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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본 Oct 24. 2023

구겨진 글

마인드풀저널링-2


K와의 어정쩡한 관계 정리로 인해 한동안 글이란 꼴도 보기 싫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글로 내뱉는 모든 말들이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습관적으로 배워버린 어조나, 단어의 쓰임들. 벗어나기 위해 한동안 글을 쉬었다. 손으로 끄적이는 몇 차례의 일기는 성에 차지는 않았지만 수면까지 올라와 입만 쏙 내놓고 숨을 쉬는 것 마냥 찰나의 숨통을 트이게 만들 수는 있었다. 대략 열 권의 책을 샀고 그중에 시집이 두 권 정도 있었다. 서성거린 카페들에서 건진 맘에 드는 시집까지 합치면 근 한 달간 글을 쉬면서 읽은 종이책들이 꽤 쌓였다. 두 달을 내내 읽게 만든 어려운 서적도, 도저히 몰입할 수 없는 어려운 시집도 있었지만 역시나 글을 쓰게 만든 것은 얼마나 글을 쓰지 않았는가에 달린 문제였다. 글을 쓰게 만드는 문장은 없었다. 속으로 하는 말들이 계속 삼켜졌다. 내뱉을 수 없는 순간이 더 많았고, 나중에 꼭 글로 써야지 하며 짧은 글로는 충족할 수 없다는 이상한 자존심까지 생겼다. 오히려 내면의 움직임을 뱉는 글보다는 실용적인 글을 쓰는 것이 편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성 글은 뚝딱 써서 세 편이나 업로드를 하였지만, 내가 지금 어디까지 잠겨있나에 대해 쓰려면 오래 입안에 머물렀다. 활자가. 괜스레 꾹꾹 더 많은 활자를 눈에 입력했다. 그래야만 내뱉지 못한 글이 밀려서 나올 것만 같았다. 



그리고 새로운 장소와 사람들에게 머물렀다. 완전히 다른 내가 된 것 같으면서도 본연의 나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원래 내가 하려던 것들을 되찾은 기분. 하지만 그럴수록 몸이 축났다. 결승선을 앞에 두고 채찍질을 맞는 말처럼 카타르시스를 앞두고 조급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그리고 떠올랐다. 완전히 숨을 멈추고 있었구나. 가슴팍 밑으로는 도저히 숨이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이 문제의 해결책을 알고 있었다. 횡격막 사이에 글이 잔뜩 끼어있었던 것이다. 결국은 내뱉어야만 나는 숨을 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곰팡이인지 이끼인지 모를 끈적하고 미끄덩하게 생긴 불쾌한 저것을 끄집어내야 하는데, 손대기가 망설여졌다. 손가락 발가락의 껍질이 까뒤집어졌다. 가끔은 피를 봐야만 끝이 날 것 같아서 쉽게 풀 수 없도록 붕대를 꽁꽁 감아두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아, 담배를 두고 나왔다. 한동안은 담배도 피울 수 없었다. 왠지 담배연기에 실려 아직 꺼내고 싶지 않은 그 불쾌한 것이 딸려나갈 것 같은 기분이라… 고작 체리 맛 수증기이긴 해도… 



어젯밤에 불 끄고 누웠는데 뭐 때문인지 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어두운 채로 방문을 향해 돌진했다가 방문 옆에 세워둔 스텝퍼에 강하게 정강이를 차였다. 아니 내가 찬 거긴 한데, 진짜 누가 깡! 하고 친 기분이라 괜히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리고 너무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근데 왠지 그때 떠올랐던 것 같다. 내일은 글을 쓰러 나가야겠어. 그동안 참고 참은 것을, 내일 몇 번이고 같은 단어를 중복해서 쓰더라도 어휘력의 한계가 느껴질지라도 내뱉어야겠다는 생각. 그렇게 툭 치면 나올 것 같던 문장을 결국 뱉었다. 숨을 쉬었다. 숨을 깊게 깊게 들이쉬는 연습을 했다. 코 끝을 스쳐 지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명상을 하듯 한 문장 한 문장 쓸 때마다 들숨과 날숨이 엉겼다.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의 나열이라고 생각했던 시집이 즐겁게 받아들여진다.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허세에 찌든 10대의 무리가 카페로 쏟아 들어져 오는 상황이라던가, 미묘한 긴장감이 도는 40대의 수다를 엿듣게 되는 일이 버겁지 않았다. 앗, 인식하는 순간 조금 버거워지고 있다. 모래성 게임을 하듯 포크로 조심스럽게 케이크를 파먹는 대학생 둘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글을 쓰는 행위보다 귀가 예민해지는 시점이다. 쓰는 일을 멈추어야 하는 순간. 이렇게 몇 페이지고 쓸 수 있을 것 같던 글쓰기의 시간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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