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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미신을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정은 믿어요.

by 마른틈

나이를 먹는 일은 제법 근사한 일이다. 이맘때면 습관처럼 장난처럼 “또 나이를 먹는다”며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흘러나오지만, 나는 한 해를 보내며 아주 조금씩 늙어가는 일이 꽤 멋지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전히 덜 자란 내면 어딘가에는 웅크려 울고 있는 내가 있고, 못생긴 마음을 회피하고 싶은 비정한 내가 있으며, 그저 살아내기 위해 움직이던 삭막한 나도 숨을 쉬고 있다. 하여 아직도 스무 살 어디쯤 머문 채, 나이를 다 먹지 못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그럼에도 그 고단했던 모든 나를 이고 지며 오늘날까지 늙어온 내가 멋있다. 그리고 며칠 뒤 또 한 번 늙을 예정이지만, 그것 역시 두렵지 않다.

나이를 먹는 것이 슬픈 일이라면, 매해 생일마다 그리 요란하게 축하하지도 말아야지. 신년의 입장에서 생일만 축하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썩 억울한 일이다.


나는 미신을 믿지 않는 편이지만, 마음이 복잡할 때면 아주 가끔ㅡ서너 달에 한 번쯤ㅡ남몰래 인터넷 사주를 본다.

그 시작은 우습게도 어떤 온라인 게임에서 비롯되었다. 그 게임은 강화를 한 번 시도할 때마다 내 돈을 못되게도 빨아갔다. 어느 날은 치킨값을, 또 어떤 날은 족발값을, 그다음 날은 갈비찜값을 야무지게 훔쳐 갔다. 열이 받은 나는 지인에게 ‘용하다’며 추천받은 운세 사이트에서 재물운이 아주 높다는 날을 골라 반신반의하며 갈비찜값을 다시 넣고 시도했으렷다. 그랬더니 자기주장이 강한 1%대의 확률을 손쉽게 뚫고 성공해 버린 것이다.


‘어? 이게 되네?’


의심이 많은 나는 그 뒤로도 몇 번이고 같은 날에 같은 시도를 했고, 늘 결괏값이 괜찮았다. 그러니 언젠가부터 마음이 복잡하거나, 중요한 일을 앞두었을 때쯤이면 그 운세 사이트가 불현듯 떠오르게 되어버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미신을 믿지 않는다.)

그러니 운세를 보기에 이보다 적절한 타이밍도 없지 않겠나. 요즘의 나는 썩 고단한 마음을 부여잡고 버티는 중이고, 마침 신년도 코앞이다.



‘마른틈님의 2025년 12월 운세


절대 서둘러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앞선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소소한 문제가 많이 발생하는 달입니다. 근심이 생기고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것입니다. 하지만 직접 나서서 부딪혀야 합니다. 지금이 힘들다는 것은 후 일이 좋다는 의미입니다. 이번 달은 마음의 위안을 찾는다거나 나약해지는 생각이 많이 들 것입니다. 실수는 실수로 넘겨야 합니다. 이번 달에 모든 것을 만회하려 하지 말고 조금만 시간을 가지세요. 다음의 기회를 노리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될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가까운 사람으로 인하여 마음고생하거나 이성 문제로 고민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풀리기 어려운 일입니다. 다툼도 큰 오해로 번질 것이니 이번 달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상대만 배려하는 시기로 삼아야 합니다. 스스로 낮추지 않으면 좋은 관계가 성립되기 어렵습니다.

기운이 다소 부족한 달입니다. 적극적인 활용보다는 신중함을 필요로 하는 분야가 더욱 많습니다. 활용도 경계도 항상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우와… 정말 단 한 문장도 틀린 말이 없네….

누차 말하지만, 나는 미신을 믿지 않는다. 어디, 1월도 한번 볼까.



‘마른틈님의 2026년 1월 운세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로 고민이 많은 시기입니다. 마음을 잡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하는 시기군요. 누구를 탓할 수도 없으니 억울하게도 실없는 사람이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주의가 필요한 시기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앞선 의욕이나 선의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시기이니 이번 달은 감정을 죽이고 편안하게 쉬어가는 시기로 삼으셔야 합니다.

