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큰꿩의비름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다시 읽었습니다.
처음 읽었을 때의 놀라움과 감탄은 조금 엷어졌지만 여전히 그 현란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아름다운 문장들을 읽으며, ‘글’이 갖는 힘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작가 자신이 소설의 후기에서 삼학사(三學士 - 홍익한, 윤집, 오달제)가 호란 이후 청나라에 끌려가 죽임을 당하기까지의 행적을 짤막하게 다루면서 썼던 문장을 나는 작가에게 오롯이 되돌려 주고 싶었습니다.
“찬란한 언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와 여백이 없었다.”
물론 작가의 언어는 ‘찬란하기’만 한 것도, 또 ‘거침없’ 었던 것도 아니고 재능과 더불어 숱한 고민과 철저한 수련의 결과물이기는 하겠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치열하고 찬란하고 군더더기가 없어서 이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비극을 과장된 감정을 배제하면서도 절절하게 표현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역설적으로 그의 문장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그 문장이 다루는 서사(敍事)가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고 현실감이 덜어지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이 소설의 문장은 매혹적이었습니다.
사실 나는 이 소설을 읽은 이후 ‘조선’이라는 나라를 소설을 읽기 전과는 매우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전쟁에 휩쓸렸던 이웃 중국과 일본에서는 왕조가 바뀌고 정권이 교체되었지만 조선의 사대부 정권은 이후로도 몇 백 년의 시간을 더 버텨내었습니다.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미스터리였고 아직도 그 미스터리는 아쉬움과 함께 풀리지 않은 채 내게 남아있습니다. 사실 ‘버텨냈다.’는 말은 그들의 노력을 지나치게 폄하하는 단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무지해서 조선의 사대부들과 백성들이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만큼 엄청났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수많은 난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극복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새삼스럽게 ‘관념’의 힘, ‘언어’의 무자비한 힘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관념의 힘으로 거대하고도 강력하게 존재하는 힘의 실체를 부정할 수 있었다......... 이 관념의 치열함, 그 순정성, 혹은 그 맹목 이것이 그들의 사유와 행동의 비극적 절정을 이룬다.
이 말은 특정 인물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특정 사회에 대해서도 진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때 이랬던 사람들이 살던 이 땅, 같은 땅 위를 사는 오늘의 사람들이 몇 백 년 만에 이토록 물신주의적이고, 이토록 현실주의적이며 이토록 '현재'에만 초집중하는 삶을 살아가는 방향으로 돌아섰다는 것이 너무도 놀랍게 느껴집니다.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공개된 자리에서 수많은 말들을 쏟아내지만 그 많은 말들은 형편없이 ‘구겨져’ 있고, 애초부터 ‘정처’라고는 없기에 그 공허한 ‘소리’들은 사람들의 가슴에 울림은커녕 혐오감, 구토만을 불러일으키곤 합니다. ‘말’과 ‘소음’은 너무도 다르다는 것만을 느낄 뿐 인간 세상의 복잡성과 양면성, 개인과 집단에서 드러나는 도덕성의 차이... 그 또한 나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저 어지러울 뿐이고 어리둥절해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한번 더 소설의 문장을 인용해 봅니다.
“분명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어야 하는 것이 삶의 길이라면 견딜 수 없는 것은 없는 것인가.”
작가조차 알 수 없었다면 공부가 얕고 늘 안개가 낀 듯 선명하지 못한 나의 두뇌로 무엇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현실은 늘 날 당황하게 만듭니다. 왜 이렇지?? 이건 뭐지???
이 남한산성을 나의 또 하나의 크랙 정원이라고 부른다면 너무 지나친 과대망상일까요? 견딜 수 없는 일들을 견뎌내었던 나의 17세기 선조들 덕분에 21세기의 나는 그저 평화롭고 멋진 남한산성을 가질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남한산성 인근은 일 년 내내 수많은 꽃들을 볼 수 있는 꽃들의 성지(聖地)이기도 합니다. 언제 찾아가도 무슨 꽃이든 넉넉하게 볼 수 있지요. 그중 일부는 꽤나 귀한 꽃이기도 하고요. 심란할 때나 또는 자투리 시간이 날 때 나는 남한산성을 자주 찾았습니다. 1시간 조금 넘는 거리를 차로 달리노라면 주위의 풍광도 좋고, 남한산성 길로 접어들 때면 우거진 숲의 향기에 금세 행복해집니다. 물론 그 숲 속에서 만나는 꽃들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조차 없겠지요. 이 작은 인연과 시간을 들이밀며 이제 나, 남한산성의 성곽길을 감히 나의 크랙 정원이라고 우길 터이니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한 여름의 더위가 다 사그라지기 직전부터 성곽은 화려한 변신을 선보입니다. 바로 ‘큰꿩의비름’ 군락이지요. 성곽을 뒤덮는 진분홍의 꽃들과 그 꽃을 찾아 날아다니는 나비 떼, 벌들... 사실 계절 따라 이 성곽의 돌 틈에서 피어나는 꽃은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 꽃들 중에서도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은 아마도 이 꽃이 아닐까 싶습니다.
