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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되지 못했지만, 박제는 되었다

2025 연말결산, 사랑하는 내 글들에게

by 설애

2025년, 나는 <경성탐정 이상>을 읽으며 새해를 맞았다. ‘박제가 된 천재’ 이상이 경성에서 탐정으로 활약하는 소설이었다. 이 소설의 리뷰로 나는 브런치를 시작했다.
묘하게도 얼마 전, 시인 박인환의 묘비명에 대해 쓰며 다시 이상을 찾게 되었다. 박인환은 이상의 기일에 맞추어 삼 일간 폭음한 뒤, 이상에 대한 시를 마지막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그렇게 2025년의 시작과 끝이 이상에게 닿아 있었다.


올해를 돌아보면, 역시 브런치에 가입한 일이 가장 크다. 다른 곳에서 서평을 꾸준히 쓰긴 했지만, 회사에서 필요한 공부를 하느라 잠시 글에서 손을 놓았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새 공간을 열었다. 다른 사람의 리뷰와 섞이지 않고 내 글을 차곡차곡 모아갈 수 있는 곳. 블로그를 운영해 본 적 없는 나에게 이 ‘차곡차곡’은 어린 시절 돼지 저금통에
동전을 모으는 기분과 닮아 있었다. 글을 올릴 때마다 쌓이는 라이킷은 내 글쓰기의 이자 같았다. 그렇게 나는 브런치에 젖어들었고, 어느 날 작가들의 성(城) 안으로 들어갔다.


‘~해야만 해’라는 이름의 성.


계절마다 주어지는 주제 속에서 우아한 글, 다정한 글, 차가운 글, 재치 있는 글, 서늘한 글, 그리고 쭉 빠진 글들을 만났다. 나는 파티에 참석하는 여인처럼 어떤 우아함, 어떤 다정함, 어떤 재치와 어떤 차가움을 고르며 이 드레스, 저 드레스를 입어 보았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나갔다.
이상으로 시작한 내 글들은 정체성을 찾아 헤맸고, 천재가 되지는 못했지만 박제는 되었다. 스마트폰 화면 속에 남은 박제된 내 글들을 바라보면 내가 썼지만 사랑스럽고, 예쁘고, 귀여워서 라이킷이 야박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이제 겨우 7개월 차, 새내기의 글을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첫 글과 최근의 글이 다르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 썼다. 다만 늘어난 구독자와 오가는 글벗들 덕분에 내 글이 조금 더 멀리, 조금 더 따뜻하게 닿았을 뿐이다.


그래서 2025년은

내 글들에게 예쁜 드레스를 골라준 해.

이 연말 파티에 어울리는 어여쁜 소녀가 된 해다.


사랑한다, 내 글들아.


잘 있어라,
박제가 될 내 글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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