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에서, 대전에서
원주에서
나와는 다르게 그 애는 어렸을 때부터 꾸미는 데에 관심이 많았다. 그 시기의 사춘기 소녀들이 으레 그러하듯 치마를 짧게 줄이고 화장을 했다. 유행하는 패딩을 사달라고 조르고, 용돈을 받아 친구들과 놀러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동생은 친구가 많았다. 하지만 학교를 관두는 것과 동시에 그 많은 친구들과도 전부 연락을 끊었다. 자퇴하고 나서 핸드폰 번호를 없애고 카톡도 탈퇴했다. 사라져 버린 동생을 찾는 친구들은 엄마 번호를 알아내서까지 연락이 왔지만 동생은 그저 잘 지낸다고 답해주라고 말할 뿐 한 번도 친구들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밖으로 나오지 않게 되었다. 처음에는 살을 뺀 다음 나가겠다는 작은 결심을 하더니, 그 이후엔 살을 빼지 못하면 밖에 나갈 수 없다는 강박이 되어버린 듯했다.
그 낡은 외갓집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은 여전했다. 오히려 집에만 있다는 죄책감에 동생은 엄마를 대신해 집에서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 시기, 엄마는 동생에게 많이 의지했다. 집에서 나가지 않고,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 딸에게 의지했다는 것이 이상하지만, 그 앤 자기가 성인 노릇을 못하는 만큼, 집에서 만큼은 엄마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용돈을 달라고 하지도 않았고, 먹고 싶은 음식을 얘기하지도 않고 그저 짐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티브이 스케줄을 모두 꿰고 있을 정도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아빠의 밥을 차리고 막내를 챙기며 집을 쓸고 닦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집에만 있는 그 애를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모두가 익숙해졌고, 동생은 집 밖에 나가기 더 두려워했다. 실체 없는 두려움은 시간을 잡아먹고 점점 더 커질 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트라우마가 낳은 두 번째 병이라고 생각했다.
첫째는 나의 우울증, 그 애가 두 번째 타자였다.
그 시기의 동생을 방치한 것은 모두의 죄책감이 되었다. 동생이 밖에 나가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순간 그 애를 방치했다는 죄책감을 마주해야 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밖에 나오라고 재촉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동생이 제대로 된 햇빛 한 번 받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었지만 괜찮은 줄로만 알았다. 아니, 괜찮을 것이라고 모른 척한 것이겠지. 5년을 넘게 집에만 있는 것이 정상이 아님을 알면서도. 사실은,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대전에서
큰 이모는 대전에 홀로 살고 있는 60대 여성이다. 대전의 큰 병원에서 미화원으로 주 6일 일하며 양 손목에 무리가 왔다. 결국 일주일 병가를 내고 수술을 해야 했다. 보통은 한쪽 손목씩 번갈아가며 수술을 하지만 최대로 병가를 낼 수 있는 기간이 일주일 밖에 없었기에 양쪽을 한 번에 수술을 받아야 했다. 양손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병시중을 해야 할 사람이 필요하지만 자식이 없던 이모는 엄마에게 둘째를 보내줄 수 있냐고 부탁했다.
그 당시 동생은 일하는 엄마를 대신해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고 있었다. 밥을 차리고, 치우고, 쓸고, 닦고. 아빠랑 눈도 마주치기 싫어하면서 아빠가 뜯어온 산나물을 다듬고, 엄마가 집에 돌아오면 힘들지 않게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힘들다는 소리 한 번 한 적이 없지만 엄마는 내심 동생을 의지하면서도 동시에 안쓰러워했다. 대전에 가면 지금보다는 좀 편하게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동생도 수술 후 도와줄 사람이 없는 이모를 도와주는 거니까, 고작 일주일만 도와달라고 하니까, 엄마는 일하느라 갈 수 없으니까, 엄마를 대신해 내가 도와야지, 그런 마음이었을 테다.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었기에 동생은 대전에 가겠다고 결정했다.
그렇게 성미의 고립이 끝나는 듯했지만 그저 또 다른 고립의 시작일 뿐이었다.
