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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시카 Aug 24. 2024

물고기와 민들레

                             - 민들레/서양민들레










좋은 책이라고, 꼭 읽어봐야 한다는 권유에도 나는 쉽게 ‘좋은 책’들을 읽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좋은 책은 걸핏하면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는 어떤 감정과 소망을 건드리고 나는 그 깨움이 반갑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간신히 가라앉혀 놓았던 흙탕물이 작은 돌멩이 하나로 엉망이 되듯, 내 마음의 평화도 간단히 깨지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나는 특히 소설을 읽지 못하고, 시를 읽지 못하고, 수필을 읽어내지 못합니다. 겉보기만의 평화라도 행여 깨질까를 두려워하며 감정의 소모가 없는 그저 딱딱한 내용의 책들이나 기껏해야 범죄소설을 읽으면서 시간을 죽입니다.


그러나 읽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책들은 사실 쉽게 잊혀지지 않은 채 머리 한 구석에 남아있기 마련이어서, 이때쯤이면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어느 날 나는 그 책을 손에 들고 심호흡을 한 뒤 읽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시작한 책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였습니다. 온 동네 도서관을 다 뒤졌지만 모두 대출 중이라 미리 대출 예약을 해놓고 기다린 던 차에 연락을 받고 손에 넣은 책입니다. 대책 없이 쌓인 책의 더미 속에서 40여 년을 살아와서 인지 어느 때부턴가 나는 책을 먼저 읽고 난 후 그 책이 마음에 들면 그때서야 비로소 구입합니다. 마음에 든다는 것은 때로는 깊이 공감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두고두고 새롭게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이때의 구입은 ‘독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소유’하기 위한 것이고, 일단 소유하고 난 후에는 가끔씩 꺼내 들고 책장을 살살 넘기며 책을 쓰다듬어 보곤 합니다. 공감의 반추이거나 아직 알지 못하는 이 세상의 비밀에 대한 궁금증의 소환...둘 중 하나...어쩌면 책을 산다는 것은 책 속의 모든 것을 내 가슴속에 담고 싶다는 허망한 욕망에 무릎 꿇는 덧없는 소비행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사 모은 책이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페터 회)’, ‘당신 인생의 이야기(테드 창)’, ‘향모를 땋으며(로빈 월 키머러)’, ‘아버지의 해방일지(정지아)’, ‘삼체(류츠신)’ 입니다. 소장 목록은 짧고, 또 별로 신통치 않습니다만 뭐 어떻습니까? 젊은 날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라진 책의 목록은 바로 지금의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작은 표식 같기도 하네요. 하지만 앞으로는 책을 사는 일보다는 버리는 일에 집중해보려고 합니다. 아직도 무엇인가를 버리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 그래서 버리고 정리하는 일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야기가 곁길로 새 버렸네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정말 단숨에 읽어버렸습니다. 결코 단숨에 써 내려가지 못했을 그 책을 그렇게나 술술 읽어버렸다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재미있었습니다. 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역시 ‘재미’입니다. ‘이야기’는 나를 끌어들입니다. 아니 ‘재미있는 이야기’만이 나를 끌어들입니다. 나는 구식 사람입니다. 기-승-전-결의 과정을 사랑합니다. 이 책에는 무엇보다 글을 만들어내는 힘과 에너지가 가득했습니다. 작가가 무엇을 의도했던 그 의도가 진심이었다는 얘기죠. 


