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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본 Oct 25. 2023

양심의 털

서른 살 가까이 살아오면서 세상을 잘 사는 법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는데 그 비법은 양심에 난 털을 잘 모른 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달 만에 가는 정신과에 들러 약을 타고, 한의원이라도 가볼까 하고 같은 건물 1층의 한의원을 갔다.

- 저 거북목인데 통증이 심해서요…

당장 통증이 있던 건 아니지만 조금 거짓말을 보탰다.

한의원 버프를 받아 좀 자고 싶었다. 왠지 모르게 한의원에서는 잠이 잘 오니까…


- 저희가 1시부터 점심시간이라서요…

- 아, 네.. 지금 몇 시인가요?

- 12시 57분이요…


다음에 방문하겠다는 말과 함께 발길을 돌려 자주 가던 카페에 가려고 택시를 잡았다. 왠지 불안한 마음에 휴무일을 확인해 보니 하필 오늘 쉬는 날이다. 택시기사님께 목적지를 바꾸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갑자기 나에게 전도를 하신다. 기사님, 저 모태신앙이에요, 하면 끝날 줄 알았는데 예수님을 영접한 순간에 대해 말해보라 하신다. 아아, 정말 싫어. 하지만 열심히 리액션해주는 내가 더 싫다. 내가 이야기를 멈추니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며 집으로 향하는 10분 만에 많은 이야기를 하셨다. 그 시작은… ‘내가 사람을 죽이고 교도소를 가서 주님을 만났어’. 와, 후킹 장난 아닌데? 나름 괜찮은 스토리텔러라고 생각했다. 나 그럼 살인자의 택시에 타버린 건가… 물론 기사님은 곧장 연속 추돌 사고의 피의자로 가벼운 형을 살다 나왔다고 사실을 밝히셨지만.


어젯밤, 밀크티를 많이 마신 탓인지 (꽤 맛있었으니까…)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커피는 잘 피하면서 밀크티의 달큰 쌉싸름한 맛을 떠올리면 커피를 능가하는 카페인이 있다는 사실을 자주 모른 척하고 주문하게 된다. 그러니까, 나는 어제 카페인 섭취를 멀리해야 하는 불면증 환자인 데다가, 당류를 조심해야 하는 당뇨인으로서 완벽하게 실패한 하루를 살았다는 죄책감에 잠시 또 기분이 울적해진다. 시발 나는 도대체 왜 나를 자꾸 망쳐만 가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애써 목구멍 뒤로 삼켜본다. 그리고 양심에 털이 난다.


이번의 감정기복에는 이유가 그나마 좀 명확하다. 곧 생리가 다가온다는 것을 직감했다. 미친 듯이 단 것이 당기는 것과 쉴 새 없이 배고픈 이 기분. 호르몬에 농락당하는 이 기분. 생리 경력직 약 15년 정도 되니 대충 감을 잡았다. 무엇보다 온몸이 예민해진다. 잠옷을 입고 자는 것조차 온몸이 까끌거려서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그리고 모든 일에 죄책감을 느낀다.


사소하게 시작하자면 (지금의 나에겐 전혀 사소하지 않지만) 창문을 열어 놓고 공기 청정기를 켜놓는 것부터, 창문을 열지 않고 인센스를 태운다거나, 머리를 빗고 바닥을 쓸지 않을 때. 배가 고파서 밤 11시에 밥을 먹고, 잠이 오지 않아 냉장고를 뒤져 케이크를 한 조각 해치운다던가, 아빠의 생일을 챙기지 못하고 지나갔다는 사실. 집에서 5분 거리의 카페를 오며 킥보드를 탄 일. 배터리가 3프로 남은 아이패드를 공부하겠다며 챙겨 왔다. 충전기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모든 것이 하기 싫어진다.


노래나 듣자 하고 그냥 멀뚱히 앉아 맥 밀러의 surf를 재생했다. 아니, Circles 전곡 재생. 내가 호주에 있던 무렵 맥 밀러의 사후앨범이 나왔다. 아리아나 그란데의 천사 같은 전 남자 친구 정도로 알고 있던 아티스트였는데. 그의 노래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호주에서의 평화로웠던 삶이 떠오른다. 그래서 나는 종종 마음이 널뛸 때 이 앨범을 찾게 된다. 그의 음악이 꽤 누디하다. 튀지 않고, 부드러운 맛이 있다. 그것이 종종 나를 편안하게 만든다. 미디엄템포, 귀에 익숙한 멜로디, 거슬리지 않는 보컬,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 가사. 아마 가사를 알아들을 정도의 영어 실력이었다면 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있지 않은 것이 어디야. 온라인 강의를 들으러 카페에 나온 것이 어디야. 끼니를 거르지 않고 챙겨 먹은 것이 다행이지. 스타벅스엔 아이패드 유저가 많아서 충전기를 빌릴 수 있어서 다행이야. 맥 밀러의 노래로 호주를 떠올릴 수 있어서 다행이야. 오늘도 적당히 절반 이상의 몫은 살아낸 것 같으니 다행이다. 이런 생각으로 나를 달래며 집에 돌아갈 채비를 한다. 양심의 털은 또 모른 척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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