멀미라곤 해본 적 없던 애가 차를 타고 대전에 가는 내내 속을 게워냈다. 이제는 오히려 다시 멀미하는 것이 무서워 쉽게 다시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말도 하기 어려워진 판국이었다. 동생은 그렇게 단순히 멀미 때문에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서 예상했던 것보다 오랫동안 이모와 함께 살게 되었다. 후에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팔자에 자식이 하나도 없는 이모에게 이모 딸이 될 팔자였나 보다, 생각했다고. 엄마는 그게 동생에게도 이모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동안은 꽤 잘 지내고 있는 듯했다. 집안일을 잘하는 동생과, 힘들게 일하고 돌아오면 집안일을 신경 쓰지 못하는 이모는 나름대로 그 합을 맞추며 즐겁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동생은 아빠와 살 때보다 편안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집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던 애가 분리수거를 하러 나가기도 하고, 사 먹고 싶은 과자가 있으면 이모가 매달 주는 용돈으로 슈퍼에 가기도 했다. 요리를 잘하는 동생은 이모가 먹고 싶다는 음식을 척척 해냈다. 같이 홈쇼핑을 보다가 맛있는 음식을 시키기도 하고, 같이 장을 보러 마트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모가 출근하면 동생은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나는 그게 그 애에게 주어진 자유라고 생각했다. 명치끝이 쓰리다. 어쩌면 그것은 또 다른 방치였을지도 모르겠다.
동생이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동생과 나는 성인이 된 이후 꽤 자매다운 관계를 맺어나갔다. 나는 집 밖으로 나간 뒤 조금씩 자아를 회복했고, 동생의 자아는 갈수록 작아졌다. 그리고 고작 전화 통화만 하는 언니에게 전화기 너머로 의지했다. 그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 관계에서 오히려 동생을 대하기 편했다. 20살이 넘은 성인 여자라고는 하지만 그 애는 여전히 17살에 머물러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세상물정 모르고, 편의점 이름이 바뀐 것도 모르는 애. 연락하는 사람이라고는 지지리도 지겹게 싸우던 2살 터울의 언니. 그마저도 세상 밖으로 나간 나는 동생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매주 주말 동생을 보러 대전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미루기 일쑤였다. 나를 사랑해 주는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에도 부족한 하루하루를 대전에 고립된 동생을 보러 가는 데에 쓰기가 아까웠다. 우리가 그렇게까지 애틋한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가끔 그 애는 영상통화를 걸어 자기가 밥을 먹는 동안 통화하자고 했다. 그리고 얼굴을 보며 먹으니 혼자 먹는 느낌이 아니라 좋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알아차렸어야 했다. 그 애의 고립과 외로움을. 모른척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동생의 손을 잡고 끌어내야 했다.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사람들에게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 시절의 내가 어떤 짓을 했어도 떠난 이의 선택을 바꿀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내가 조금 더 일찍 알아챘다면, 내가 동생을 집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면, 내가 좀 더 동생에게 신경 썼다면. 이 생각들은 그 애가 떠난 뒤에도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혔고, 벗어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시간을 되돌려 어떤 짓을 해도 동생의 선택을 바꿀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후회와 그리움, 그리고 슬픔은 한 데 뭉쳐 구분하기 어려웠다. 밥 먹는 동생의 얼굴을 화면 너머로라도 다시 한번 보고 싶을 뿐이다.
귀찮아하지 말걸, 좀 더 오래 통화할걸.
그런 후회는 이미 수없이 했다.
사실 이 글을 덤덤하게 쓸 수 있을 줄 알았다. 이미 동생이 떠난 지 4년이 다 되어가고 동생과의 추억들은 그보다 더 오래되었기 때문에 어제를 기억하는 일처럼 아무렇지 않게 쓸 수 있을 줄 알았다. 그 애가 죽었다는 사실은 더 이상 나를 아프게 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동생의 선택을 원망하지 않게 될 줄 알았다. 더 이상 후회하며 아파하지 않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큰 착각이었다. 최근의 기억에 가까워질수록 떠올리기가 힘들어진다. 나는 여전히 동생이 떠난 일로 아파하고 있다. 아프지 않은 것이 더 이상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뿐이다.
이 시점에서 고민이 된다. 이 글을 끝까지 쓸 수 있을까? 동생과의 기억을 아프지 않게 떠올리게 될 수 있을까? 내가 의도한 대로 애도의 한 방법으로써 이 글을 마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