‘삶 그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아버지의 말씀, 아이는 충격에 빠집니다. 아이는 커서 어른이 되었지만 그녀가 경험하는 세상은 아버지의 말씀처럼 끝없는 혼돈만이 있을 뿐 무의미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방황과 자살 시도...아이는 이 혼돈 속 어딘가에는 존재할 의미를 찾는 모험에 몸을 던집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물고기 분류학자. 그의 작업은 혼돈과 우연으로 가득 찬 이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알려진 어류의 1/5 이상을 분류하여 이름을 달아준 사람이었죠. 저자에게 그는 단순한 학자이기보다는 자연의 무의미함, 무질서함에 저항하는 영웅이었습니다. 무질서를 뚫고 나가 물고기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고(분류) 계층적 구조를 확립해 나간다면 끝내는 저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존재, 어쩌면 신에게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저자는 그에게 매료되었고 그의 삶을 추적해 나갑니다. 여기서 이 책은 존경했던 한 학자의 삶의 여정을 따라가며 그가 실제로 일궈낸 위대한 학문적 업적, 그가 겪었던 숱한 고난과 그 극복의 드라마, 그의 열정과 기만, 위선, 죄악까지를 성실(?)하게 추적해 가는 스릴러 소설이 됩니다. 그러나 질서 정연한 세상을 구축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은 마침내 인간을 분류하고 서열을 매기는 ‘우생학’으로 옮겨지고 그 누구보다 자신의 우생학에 성실합니다. 그를 비롯한 우생학자들에 의해 광범위한 불임수술과 처형의 광란이 미국을 휩씁니다. 불임수술은 열등한 인간의 유전자를 소멸시키는 ‘정화작업’이며, 오염되어 무질서에 빠진 인류의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성스러운 소명이었던 것이지요. 긴 추적 끝에 삶의 무의미함에 빠져 비틀거리는 자신을 구원해 주리라 믿었던 그 위대한 학자의 모든 것을 알고 난 후 저자는 다시 한번 깊은 절망에 빠집니다. 세상은, 자연은 인간이 그것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어떠한 이름표를 달아주든 여전히 무질서한 혼돈입니다. 이런 자연의 본질에 맞서 자신이 믿는 질서를 강제로 만들어 보려는 인간의 욕망, 그 끝은 ‘의지’라 강변되는 자기기만, 광기였습니다. 


길고 집요했던 추적과 이가 갈리는 실망, 깊은 절망 끝에 그녀는 마침내 스스로를 구원할 깨달음에 도달합니다. 때로 무질서로 읽히는 자연의 복잡성과 그것을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합니다. 영웅은 자신의 의지를 자연에 부여하려는 덧없고 위험한 여정에 있는 것 아니라, 함께 살며 다른 존재들의 아픔과 슬픔을 치유해 주는 사랑과 헌신에 있음을 깊이 깨닫습니다. 글쓴이의 고통과 집착과 깨달음과 용서(그것이 나에 대한 용서이든 또는 남에 대한 용서이든...)의 과정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지는 바람에 몇몇 대목에서는 읽는 것을 멈추고 숨을 골라야 했습니다. 또 몇몇 대목에서는 눈물(같은 것)이 비어져 나와 잠시 먼 곳을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폭풍 같은 삶을 살았던 한 학자의 생은, 폭풍과도 같은 열정으로 그를 추적하는 다른 한 사람의 기자에 의해 결국은 미친바람이었으므로 판명 나지만, 그 폭풍 속으로 용감하게 걸어 들어갔던 저자는 이제 잔잔해진 미풍 속에서 평안을 얻을 준비를 마칩니다. ‘민들레 원칙’, 그것이 저자를 구원했던 깨달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민들레는 잡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 똑같은 식물이 훨씬 다양한 것일 수 있다. 약초 채집가에게 민들레는 약재이고 간을 해독하고 피부를 깨끗이 하며 눈을 건강하게 하는 해법이다. 화가에게 민들레는 염료이며 히피에게는 화관, 아이에게는 소원을 빌게 해주는 존재다. 나비에게는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며, 벌에게는 짝짓기를 하는 침대이고, 개미에게는 광활한 후각의 아틀라스에서 한 지점이 된다. (227~228P)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그토록 열심히 인식시키고자 애썼던 관점이다.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의 계층 구조에 매달리는 것은 더 큰 그림을, 자연의 “생명의 전체 조직”의 복잡다단한 진실을 놓치는 일이다. (228P,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 재인용) 


