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들빼기와 노랑선씀바귀
<고들빼기>
<노랑선씀바귀>
5월이 가고 오늘부터는 6월입니다. 달력으로 계절을 가늠하자면 봄이 가고 여름이 온 셈이네요.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어제와 다름없이 조용합니다.
이즈음 도시의 거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꽃을 단연 ‘고들빼기’와 ‘노랑선씀바귀’입니다. 우선은 둘 다 일반적인 봄꽃들에 비해 그 크기가 큰 편에 속합니다. 그리고 둘 다 화사한 노란색이라 보지 못한 척하고 지나가기에는 그 존재감이 크네요.
씀바귀나물, 더구나 노랑선씀바귀나물은 먹어 본 기억도, 내가 직접 만들었던 기억도 없지만 고들빼기김치에 대해서는 숨겨놓은 일화가 있습니다.
몇 년 전 고들빼기김치 만들기에 도전해 볼 요량으로 길에서 나물을 팔고 계시는 할머니도 도와 드릴 겸 고들빼기를 산 적이 있습니다. 인터넷을 뒤져 김치 담그는 방법을 상세히 읽은 후 담가 봤는데, 오호 애제라! 질기고 써서 먹지 못하고 몽땅 버린 기억이 생생합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식재료 자체가 좋지 않았을 수도 있고, 소금물에 담가둔 시간이 짧았을 수도 있겠지요. 이유가 무엇이었든 그 이후 나는 고들빼기김치 담그기에서 발을 빼고 다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먹어본 고들빼기김치의 그 독특하고 쌉쌀한 맛의 기억까지 지울 수는 없었기에 길에서 자주 마주치게 되는 이 꽃을 보면 그때의 기억이 슬그머니 소환되곤 합니다.
먼저 꽃 이야기를 살짝 해 봅니다.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나는 봄 거리에서 그저 노란색의 꽃이거니 하며 무심히 지나치기 십상이지만, 사실 조금만 눈여겨본다면 이 두 꽃은 외모부터 뚜렷하게 구분됩니다. 그래서 굳이 이 두 꽃의 구분법을 설명하는 것이 쑥쓰럽기는 하지만 이왕 두 꽃의 이야기를 하기로 했으니 계속해 보겠습니다.
고들빼기는 가지가 많이 갈라져서 조금 어수선하게 보입니다. 게다가 꽃이나 잎의 크기는 고들빼기 쪽이 상대적으로 작은데 비해 반대로 꽃의 개수는 많다 보니 좀 더 오밀조밀하게 느껴지지요. 노랑선씀바귀는 꽃도 크고 잎은 피침형 (벋음씀바귀 항목 참조) 또는 타원형이어서 제법 화사한 모습으로 피어나 있습니다. 느낌을 위주로 얘기를 하다 보니 어쩐지 뜬 구름 잡는 듯한 이야기가 되네요. 사진을 참조해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한걸음 더 들어가 봅니다.
가장 크고도 간단한 구분법은 바로 그 잎의 모양입니다.
고들빼기의 잎 모양은 긴 타원형 달걀 모양인데, 잎의 가장자리에는 불규칙하고 날카로운 톱니가 있습니다. 이에 비해 노랑선씀바귀의 잎은 상대적으로 가늘고 길쭉한 피침형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결정적인 차이는 잎이 줄기에 달린 모양입니다.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고들빼기의 잎은 잎의 밑부분이 넓어지면서 줄기를 완전히 감싸는 모양이 됩니다. 그러다 보니 얼핏 줄기가 잎을 뚫고 나오는 모양새입니다. 이에 비해 노랑선씀바귀는 잎밑이 거의 알아보기 힘들 만큼만 살짝 줄기를 감싸고 있습니다. 그래서 얼핏 보면 여느 식물들의 줄기잎과의 특별한 차이를 느끼지 못하지요. 이 정도만 알아두면 고들빼기와 노랑선씀바귀를 혼동할 일은 절대 없을 것 같네요.
참고로 내가 씀바귀가 아니라 굳이 노랑선씀바귀를 다루고 있는 이유는 씀바귀는 주로 산 속에서 자라는 식물이기 때문에 나의 크랙 정원에서는 만나지 못한 탓입니다. 참고로 내용을 보태 본다면 씀바귀는 혀꽃의 수가 5~11개로 적은 데 비해 노랑선씀바귀는 훨씬 더 많은 수의 혀꽃을 달고 있습니다.
글머리에서 보여드린 사진을 보며 또 다른 차이점을 발견하셨는지요? 네, 바로 꽃술의 색입니다. 고들빼기의 꽃술은 노란색인데 비해 노랑선씀바귀의 꽃술은 짙은 색이라서 더욱 시선을 끌어당깁니다.
두 꽃 모두 국화과의 꽃이라는 건 이미 눈치채셨겠지요?
대롱꽃 없이 혀꽃으로만 이루어진 머리모양꽃차례를 가진 국화과 식물입니다. 당연히 꽃이 진 후에는 그 열매에서 흰색의 갓털을 볼 수 있습니다. 아래의 사진은 조금 일찍 피어나 이미 열매를 달고 있는 고들빼기의 모습입니다. 꽃도 좋지만 꽃이 지고 난 후 식물의 이런 모습도 참 좋습니다. 참고로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줄기를 감싸고 있는 고들빼기 잎의 모습도 아래의 사진에서 보다 또렷하게 드러나네요.