2천여 년 전부터 만들어졌다는 이 산성이 본격적으로 축조된 시기를 17세기 초라고 잡더라고 그 유구한 역사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연석으로 쌓은 남한산성의 석축은 그 자체로도 세월의 흔적이 얹혀서 그런지 웅장하고 아름답습니다. 때로는 옅은 슬픔이 느껴지기도 하는 그 성곽의 아래쪽에는 큰 돌을 쌓아 토대를 단단히 했고 위쪽은 작은 돌이 아기자기 맞물려 멋진 모습이지만 그 석축의 돌 틈에 차곡차곡 쌓인 역사를 생각하면 감동은 더 커집니다. 하물며 그 세월의 더께 위에 무더기로 피어난 꽃을 볼 때의 감동이야 말할 필요도 없을 터이지요. 내가 가진(?) 크랙 정원 중 크기로도 으뜸이고, 아름다움으로도 으뜸이며, 그 의미로도 으뜸일 것입니다.
자, 이제 꽃에 조금 더 집중해 볼 시간입니다.
큰꿩의비름입니다.
정말 예쁘지요? 꽃잎 5장이고 끝부분이 뾰족하여 아주 단정하고 날카롭기까지 한 모습입니다. 긴 모양의 수술은 10개, 꽃밥은 자주색입니다. 암술은 5개로 마치 수술들이 호위 무사처럼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에 볼록볼록 솟아 있습니다.
이렇게 어여쁜 꽃들이 하나씩 피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모여 피어납니다.
꽃 모양 말고 꽃들이 '달린 모양'에 집중해 보세요! 이런 모양의 꽃차례를 ‘산방꽃차례’ 혹은 '편평꽃차례' 라고도 합니다. 여러 개의 꽃자루가 있고, 그 꽃자루의 길이가 위로 올라갈수록 짧아져 꽃대 끝에서는 꽃이 거의 같은 높이로 달리는 꽃차례이지요. 그림으로 표현해 봅니다. 참고로 꽃차례란 꽃이 꽃줄기에 달리는 순서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산방화서
꽃 하나하나는 작고 보잘것이 없더라도 이 꽃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모여 피게 되면 꽃가루받이를 해 줄 곤충들을 유인하는 데 효과적이겠지요. 그래서 식물들은 다양한 모양의 꽃차례로 최대한 풍성하고 아름다운 꽃 모양을 만들어냅니다. 이 편평꽃차례의 경우는 꽃자루의 길이를 조절하여 많은 꽃들이 한 평면에 피는 것처럼 펼쳐지기 때문에 적은 수의 꽃으로 많은 꽃들이 핀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또 하나하나의 꽃의 수명이 짧다 하더라도 모여 핀 꽃들이 차례차례 피고 진다면 전체적으로는 꽃이 피어있는 시기가 늘어나므로 꽃가루받이의 기회도 많아지는 셈이지요. 화려함에 화려함을 더하는 큰꿩의비름의 모습입니다.
늙은 성곽의 돌 틈 사이로 가득하게 피어난 이 화려한 꽃들을 보면 '삶의 영속성과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 때 많은 이들의 눈물과 한숨과 피와 죽음의 예감으로 가득했을 그곳, 그리고 어떤 이들에게는 깊은 고뇌와 죽음보다 더한 굴욕으로 몸서리쳤을 그곳에 이토록 고운 빛의 꽃들이 무더기로 피어나 그 고뇌와 죽음을 덮어버리곤 합니다. 돌벽 틈틈이 피어난 꽃들은 아픔도 슬픔도 다 가리고 지나간 시간마저 덮어 과거뿐 아니라 걱정 많은 현재마저 잊게 합니다. 그곳에서는 어쩌면 '미래'라는 것을 꿈꾸어 봄 직도 합니다. 아름다움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힘은 아주 셉니다!
내친김에 또 하나의 아름다운 꽃을 소개합니다. 큰꿩의비름과는 다른 종이지만 같은 속(꿩의비름 속)의 꽃이고, 그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의 눈을 유혹하고 가슴을 설레게 하는 꽃, 바로 ‘둥근잎꿩의비름’입니다.
이 꽃을 처음으로 보고 너무나 감동한 나는 당시 그 놀라움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답니다.
꽃을 보기 위해 다리를 건넜다.
이쪽 세상에서 저쪽 세상으로 넘어갔다.
계곡 안에는 꽃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는데,
이제 이 꽃을 보았으므로 나는
다리를 건너기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꽃들이 있다.
나는 그 꽃들을 보기 위해 먼 길을 떠나고
그곳에서 매번 새로운 다리를 건넌다.
아직 덥다고는 해도 아름다운 가을꽃들이 피어나려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남한산성의 성곽에 뚫린 총안(銃眼)으로 보이는 세상도 이제는 고즈넉하고 평화롭습니다. 조금 있으면 가을의 꽃들이 마치 액자 속 그림처럼 총안 바깥에 피어날 것입니다. 결국 오래 기억되는 것은 전쟁과 죽음의 시간이 아니라 한 송이 꽃의 진한 향기, 가을 한낮 공간을 가득 채운 산국(山菊)의 잔향(殘香) 일 것입니다.
<총안을 통해 바라본 산국 >
사족입니다.
돌벽이 키우는 생명은 꽃만이 아닙니다. 가끔 그 돌 틈으로 뱀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으니 혹여나 꽃구경을 가시려거든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산성을 지키는 성지기라고 생각하고는 있습니다만 볼 때마다 소름이 돋는 것은 어쩔 수가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