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대가리풀
얼마 전 백내장 수술을 받았습니다. 고도 근시로 늘 시력이 좋지 않았던 나는 세상이 어둡고 뿌연 것은 말하자면 삶의 기본 상태라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때때로 밝은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은 아마도 내가 보는 것보다는 훨씬 밝고 환할 것이라는 상상은 했었지요. 렌즈와 안경 덕분에 그럭저럭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운전도 하고 여행을 다니며 살아왔으니 그다지 서글픈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불편할 뿐이었지요. 살면서 불편한 점이 그것 하나만도 아니었는 데다가, 그나마 나의 뇌가 미약한 시각 신호를 잘 처리하여 세상의 모습을 그런대로 잘 그려주었으니 한편으로는 감사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 몇 년 사이 시야는 빠르게 흐려져 갔고 그에 따라 답답함도 커져갔습니다만 그저 늙어가는 탓이라고만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생각해 보니 눈에 늘 안개가 낀 듯하고 답답한 것이 혹시 백내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용기를 내어 안과 몇 군데를 돌며 진단을 받아 본 결과 의사 선생님들 모두를 놀라게 하고야 말았습니다. ‘이 눈으로 어떻게 사셨어요?’ 사실 난 무척 반가웠습니다. 앗싸, 이번 기회에 근시까지 교정해 보자!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책을 읽을 때는 돋보기가 보조로 필요하기는 하지만 이제 나는 안경이나 렌즈 없이도 외출을 하고 티브이를 볼 수 있습니다. 살다 보니 이런 멋진 일도 생기네요. 현대 의학 기술과 더불어 나의 생활 패턴까지 고려하여 적절한 도수를 맞춰 수술을 잘해 주신 의사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한참 동안은 백내장 수술의 후유증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밝아진 눈이 집안에 떨어진 머리카락과 먼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바람에 몇 주 돌돌이(나는 집안에서 청소기 대신 이것을 사용합니다.)를 손에 들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더럽게 하고 살았었나? 부끄럽기도 하고 짜증도 나고...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지요. 곧 익숙해졌습니다. 특히 한밤중 아파트 단지 앞 빈터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에 총총 박힌 별들과 보름달이 뜬 밤 거실 창으로 보이는 깨끗하고 무구해 보이는 달... 세상은 말 그대로 선물 상자였고 새롭게 얻은 내 눈은 그 상자를 여는 열쇠였습니다.
거리로 나섭니다. 놀라우리만큼 선명하고 비 온 뒤처럼 깨끗하게 보이는 세상이 아름답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다 이번에는 땅을 내려다봅니다. 어머나! 보도블록의 좁은 틈새에도 파릇파릇한 식물들이 피어나 있네요. 때마침 장마철이라서인지 이끼인양, 융단인양 온통 크랙을 채운 식물이 이제는 밝아진 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숱하게 스쳐 지나가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눈길을 준 적 없었던 꽃, ‘중대가리풀’을 만났습니다.
몇 년 전 제주도에 갔을 때 나무에 핀 꽃이 너무 예뻐서 같이 간 지인에게 ‘저 나무 이름이 뭐예요?’라고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아, 중대가리나무예요!’ ‘네???’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저렇게 어여쁜 꽃이 피는 나무가 중대가리라고? 중머리도 스님머리도 아닌 중대가리라니 웬만큼 점잖지 못한 꽃이름(며느리밑씻개, 소경불알, 개불알풀, 미치광이풀, 도둑놈의갈고리, 기생꽃 등등)에도 그러려니 했던 내게도 그 이름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다행히 얼마 전 중대가리나무는 ‘구슬꽃나무’라는 예쁜 이름으로 개명했다니 이름과 꽃의 모양이 잘 어울리는 듯하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에는 중대가리풀입니다. 거 참 이름하고는... 형평성을 따진다면 이 풀의 이름도 구슬꽃풀이라고 바꿔야 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구슬꽃나무에 비해 볼품없고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이 식물을 위해 개명운동을 펼친 사람은 없었나 봅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 지에 대해서는 특이한 생김새의 꽃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세 번째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머리카락을 밀고 난 후 며칠 지나 비쭉비쭉 자라 나오는 사내아이의 머리털이 연상되지 않으신가요? 여러 번 부르다 보니 이 꽃의 소박한 모습 때문인지 구슬꽃풀보다는 스님들께는 죄송하지만 그냥 중대가리풀이 더욱 직관적이고 심지어는 더 정겹게도 느껴집니다.
