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드풀저널링-1
두 번째 고른 음료로 따듯한 티를 시킨 것은 참 잘한 선택이었다. 적당히 새콤하고 은은한 단맛이 느껴지면서 에어컨 바람으로 차갑게 식은 몸을 적당히 데워줄 수 있는 과일 허브티.
글쓰기 명상이라는 책을 읽었다. 그 어떤 명상 방법보다 가장 관심이 갔던 이유는 나는 내가 글을 쓰며 괜찮아졌다는 사실을 깊게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이다. 글쓰기는 나에게 객관적으로 보는 시각과 나에게 보내는 연민과 위로를 주었고, 사실 명상이란 그런 행위를 목표로 수련하는 것이기에 내가 글을 쓰면서 사유한 모든 순간들이 명상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지, 글 쓰다가 명상으로 노선을 튼 게 아니라는 뜻이다.
늘 뱉어내듯 글을 쓴다고 표현한 것도 내면의 감정을 소리로 만들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빠르게 내려칠 때 더한 쾌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또 쓰는 순간, 쓰기 위해 그 순간의 감정을 말로 만들어내느라 내가 어느 정도로 과장되게 해석하고 있는지도 아주 잘 보였다. 사실을 그게 맹점이었다. 나는 나에게로 온 감정을 명확하게 보지 않고 휩쓸려 더 큰 파도를 만들었다. 그저 작은 조약돌 하나가 곧 사라질 파동을 만들었을 뿐인데 나는 멈추지 않는 끊임없는 파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커다란 파도를 마주하게 될 때도 있었다. 그럴 때 글쓰기란 내가 얼마나 커다란 파도에 휩쓸려있는지 실감하게 만들어줬다. 그러면 나는 몸에 최대한 힘을 풀고, 물살에 몸을 맡긴다. 바람이 잦아들면 괜찮아지리라. 입으로 되뇜과 동시에 손으로 적었고, 타이핑했다. 그리고 두 눈으로 다시 읽었고, 뇌에 새겼다.
명상이라는 행위를 알기 전부터 나는 가끔 나를 우주 밖에서 바라보곤 했다. 나는 얼마나 작지, 지금 이 순간에 나는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에 집중하고 있지? 이렇게 커다랗고 넓은 우주에서 나라는 별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 유난히 빛나는 별은 아니구나, 이 행위는 나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나만 유난히 불행한 것 같을 때 쓰는 방법이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자연스럽게 가닿는 생각의 끝에서 나는 우주 밖으로 도피했다.
최근 들어 지인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감정을 바라볼 줄 알게 된 것 같다고. 확신이 없는 말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명확하게 할 줄 안다고 얘기는 못했다. 나는 아직도 별별 시답지 않은 감정의 너울에 허우적대니까. 다만 가끔 그 순간을 알아챈다. 나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가? 이 감정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혼란스러운 순간을 글로 적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떠들어대기도 한다. 대부분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알게 된다. 결국엔 그 과정이 중요했던 것이다. 명확하게 만드는 과정. 실체 없던 느낌을 실체로 만들기.
글쓰기 명상이라는 방법은 신비주의, 종교적인 색채에 부담을 느끼는 나에게 혹은 명상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모두에게 명확히 실체를 주어지게 만듦으로써 추상적인 행위에서 글쓰기라는 우리가 늘 해왔던 익숙한 행위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단, 글쓰기명상으로 적은 글은 반드시 폐기해야 한다는 법칙이 있었다. 눈을 감고 명상하다가 들어오는 감정과 생각을 누군가 훔쳐볼 수 없음과 마찬가지로.
나는 보여주기 글쓰기와 절대 보여주지 못할 글쓰기를 나누어 쓴다. 주로 손으로 적는 다이어리에는 보여주지 못할 이야기를, 타이핑으로 쓰는 글은 생각의 흐름이나 횡설수설한 주제 속에서 꺼내 적고 가끔 맘에 드는 글은 어딘가에 업로드하는 편이다.
첫 글쓰기를 시작한 것이 글쓰기 모임에서 매일 새벽 한 시 한 편의 글을 나누는 것으로 시작한 일이었으니 누군가에게 보일 글쓰기가 익숙했으면서도, 비대면 익명의 누군가에게 보이고 지지받는다는 특성으로 누군가에게 보이긴 하지만 결국 사라질 글이라는 것 두 가지를 충족했기 때문에 나에게 글쓰기 명상의 효과를 내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비대면의 사람들이 결국 대면의 사람들로 이어지고, 대면의 사람에게 실망하고, 내 글을 보여주고 싶지 않고, 지지와 위로가 숙제처럼 느껴지던 순간에 글쓰기를 잠시 멈추었다.
의식의 흐름대로 쓰면서도 어느 순간 마무리를 깔끔하게 지어야 할 것만 같은 부담감이 들기 시작할 때 즈음 글쓰기가 명상으로 이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그래서 다시 내 의식을 흐름대로 잡아 꺼내는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불쑥 튀어나오기도 하고, 아빠에 대한 연민이 벅차오르기도 하고, 엄마에 대한 양가감정을 느끼고, 친구를 사랑하면서 화를 내게 되는 복잡한 나를 꺼낸다. 글을 쓰면서 그런 나를 본다. 못나고 추악한 글쓰기가 시작된다. 이 글을 쓰면서도 블로그에 업로드할지 말지 고민하고, 띄어쓰기가 맞는지 아닌지 고민하는 나를 버리고 좀 더 솔직하게 되기를… 그러려면 손으로 써야만 할 것 같다. 그리고 태워야지. 언젠간 좋아하는 사람들을 모아 글을 쓰고 돌려보거나 낭독시키지 않은 채로 태우는 의식을 치러야겠다. 소멸되는 감정을 두 눈으로 바라보아야지. 이 글을 보여주기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