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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시카 Sep 21. 2024

돌 틈마다 알알이 박힌 <남한산성>의 '시간'들

                               - 큰꿩의비름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다시 읽었습니다.

처음 읽었을 때의 놀라움과 감탄은 조금 엷어졌지만 여전히 그 현란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아름다운 문장들을 읽으며, ‘글’이 갖는 힘에 숨이 멎을 것 같은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작가 자신이 소설의 후기에서 삼학사(三學士 - 홍익한, 윤집, 오달제)가 호란 이후 청나라에 끌려가 죽임을 당하기까지의 행적을 짤막하게 다루면서 썼던 문장을 나는 작가에게 오롯이 되돌려 주고 싶었습니다. 


“찬란한 언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와 여백이 없었다.” 


물론 작가의 언어는 ‘찬란하기’만 한 것도, 또 ‘거침없’었던 것도 아니고 재능과 더불어 숱한 고민과 철저한 수련의 결과물이기는 하겠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치열하고 찬란하고 군더더기가 없어서 이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비극을 과장된 감정을 배제하면서도 절절하게 표현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역설적으로 그의 문장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그의 문장이 다루는 서사(敍事)가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고 현실감이 덜어지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사실 나는 이 소설을 읽은 이후 ‘조선’이라는 나라를 소설을 읽기 전과는 매우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전쟁에 휩쓸렸던 이웃 중국과 일본에서는 왕조가 바뀌고 정권이 교체되었지만 조선의 사대부 정권은 이후로도 몇 백 년의 시간을 더 버텨내었습니다. 나는 이 사실이 너무 부끄럽고 화나고 그리고 한편으로는 신기했습니다. 사실 ‘버텨냈다.’는 말은 그들의 노력을 지나치게 폄하하는 단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무지하고, 조선의 사대부들과 백성들이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만큼 엄청났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수많은 난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극복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새삼스럽게 ‘관념’의 힘, ‘언어’의 무자비한 힘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관념의 힘으로 거대하고도 강력하게 존재하는 힘의 실체를 부정할 수 있었다.........이 관념의 치열함, 그 순정성, 혹은 그 맹목 이것이 그들의 사유와 행동의 비극적 절정을 이룬다. 


이 말은 특정 인물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특정 사회에 대해서도 진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때 이랬던 사람들이 살던 이 땅, 같은 땅 위를 사는 오늘의 사람들이 몇 백 년 만에 이토록 물신주의적이고, 이토록 현실주의적이며 이토록 현재에만 초집중하는 삶을 살아가는 방향으로 돌아섰다는 것이 하나의 기적 같은 현상처럼 느껴집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공개된 자리에서 부끄러움조차 없이 수많은 말들을 쏟아내지만 그 많은 말들은 형편없이 ‘구겨져’ 있고, 애초부터 ‘정처’라고는 없기에 그 공허한 ‘소리’들은 사람들의 가슴에 울림은커녕 혐오감, 구토만을 불러일으키곤 합니다. ‘말’과 ‘소음’은 너무도 다르다는 것만을 느낄 뿐 인간 세상의 복잡성과 양면성, 개인과 집단에서 드러나는 도덕성의 차이... 그 또한 나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저 어지러울 뿐이고 어리둥절해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한번 더 소설의 문장을 인용해 봅니다. 


“분명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어야 하는 것이 삶의 길이라면 견딜 수 없는 것은 없는 것인가.” 


작가도 다 알 수 없었다면 공부가 얕고 늘 안개가 낀 듯 선명하지 못한 나의 두뇌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현실은 늘 날 당황하게 만듭니다. 왜 이렇지?? 이건 뭐지???   



이 남한산성을 나의 또 하나의 크랙 정원이라고 부른다면 너무 지나친 과대망상일까요? 견딜 수 없는 일들을 견뎌내었던 나의 17세기 선조들 덕분에 21세기의 나는 그저 평화롭고 멋진 남한산성을 가질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남한산성 인근은 일 년 내내 수많은 꽃들을 볼 수 있는 꽃들의 성지(聖地)이기도 합니다. 어제 찾아가도 무슨 꽃이든 넉넉하게 볼 수 있지요. 그중 일부는 꽤나 귀한 꽃이기도 하고요. 심란할 때나 또는 자투리 시간이 날 때 나는 남한산성을 자주 찾았습니다. 1시간 조금 넘는 거리를 차로 달리노라면 주위의 풍광도 좋고, 남한산성 길로 접어들 때면 우거진 숲의 향기에 금세 행복해집니다. 물론 그 숲 속에서 만나는 꽃들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조차 없겠지요.