무언가를 바라거나 크게 기대한 것들이 있다면 기대한 정도의 흐름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 나에게 도움이 될 정도의 흐름은 못됩니다.’


우와… 나는 신년에도 썩 평탄치 못한가 보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불 속성 인간이고, 2026년은 불의 기운이 아주 강한 병오년이다. 불은 표현과 창조를 의미하며 말과 글, 창작적 표현에 두드러진 성향을 가진 나ㅡ사주에서 그렇게 말했다ㅡ는 2026년과 궁합이 아주 좋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말한다. 나는 정말로 미신을 믿지 않는다.


성인 이후 대체로 큰 변화 없이 무난한 매해를 살아왔던 내게 올해는 굉장히 변화무쌍한 해였다.

소소하게는 평생 들여다보지 않던 ‘교양’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다지 거창한 이유는 아니다. 나는 늘 손에 소일거리ㅡ뜨개질이나 글쓰기 같은ㅡ를 쥐고 지내는 편이고, 적막을 싫어해 백색소음이 필요했다. 몇 년을 쌓아둔 각종 OTT의 드라마나 예능프로그램은 이미 다 섭렵하고 말았으니, 남은 건 교양·시사뿐이었다. 으….

그렇게 몇 시간쯤 텔레비전을 틀어두다 보면, 굳이 집중하지 않아도 머릿속에 남는 것들이 생긴다. 완전한 이해는 아니지만, 어떤 여운과 안타까움 같은 것들이다.

예를 들면 모든 안전 수칙이 피로 쓰였다는 수많은 실례들, 단 한 명의 대학생 친구를 간절히 바라던 전태일 열사가 주장한 노동의 가치라던가, 군사독재 시절 국가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힘없는 국민들이 얼마나 참담하게 스러져 갔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혹은 그들이 활개를 치던 때, 나는 너무 어렸던 터라 이름만 희미하게 남은 잔혹한 살인마들의 수법 같은 것들. 그리고 가해자가 있다면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 피해자이니, 살아남은 이들과 그 유족들이 얼마나 긴 고통의 시간을 견뎌야 했는지 같은 이야기들 말이다.


사실 나는 역사나 기초상식에 큰 관심을 두고 살아온 사람은 아니다. 그저 평범만, 중간만 하면 된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을 오래 틀어두다 보면 가끔의 날에는 변덕처럼 관심 없던 퀴즈프로그램까지 손이 간다. 물론 내 기억력은 휘발성이 강해 열 개의 문제 중 아홉 개는 잊어버릴 것이다. 그래도 단 하나의 상식이라도 기억 저편 어딘가에 남는다면 유의미한 소득일 테다.

얼마 전에는 무려 과학 예능 프로그램에 호기롭게 도전했다가, 프롤로그부터 들이닥친 ‘양자역학’의 정의에 ‘뒤로 가기’ 버튼으로 항복해 버렸다. 하지만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달라지니 삼십 년 만에 처음으로 그런 프로그램을 틀어 볼 용기 또한 생긴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십 년 후의 나는 그 방송을 끝까지 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충분히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가장 큰 변화는 아무래도,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겠지. 이 매거진에서 ‘글을 쓰며 달라진 나’에 대해 쓰는 당신들의 이야기를 많이 보아왔지만, 나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무래도 영 쑥스러웠다.


언제나 그렇듯 사람은 곱고 예쁘게 늙어야 한다. 단지 외적인 모습만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월이 흘러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나는 것은 결국 심보일 테니, 곱게 쓴 마음이 예쁜 얼굴로 늙는 것은 일맥상통할 수밖에 없다.

나는 아주 오랜 시간 못돼 처먹은 인간이었다. 타인의 기쁨에 배 아파하고, 그들의 고난에 안도하며, 타자의 슬픔에 공감하지 못했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그리 살지 않으리라 결심한 것이 고작 일 년 남짓이다.

삼십 년을 관통해 온 습관은 관성과도 같으니, 나는 여전히 가끔씩 지독히 이기적이고 못돼 처먹는다. 이제는 그럴싸하게 다정한 척 굴 줄 알면서도 스스로 이기적이라 끊임없이 되뇌는 이유다. 잊지 말라고. 네 본성은 이따위니, 단 한순간도 방심하지 말라고.


