의 첫 생일은 고통스러웠다. 대학교 1학년도 잘 마무리했고, 친구들과 어느 정도 친해졌으니 맛있는 것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게 웬일, 부모님께서 사랑니 발치 예약을 내 생일날 잡아버리셨다. 발치 일주일 전에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부랴 부랴 생일파티를 다 취소해버렸고, 생일 당일 아픈 볼을 붙잡은 채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하필 그 날따라 사랑니 발치 이후 출혈이 심해서, 흰 마스크가 피로 물드는 진귀한 경험을 할 수 있었고, 이 날도 미역국은 커녕 공복으로 하루를 보냈다.
2019년 생일은 정말로 다르게 보내고 싶었다. 생일이 웬 대수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내 삶에 새로움을 얹어주고 싶었다. 남들처럼 똑같이 살지 않기 위해, 내 삶에 의문을 가지면서 더 잘 살자는 의미에서 쓴 버킷리스트 공책이 애물단지가 되는 것이 원치 않았고, 2018년 가을부터 만반의 계획을 세웠다.
어떻게 보내면 특별하고 기억에 남을까 고민을 하던 중, 학교에서 네팔로 1월 한 달간 '해외 봉사'를 보내준다는 공고를 보게 되었다. 봉사 기간이 생일과 겹쳤기 때문에 낯선 곳에서 맞이하는 생일을 보내자는 목표 하나만으로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봉사 단원으로 뽑히게 되었다. 생일이 중간에 끼여있었지만 팀원들에겐 말하지 않았었다. 굳이 알리고 싶지도 않았고, 그냥 생일날 지난 20년과는 다르게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내게는 의의가 있었다. 그래서 몰래 캐리어에 편의점 미역국 라면을 챙겨갔었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다르게 생일날 아침 팀원들 모두가 다 같이 깜짝 파티를 해주었다. 카트만두에서 보기 힘든 미역국부터, 몽쉘 생일 케이크까지 인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생일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새벽부터 다들 일어나서 미역국을 끓여주었고, 미리 쓴 감동의 손편지까지,, 그리고, 봉사를 하러 다녔던 학교에서도 전교생이 나를 위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고, 네팔 전통 음식도 대접해주었다.
나에게 달려와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식, 수첩들을 주고 편지를 건네주는 아이들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 그중 수산이라는 친구가 가장 기억에 남는데 나를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숙소에서 학교까지 거리가 꽤 먼데도 매 번 자전거를 타고 나를 배웅해주던 친구였다. 한국에 와서도 간간히 연락을 하긴 했지만, 지속적으로 연락하기에는 '시차'라는 문제도 있었고 카트만두의 '인터넷' 도 불안정했기 때문에 연락이 현재는 끊긴 상태다.
네팔에서 보낸 잊지 못한 생일과 관련된 추억 외에도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네팔 대학생 친구들도 만나고, 매일 6시간씩 페인트 칠도 해보고, 양갈래 머리를 한 채로 춤도 춰보는 등의 기억은 인생에서 새로운 터닝포인트가 되었고, 내 첫 버킷리스트를 지킬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2020년 생일에는 프라하에 있었다. 이번에도 예상치 못하게 해외 출국을 하게 된 상황이었다. 2019년 상반기 내내 대만, 네팔, 상해, 베이징에 있었고, 해외에 나갈 돈이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2020년도 생일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만 하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학교에서 1인당 300만 원이라는 큰 지원금과 함께 자신의 관심분야에 맞는 현장연구에 따라 해외 연구 프로그램을 보내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3달간 준비해서 지원한 결과, 생일 이틀 전인 1월 19일 유럽으로 출국을 하게 되었다.
현장 연구의 본 목적지는 암스테르담이었지만, 상대적으로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앞 뒤로 각자 여행 계획을 짰었고, 팀원 친구 중 한 명과 함께 프라하를 첫 시작으로 잡게 되었다. 사실 유럽으로 떠나기 직전 나는 심각한 공황장애, 과호흡, 정신적 스트레스로 병원에 다니고 있었고, 별 다른 나아짐 없이 혼자서 끙끙 앓고 있었다.
비행기 타는 것도 엄청 걱정했었지만, 막상 비행기에 탑승하고, 유럽 땅을 밟으며 걷다 보니 내가 고민하고 있었던 것, 힘들어했던 것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유럽을 방문한 나로서는, 거리의 보행자로서 프라하를 신나게 즐겼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매 번 유럽은 또 다른 재미와 시각을 가져다주었다. 오랜만에 자연이 가득한 풍경도 마주하기도 했고, 중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대화를 하며, 그 나라의 문화를 즐기기도 했고, Western Culture만의 독특함을 느끼면서 생일을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생일 당일에는 함께 여행을 간 친구와 함께 프라하 한인 마트에 들려서 소소하게 한식을 해 먹으면서 inner peace를 찾아갔다.
아직 2021년 내 생일 계획은 미정이다. 작년과 재작년의 기준으로 라면, 9월 중순쯤부터 계획을 잡고, 내년 생일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보내게 되겠지만, 국내외로 움직이기 힘든 코로나-19로 인해 사실 계획이 무계획으로 변할지 모르는 상황이라 아직은 미정이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 와도 근 2년간의 생일처럼 그 날 하루만은 재밌고, 즐겁게, 새로운 경험을,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