 이제 내가 남한산성의 성곽을 나의 크랙 정원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한 여름의 더위가 다 사그라지기 직전부터 성곽은 화려한 변신을 선보입니다. 바로 ‘큰꿩의비름’ 군락이지요. 성곽을 뒤덮는 진분홍의 꽃들과 그 꽃을 찾아 날아다니는 나비 떼, 벌들... 사실 계절 따라 이 성곽의 돌 틈에서 피어나는 꽃은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 꽃들 중에서도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은 아마도 이 꽃이 아닐까 싶습니다. 


2천여 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이 산성이 본격적으로 축조된 시기를 17세기 초라고 잡더라고 그 유구한 역사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연석으로 쌓은 남한산성의 석축은 그 자체로도 세월의 흔적이 얹혀서 그런지 웅장하고 아름답습니다. 아래쪽에는 큰 돌을 쌓아 토대를 단단히 했고 위쪽은 작은 돌이 아기자기 맞물려 멋진 모습이지만 그 석축의 돌 틈에 차곡차곡 쌓인 역사를 생각하면 감동은 더 커집니다. 하물며 그 세월의 더께 위에 무더기로 피어난 꽃을 볼 때의 감동이야 말할 필요도 없을 터이지요. 내가 가진(?) 크랙 정원 중 크기로도 으뜸이고, 아름다움으로도 으뜸이며, 그 의미로도 으뜸일 것입니다.  



자, 이제 꽃에 조금 더 집중해 볼 시간입니다.            




너무 예쁘지요? 꽃잎 5장이고 끝부분이 뾰족하여 아주 단정하고 날카롭기까지 한 모습입니다. 긴 모양의 수술은 10개, 꽃밥은 자주색입니다. 암술은 5개로 마치 수술들이 호위 무사처럼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에 볼록볼록 솟아 있습니다. 

이렇게 어여쁜 꽃들이 하나씩 피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모여 피어납니다. 


꽃 모양에 집중하지 마시고 꽃들이 달린 모양에 집중해 보세요! 이런 모양의 꽃차례를 ‘산방꽃차례’ 혹은 '편평꽃차례' 라고도 합니다. 여러 개의 꽃자루가 있고, 그 꽃자루의 길이가 위로 올라갈수록 짧아져 꽃대 끝에 거의 같은 높이의 꽃이 달리는 꽃차례이지요. 그림으로 표현해 봅니다. 참고로 꽃차례란 꽃이 꽃줄기에 달리는 순서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산방화서  


꽃 하나하나는 작고 보잘것이 없더라도 이 꽃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모여 피게 되면 꽃가루받이를 해 줄 곤충들을 유인하는 데 효과적이겠지요. 이 편평꽃차례의 경우는 꽃자루의 길이를 조절하여 많은 꽃들이 한 평면에 피는 것처럼 펼쳐지기 때문에 적은 수의 꽃으로 많은 꽃들이 핀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또 하나하나의 꽃의 수명이 짧다 하더라도 모여 핀 꽃들이 차례차례 피고 진다면 전체적으로는 꽃이 피어있는 시기가 늘어나므로 꽃가루받이의 기회도 많아지는 셈이지요. 화려함에 화려함을 더하는 큰꿩의비름의 모습입니다.  


큰꿩의비름과는 다른 종이지만 같은 속(꿩의비름 속)의 꽃이고, 마찬가지로 아름다워 사람들의 눈을 유혹하고 가슴을 설레게 하는 꽃 하나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바로 ‘둥근잎꿩의비름’입니다.             



이 꽃을 보고 나는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처음 보았을 당시 이렇게 쓰기도 했답니다. 


꽃을 보기 위해 다리를 건넜다.

이쪽 세상에서 저쪽 세상으로 넘어갔다.

계곡 안에는 꽃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는데,

이제 이 꽃을 보았으므로 나는

다리를 건너기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꽃들이 있다.

나는 그 꽃들을 보기 위해 먼 길을 떠나고

그곳에서 매번 새로운 다리를 건넌다.   



아직 덥다고는 해도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는 가을의 초입입니다.

남한산성의 성곽에 뚫린 총안(銃眼)으로 보이는 세상도 이제는 고즈넉하고 평화롭습니다. 조금 있으면 가을꽃들이 마치 액자 속 그림처럼 총안 바깥에 피어날 것입니다. 결국 오래 기억되는 것은 전쟁과 죽음의 시간이 아니라 한 송이 꽃의 진한 향기, 가을 한낮 공간을 가득 채운 산국(山菊)의 잔향(殘香) 일 것입니다. 

                                          <총안을 통해 바라본 산국 > 




사족입니다.

가끔 그 돌 틈으로 뱀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으니 혹여나 꽃구경을 가시려거든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산성을 지키는 성지기라고 생각하고는 있습니다만 볼 때마다 소름이 돋는 것은 어쩔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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