나는 원래 국어에 관심이 많았고, 글을 쓰다 보니 단어와 표현의 폭도 비교적 넓은 편이다. 그렇다 보니 대화를 나누다 문득, 내게는 익숙하고 흔한 표현들이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들이 있다.

아마 예전의 이기적인 나는 그것을 ‘상식의 부재’라며 상대의 탓으로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올해 들어 바뀐 나의 관점은 이렇다. 상대가 잘 알아듣게 말하는 것 또한 지능의 영역이라는 것. 돌고 돌아 또 지독한 자기 검열이지만, 글을 쓰며 특히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이런 태도들이라 여긴다. 나르시시즘, 선민의식, 혹은 글을 좀 쓴다는 이유로 괜히 꺼드럭 대지 않는 것.


물론 글을 쓰는 일은 좋은 일이다. 내겐 아주 오랜 꿈이기도 했으니 썩 괜찮은 자아실현의 수단이기도 하다. 그런데 글을 쓰며 내 삶이 긍정적으로 변했냐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보통은 글을 쓰면서 ‘몰랐던 나를 발견하고, 더 사랑하게 된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글을 쓰기 전의 나를 더 사랑했다. 펜을 다시 잡은 고작 육 개월 동안, 나는 몇 번이고 주저앉아 울었다. 오히려 나약한 내가 너무 싫어졌다.

물론 그것이 전적으로 글 때문은 아니다. 그저 재수 없게도 타이밍이 겹쳤을 뿐이고, 감정의 단층을 갈가리 헤집는 과정에서 조금 더 깊이 침잠했을 뿐이다. 어쩌면 그마저 하지 않았다면 끝내 버티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래도 시기가 너무 시의적절했던 탓에 원망스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 마음을 평소 무척 의지하던 작가님에게 털어놓았을 때,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것들을 마주해야 이겨낼 용기가 생긴다고 믿어요. 지금 좌절하고 있는 건 그 일들을 정면으로 마주했다는 신호일 거예요. 잘하고 있어요”


나는 그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그럴까. 나는 회피하지 않고 마주하느라 이렇게 아프고 힘든 걸까. 내가 정말 이겨내고 있는 걸까. 그랬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생각했다.


올해 나는 악착같이 글을 썼다. 처음에는 취미처럼, 근래에는 쓰지 않으면 곧 죽을 것처럼. 작가님은 사십 년 인생에서 목표를 위해 미친 듯이 몰두하며 살아본 것이 딱 세 번째라 했다. 그러고 나니 요즘 들어 그 고단했던 인생에 아주 조금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고도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내 삼십 년 인생에서 이토록 독하게 굴어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그래서 나는 이기적인 인간답게 조금만 요령을 바라기로 했다. 세 번째 말고, 두 번 만에 조금 숨통이 트였으면 좋겠다고.


나는 글을 쓰며 다정해지는 법을 배우고 있다. 때때로 타인의 다정한 삶을 읽으며 따라하고 그것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한다. 내 글 속의 '나'는 언제나 조금 허술하고 서툴지만, 다정해지기 위해 애쓴다. 나는 그 속의 내가 꽤 마음에 든다. 그래서 그 인간이 글 속에만 머물지 않기를 바란다. 그 인간이 실제의 삶에도 존재하려면 아주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물론 내 감정을 살피는 것조차 벅찬 날에는 여전히 상대의 감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쏘아대다가 잠 못 이루는 밤에 뒤척이기 일쑤다. 그럼에도 진심이 닿길 바라며 건네는 것이 있다. 예컨대 뒤늦은 위로가 머쓱해 쥐어주는 책에는 나를 버티게 한 문장들에 포스트잇으로 강조가 되어 있겠지.


연말이 오고, 새해가 다가오면 나는 늘 괜찮은 내년을 바랐다. 순탄한 내년이 되길. 조금 더 쉽고 빠른 길이 열리길. 그래서 ''가 조금 더 잘되길. 그렇게 ‘나’의 평안과 안정을 바랐다.

하지만 이번 연말에는 조금 다른 소망을 품는다. 내가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되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길. 조금 더 다정한 사람이 되길. 그리하여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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