사실 작고 작아 보도블록의 갈라진 틈에 이끼처럼 자라나는 모습을 보며 이것이 꽃을 피우는 식물이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단 한번 눈에 띄면 이제는 걷는 발걸음마다 이 작은 식물이 갈라진 그 틈새를 빈틈없이 메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주 어릴 때에는 진짜 이끼처럼 보이다가 차츰 자라남에 따라 한 5cm 정도로 키를 키우기도 합니다. 이때쯤 되면 제법 식물(?) 같아 보이기도 하지요. 중대가리풀만이 아니라 매우 작고 눈길을 잡아끄는 화려함이나 어여쁨을 가지지는 못했으나 우리가 ‘잡초’라 부르는 도심의 식물들을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크랙 정원’이라는 개념을 떠올렸고, 이들이 만들어내는 ‘크랙 가든(Crack Garden)’이야말로 삭막한 도시의 인상과 나의 일상을 바꾸는 참된 ‘정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정원은 내가 애써 가꿀 필요도 없습니다. 절로 나서 절로 크고 절로 꽃을 피운 후 절로 씨앗을 만들고 다음 해 다시 크랙을 메웁니다. 나는 다만 가만히 들여다보고, 즐기고 가끔씩 ‘네가 있어서 난 참 좋구나!’라고 말을 건네기만 하면 됩니다. 백내장 수술이 가져온 기쁨은 이렇게 하여 큰 행복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식물이 가장 먼저 내 눈에 띄게 된 계기는 그 특이한 잎사귀의 모양이었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꽃은 하도 작아서 눈에 보이지도 않았지요. 도감을 찾아보고 나서야 비로소 꽃을 열심히 찾아봅니다. 네 그렇습니다. 열심히 찾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병 닦는 방망이에 달린 솔처럼 생긴 저 꽃 말입니다.
여기서 잠시 재미없는 설명을 하고 가겠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확인해야 할 사항이니까요.
중대가리풀은 ‘국화과’의 식물입니다.
국화과 식물들의 꽃차례를 ‘머리모양꽃차례(두상화서)’라고 합니다.
머리모양꽃차례는 ‘대롱꽃(관상화)’과 ‘혀꽃(설상화)’ 여러 개가 모여 하나의 꽃 모양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꽃싸개 조각(총포 조각)’으로 이루어진 ‘꽃싸개(총포)’가 감싸서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말로 설명하려니 제법 복잡하게 느껴지지만 그림으로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국립수목원에서 제공하는 '알기 쉽게 정리한 식물 용어'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
전형적인 머리모양꽃차례를 가진 꽃을 소개해 봅니다. '키큰산국'이라는 식물입니다.
가운데 대롱꽃을 빼곡하게 두고 가장자리를 혀꽃들이 장식하고 있는 모양이지요. 우리들이 흔히 들국화라고 하는 종류의 꽃들은 대체로 이런 모양을 하고 있지요.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대롱꽃이나 혀꽃들이 하나하나 개별적인 꽃이라는 점입니다. 다만 혀꽃은 암술만 가진 단성화 암꽃인데 반해 대롱꽃은 암술과 수술을 모두 가진 양성화입니다. 그러나 국화과의 꽃이라 해서 모두 이 두 가지 종류의 꽃을 다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뻐꾹채, 조뱅이, 지칭개, 엉겅퀴 등처럼 혀꽃이 없이 대롱꽃만 있는 꽃도 있고 반면 고들빼기, 뽀리뱅이, 씀바귀, 쇠채처럼 혀꽃만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엉겅퀴'의 꽃입니다.
대롱꽃만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그리고 그 대롱꽃 하나하나가 한 송이의 꽃이라는 점이 이해되시나요?
그렇다면 이제 중대가리풀의 꽃을 설명할 수 있겠지요? 네 그렇습니다. 이 꽃은 혀꽃 없이 대롱꽃 만으로 이루어진 국화과의 꽃입니다. 다만 사진으로 볼 때 꽃 가운데가 붉게 보여 그것이 꽃술이 아닌가 착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특이하게도 머리모양꽃 가장자리에는 암꽃(녹색이지요.)이 있고, 가운데에 양성꽃이 있는데 이 양성꽃은 꽃부리 끝이 4개로 갈라지고 그 안에 암술과 4개의 수술이 있어 붉은색(아마도 꽃부리가 벌어지기 전의 색이 아닐까 합니다.)과 꽃부리가 벌어진 후 모습을 드러내는 꽃가루의 노란색이 어울려 보이는 것입니다. 마지막 사진을 자세히 보면 이해가 쉬울 것 같네요. 참고로 이렇게 암술이 많다는 것은 씨앗을 많이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고, 이 사실은 중대가리풀의 엄청난 번식력을 잘 설명해 주고 있네요.
다양한 진화의 모습이 경이롭습니다.