내게 중요한 것은 이 선언의 참된 의미가 이런 난해하지도 않은 단순한 ‘사실’, 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런 사실을 가슴 깊이 깨닫기까지, 그런 결론에 다시 한 번(나는 진화론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과학 전문 기자로서의 지식을 가지고 있던 저자가 처음부터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에 있는 것이지 이런 선언 자체에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한 편의 감동적인 ‘성장소설’을 읽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합니다. 요약 따위를 읽고 아는 척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평생을 바쳤던 조던의 영웅적인 노력은 ‘어류’라는 분류 카테고리가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다는 최근의 과학적 성과 앞에서 허무한 농담이 되는 듯합니다. 그래서 저자도 이 책의 제목을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정한 것이겠지요. 아이러니......그러나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여기서 나는 희미한 슬픔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물론 나도 그의 인간성과 정치적 선택이 명백하게 잘못되었고 용서받을 수 없을 만큼 비도덕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사실들과 무관하게 그의 학문적 노력이 완전히 무의미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류’ 또는 ‘이름 붙임’은 민들레 원칙으로 다가가기 위한 단단한 발판이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발판이 끝이자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의 잘못이지만 한 번도 그 발판을 밟아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과학적 사실을 무의미하다고 쫑알대는 모습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모든 학문적 성과를 진지하게 알아보지도 않고 비웃는 사람들, 자신의 게으름과 무능을 개성이나 자유분방함으로 수식하는 그런 세태에 대한 나의 소심한 반발입니다. 칸트를 소환해 봅니다.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고,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합니다. 



총 13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12번째 장이 바로 ‘민들레’입니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책을 덮으며 ‘민들레 법칙’이라는 용어를 가슴에 새겨 봅니다. 나는 갑자기 민들레가 어떤 꽃인지가 궁금해졌습니다.  


민들레는 모르기가 어려울 만큼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꽃입니다. 그만큼 우리들의 삶과 가까이 있는 식물이기도 하지요. 땅바닥에 방석처럼 붙어 나는 로제트잎, 노란색의 고운 꽃, 후우 불면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하얀 솜털 같은 열매...게다가 그 뿌리와 잎이 다양한 음식과 약으로 사용되기도 하지요. 민들레 샐러드, 민들레 김치, 민들레 장아찌, 민들레 잎 스튜, 민들레 술, 민들레 즙, 민들레 차 등등 아직까지도 많이 이용되고 있습니다. 쌉쌀한 민들레의 맛, 매력적입니다. 최근 들어서는 ‘서양민들레’의 침입으로 우리나라 토종 민들레가 점점 사라져 간다고 걱정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민들레와 서양민들레를 구분하는 방법도 널리 알려져 있지요. 민들레는 모인꽃싸개(총포) 조각이 뒤로 젖혀지지 않고 끝부분에 뿔처럼 생긴 작은 돌기가 있는 데 비해 서양민들레는 뒤로 젖혀지고 끝에 돌기가 거의 없는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3, 4번 사진) 


널리 알려진 민들레의 꽃 이야기는 이쯤 해서 끝내고 이제 민들레의 열매와 씨앗에 대해 알아보고 싶습니다. 

‘민들레 홀씨 되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어느새 내 마음 민들레 홀씨되어 강바람 타고 훨훨 네 곁으로 간다.’라는 가사로 끝나는 참 조용하고 좋은 노래입니다. 문제는 민들레는 홀씨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홀씨’란 흔히 ‘포자’라고 해서 균류나 선태식물, 양치식물의 생식세포를 가리키는데 민들레는 엄연한 속씨식물이므로 ‘홀씨’가 아니라 ‘씨앗’을 만들어 번식하는 식물인 것이지요.

