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 나는 2년 가까이 다닌 직장을 관두고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결심한다. 그 당시의 나는 한국에서 사는 미래를 꿈꾸기 어려워 해외로 눈을 돌렸다. 영어를 배우고, 외항사 승무원을 하면서 중동에서 살면서 돈을 모으는 미래. 그렇게 한국은 나에게 원가족이 살고 있는 땅으로 남기고 앞으로 나의 미래는 한국을 벗어나 살기로 결정했다. 그 결심이 동생에게 큰 파동이 될 줄 몰랐다. 그저 신이 난 목소리로 나는 동생에게 내 미래에 대해 떠들었고, 그 애가 울었다.
언니가 가면 그럼 나는 어떡해?
나는 당황스러웠다. 동생은 종종 티브이가 안 나온다거나, 어느 홈페이지에 회원가입을 못한다거나 할 때마다 나에게 전화해서 해결할 정도로 나를 의지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서울과 대전만큼의 거리에서 살았고, 1년에 몇 번 보러 가지도 않는 사이였다. (내가 일방적으로 찾아가야만 만날 수 있는 관계였기 때문에) 어차피 가까이 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해외로 나간다는 것이 크게 달라질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신나게 떠들어댄 미래 속에 동생은 없었고, 그 애에게 미래란 여전히 막막했을 것이다. 나는 어렸고, 그저 원가족을 벗어나는 것에만 집중했다. 집으로 돌아가면 되풀이될 트라우마를 다시 겪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 동생이 울 정도로 패닉이 왔다는 것이 충격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한국을 떠날 결심을 꺾지는 못했다. 내가 동생을 책임지고 살 수는 없는 거니까.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동생도 곧 집 밖에 나오는 순간이 있겠지, 하며 안일하게 생각했다.
동생은 현실적인 이야기를 계속 미뤄왔다. 동생을 살살 달래며 검정고시 이야기를 한다거나 아르바이트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회피하고 싶어 했다. 자기를 위해 해주는 말이라는 걸 알기에 짜증을 내지도 않았다. 그저 대답 없이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현실을 마주하기 힘든 고통을 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그때는 고여있기만을 ‘바라는’ (결코 바라는 일이라고 할 수 없음을 이제는 알지만) 그 애가 좀... 답답했다. 그렇다고 동생을 적극적으로 이끌어주는 엄마도 아빠도 기대할 수 없었다. 다들 각자 먹고살기 바빴고, 그 애의 막막함을 진지하게 상대해 줄 사람이 없었다.
예전이나, 그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