이 두 식물의 공통점 중에서 우리의 생활과 관계가 깊은 것은 이들이 가진 ‘쓴맛’ 일 듯합니다.
‘맛(미각)’, ‘맛을 느낀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인간들에게 단순히 배를 채우고 배고픔을 달래는 것이 전부였던 시절 복잡한 숲의 생태계 속에서 알맞은 먹을거리를 찾는 일, 그때 가장 중요한 감각은 아마도 시각과 후각이 아니었을까요? 사실 이 경우 ‘맛’이라는 것은 음식을 먹고 난 후 부차적으로 주어지는 감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포유류’이기에 이러한 사정은 바뀌게 됩니다. 왜냐하면 상당 기간 어미의 젖에 의존해서 살아야 하는 신생아들에게 먹거리를 찾기 위해 필요한 시각과 후각보다는 오히려 어미의 젖이 주는 달콤하고 고소한 맛을 감별해 내고 그것을 느끼게 해주는 미각이 오히려 더 중요해진 것이지요. ‘미각’이 중요하게 되자 맛의 범위도 점차 단맛, 짠맛, 신맛, 감칠맛 그리고 쓴맛 등 다양한 영역으로 넓혀져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일반적인 맛을 느끼는 것과 쓴맛을 느끼는 기능에는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음도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어 단맛은 그 음식물이 먹을 수 있고 게다가 맛있으며 아주 좋은 에너지원이 된다는 사실을, 신맛은 그 음식물이 덜 익어 맛이 조금 떨어지는 과일임을, 감칠맛은 그것이 대단히 맛있고 영양가 높은 음식임을 의미하지요. 보다 맛있고 질 좋은 먹거리를 찾을 수 있게 하는 감각이라 할 수 있겠네요. 그러나 쓴맛은 기본적으로 독성물질이 몸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일종의 경보시스템입니다. 생존 자체와 밀접하게 연관된, 매우 중요한 감각이지요.
인간이 이처럼 쓴맛을 느끼게 된 것은 식물의 진화와도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염성 미생물이나 자신을 먹어치우는 동물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식물들은 실로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독소를 만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대개 독소들은 쓴맛을 냅니다. 인간들에게는 이렇게 다양하고 많은 종류의 독소를 감별해 내기 위해 다른 맛보다도 쓴맛에 대한 민감도를 높여야 할 필요성이 컸을 것입니다. 쓴맛이 그 음식이 독을 가지고 있거나 썩었음을 알려주는 지표라면, 쓴맛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그리고 민감하게 느낄 수 있는 능력은 생존가능성을 높이는 아주 중요한 기능이 되지요. 그러기에 우리 인간이 느끼는 쓴맛의 스펙트럼은 다른 맛에 비해 아주 넓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쓴맛이 다른 맛과 결합했을 때 쓴맛 하나를 맛볼 때와는 아주 다른 좋은 맛이 생길 수 있음을 경험적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커피의 쓴맛, 초콜릿의 쓴맛, 술의 쓴맛... 나아가 나물의 씁쓰레한 맛까지 즐기게 되었습니다. 쓴맛에 대한 민감도를 조절하는 인간의 능력이 놀랍습니다. 고들빼기김치나 씀바귀나물도 이러한 인간 미각의 유연함 때문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된 것 아닐까 생각하게 되네요. 생존에 필요한 음식이라는 한계를 넘어 소위 기호식품으로의 ‘맛의 확장’ 말입니다. 사실 이 두 가지 식물의 나물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나물에서도 쓴맛이 느껴집니다. 취나물, 고사리나물, 두릅순나물, 머위나물 등등. 그리고 이런 나물들에서 맛볼 수 있는 쓴맛은 단맛 못지않게 입맛을 돋우는 보물입니다. 아이 때는 좋아하지 않지만 나이가 들면서 이런 나물들을 좋아하게 되는 것도 쓴맛에 대한 단순한 본능적 회피에서 벗어나, 그것을 다양하게 결합하고 적절하게 이용할 때의 독특한 맛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덕분에 우리들의 밥상은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역시 인간은 본능적으로 쓴맛을 기피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쓰다’라는 표현은 싫은 것, 고통스러운 것을 의미하지요. ‘인생의 쓴맛을 보았다.’라든가 남을 협박할 때 ‘쓴맛을 보여주겠다.’라고 하거나, 듣기 싫은 조언을 가리키는 말로 ‘쓴 소리를 하다.’ 등의 표현을 씁니다. 특히 마지막 표현은 쓴맛이 가지는 이중성, 즉 약으로서의 효용성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몸에는 좋은 약이 입에는 쓰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봄날 이처럼 풍성하게 피어나는 고들빼기나 씀바귀로 나물을 무쳐 드시면서 우리의 선조들께서는 춥고 길었던 겨울 동안 잃어버린 입맛을 돋우어 체력을 비축하고, 동시에 우리들에게 닥쳐올 수많은 시련들을 마주할 준비를 하셨던 것 아닐까요? 나물의 씁쓰레한 맛으로 인생의 쓴맛들에 대해 미리 대비하는 예방접종을 하고 계셨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삶이 늘 달콤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너무도 충분히 알게 된 나이입니다. 지금 마주한 삶의 쓴맛을 인생의 도정에서 맛보았던 달콤한 맛과 조화롭게 버무려 힘든 시간을 버텨나가는 지혜가 내게 꼭 필요한 시간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