솜으로 만든 공처럼 생긴 것이 사실은 민들레의 열매 덩어리이고 그 안에 또다시 작은 열매들이 들어있고 (서양민들레의 경우 약 100 여개의 열매가 모여서 이 풍선을 만든다고 하네요.) 그리고 그 열매 안에 씨앗이 들어있지요.            



여기서 잠깐! 열매는 무엇이며 씨는 또 무엇일까요?

씨는 속씨식물의 밑씨가 성숙한 것이지요. 열매는 씨방이나 그 외의 기관이 함께 성숙한 것이고요. 정말 중요한 것은 씨앗이고, 열매는 씨앗을 보호하고 멀리 퍼뜨리는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안다고 해도 민들레의 경우는 그것이 열매인지 씨앗인지 참 애매합니다. 이렇게 정리해 봅니다.

열매가 맞습니다. 민들레는 작은 꽃들이 여럿 모여 하나의 꽃을 만드는 머리모양 꽃차례를 가진 꽃이지만 대롱꽃은 없이 혀꽃 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중대가리풀의 설명을 참고하세요!) 바로 이 꽃의 밑씨와 씨방이 자라tj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위의 저 솜털공은 열매라고 해야 맞는 표현이 됩니다. 다만 민들레 열매의 독특한 모양은 암술대와 씨방 사이에 있는 '갓털'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 갓털은 열매와 함께 있는 씨앗을 멀리 날려 보내기 위한 장치입니다. 그래서 바람이 불면 열매 뭉치인 솜털공에서 열매가 하나씩 떨어져 나와 멀리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림으로 표현해 보았습니다. 




씨앗과 열매 이야기를 잠시 더 해볼까 합니다. 

애써서 씨앗을 만든 후에도 식물의 일은 끝난 게 아닙니다. 씨앗을 멀리 보내야 하는 일이 남아있습니다. 씨앗이 어미 곁에 떨어져 다음 해에 싹이 튼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좁은 구역의 한정된 자원을 놓고 어미와 자식이 치열하게 경쟁해야 합니다. 이때 먼저 자란 어미는 자식에게 큰 위협이 됩니다. 자원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면에서 어미가 자식보다는 월등하게 좋을 테니까요. 그래서 식물들은 기를 써서 씨앗을 멀리 보내려 합니다. 봉숭아처럼 씨앗을 튕겨내기, 야자처럼 물의 띄워 보내기, 민들레처럼 갓털을 붙여 바람에 띄워 보내기, 단풍처럼 프로펠러를 달아 날려 보내기, 도깨비바늘처럼 바늘을 만들어 짐승들의 몸에 붙여 이동시키기...그 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방법은 맛있는 열매를 만들어 새나 동물들에게 먹힌 후 그들의 배설활동을 이용해 씨앗을 멀리 보내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열매를 먹은 동물들은 멀리까지 이동합니다. 그들이 먹은 맛있는 열매 속에는 소중한 씨앗이 들어 있는데 이 씨앗들은 동물들의 위장 속에서도 견딜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심지어 참외 같은 과일은 씨앗을 둘러싼 부분을 더 달콤하게 만들되 약한 설사를 유발하는 물질과 함께 넣어둠으로써 참외를 먹은 동물은 빠른 시간 안에 배설을 하게 됩니다. 그 배설물과 함께 빠져나온 씨앗은 다음 해에 싹을 틔우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어린아이가 신기한 민들레의 솜털공을 들고 입으로 후후 불며 소원을 말할 때, 민들레 어미의 소원도 아이의 소원과 함께 하늘로 떠오르는 것입니다.

참, 여러 가지로 사랑스럽고 쓸모가 많은 멋진 식물입니다. 


참고로 사진 1, 2의 흰민들레는 민들레와의 다른 별도의 식물입니다. 그러나 꽃잎의 색이 희다는 점을 제외하면 토종 민들레와 큰 차이가 없어서 사진으로 소개해 봅니다. 



그나저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사야 할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좋다고 해도 이제는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도 버려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서요. 좀 더 고민해 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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