국화과의 꽃들은 작은 꽃들이 모인 집합체입니다. 한 송이의 작은 꽃으로는 곤충들을 유혹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던 것일까요? 확실히 이렇게 자잘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꽃들도 함께 모여 피니 화려하고 아름다워서 눈에 잘 띄네요. 역할 분담에 따른 협업, 공동체를 위한 자기희생은 인간 사회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국화과 식물들의 이러한 생존전략은 꽤나 효과적이었는지 오늘날 국화과 식물들은 속씨식물 중 가장 큰 식물군인 난초과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가족(23,000여 종)을 이루고 있을 정도로 전 지구상에 널리 퍼져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난초과 식물이 백합강(외떡잎식물)에 속하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목련강(쌍떡잎식물)에 속하는 식물들 중에서는 최강자라고 할 수 있겠네요.
다음으로는 그 요상하고 사뭇 민망한 이름에 대해 잠시 생각해 봅니다.
최근 들어 아름답지 못한 꽃이름을 바꾸자는 논의들이 분주하고 실제로 공인되지 않은 이름을 쓰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는 듯합니다. 엄격한 명명규칙을 따르는 세계 공통의 ‘학명’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아무리 국명이라 해도 엄연히 ‘국가생물종목록’(국립생물자원관)이나 ‘국가표준식물목록’(국립수목원)에서 제시하는 표준 이름이 있는데 합의되지 않은 이름을 쓰는 것이 조금은 어색하게 생각됩니다.
식물을 보고 이름을 알고 싶은 마음은 그 존재에 대한 관심의 시작이고 애정의 토대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때로는 어렵게 식물의 이름을 알고 난 뒤, 특히 점잖지 못하거나 두드러지게 이상한 이름을 들으면 우선적으로 드는 생각은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입니다. 이 질문을 다른 말로 바꿔보면 '이런 이름이 어떻게 당시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고 널리 받아들여졌을까?'입니다. 이것 자체가 방대한 연구 주제이므로 저는 그저 연구자들의 결과물을 조금씩 훔쳐볼 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일반 민중들에게 수용되지 못했다면 그런 이름들이 널리 쓰이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의 기준에서 그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하여 바로 개명하려는 것은 좀 신중하지 못한 일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모든 이름에는 역사적, 사회적 ‘맥락’이 있고, 그 맥락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인문학적 상상력을 필요로 합니다. 조금 더 신중하게, 한 걸음씩 나아가는 지혜가 요구되는 이유입니다.
각 나라마다 식물 이름이 다르게 붙여졌다는 것은 생명, 식물 세계에 대한 사람들의 감각이 그만큼 다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단순히 언어의 차이에서 오는 다름이 아니라 식물을 보는 시각의 차이, 즉 그 식물의 어디가 가장 강한 인상을 주는지, 그 식물의 무엇이 그들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되었는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는 이해가 어렵지만 또 어떤 경우는 ‘아하, 정말 잘 지어진 이름이구나!'라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애기물꽈리아재비’라는 이름을 가진 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꽃의 영어 이름은 'Tender monkey-flower'입니다. 으음~~ 원숭이?
위쪽 사진을 보면 그 영어 이름이 도통 이해되질 않습니다. 그러나 아래쪽 접사한 사진을 보니 내 눈에는 이빨 빠진 귀여운 아가가 활짝 웃는 얼굴이 보이는데 그래도 왜 원숭이라고 했는지가 조금은 이해됩니다. 물론 내 생각입니다.
학명과는 다른, 국명의 자유로운 상상력... 그 자체가 민중들의 삶이고, 그들의 민주적 감성이 아닐까도 생각합니다. 어느 서양 여인에게는 ‘비너스의 슬리퍼’이지만 우리 선조들에게는 ‘개불알꽃’으로 보였을 수 있지요. 비너스의 슬리퍼가 더 우아한 이름일까요? 우리 기준으로 보면 비너스라는 여신, 참 칠칠치 못하지요. 그녀가 침실에서 신었던 슬리퍼라니, 우리의 감성으로는 그 자체가 낯설기도 하지만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은 사람들에게는 자칫 민망한 상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한 때는 개불알꽃이었으나 이제는 개명한 복주머니란의 모습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보이시나요?
식물의 ‘개명’, 조금 더 신중하게 진행했으면 좋겠습니다. 개명의 과정에서 우리가 잃어버리는 그 무엇인가가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고, 또 그 상실은 현재진행형이 아닐까요?
중대가리풀, 그렇습니다. 하필 그런 이름이 붙다니 속이 상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좀 더 기다려 봅니다. 그 이름에 붙은 사연을 온전히 알게 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