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애를 처음 만난 건 어느 눅은 여름날이었다. 잔뜩 낀 먹구름에 가려 햇빛을 본 게 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9월의 눅진한 공기 속에서, 아버지의 고성이 또다시 집안을 뒤흔들었다. 종종 있는 일이었기에 이상할 것도 없었다. 나는 가방을 둘러메고 도망치듯 대문을 나섰다. 젠장할 비는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초록 철제 대문의 문턱을 넘고 나서야 우산을 놓고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다시 들어가 우산만 얼른 챙겨 나올까 망설이던 순간, 등 뒤로 와장창, 유리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깨와 볼을 때리는 빗방울이 괜스레 무정하게 느껴져서, 한숨을 푹 내쉬고는 후드를 대충 눌러썼다.
문득 고개를 들자, 흐린 빗속에서 토끼 눈을 하고 쳐다보는 새하얀 여자애와 눈이 마주쳤다. 어느 학교 교복이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알 게 뭐야.
“야, 박똥수! 니네 아부지 또 난리 치신다! 얼른 가자!”
페인트칠이 잔뜩 벗겨진 초록 철문을 다시 한번 밀어젖힌 순이가 얄궂게 우산을 털었다. 그리고는 놀랍지도 않다는 듯 명랑한 목소리로 말한다. 우리 집 위층에 사는 순이라면, 아침부터 터져 나온 그 소동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내 머리 위로 슬며시 우산을 씌워주던 순이가 불현듯 건너편의 하얀 여자아이를 발견하고는 입을 “헤…”하고 벌린다. 그 하얀 여자애가 초록 철문과 나, 그리고 순이를 번갈아 바라본다. 그 시선이 어쩐지 견딜 수 없이 창피하게 느껴져, 나는 순이의 우산을 뿌리치고 거의 달아나듯 뛰었다.
“박똥수! 어디 가노! 야!! 같이 가라!!”
순이의 허망한 외침이 허공에 흩어졌다.
아침부터 우울한 기분에 책상에 엎드려 있으니 뒤늦게 교실로 들어온 순이가 등짝을 툭 치며 말한다.
“똥수! 왜 나 버리고 가.”
하지만 나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고성이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오늘따라 그게 꼭 우중충한 날씨 탓인 것만 같았다거나, 처음 본 여자애에게 들켜버린 제 사정이 쪽팔렸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내 한마디 대꾸도 없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순이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 옆구리를 몇 번이나 콕콕 찔러보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조용 좀 해라. 전학생 왔다.”
이 조용한 시골 마을에 갑자기 무슨 전학생인가 싶어 무심히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오늘 아침 마주쳤던 눈처럼 하얗고 마른 그 애였다.
“이름은 김설희. 서울에서 왔다카이, 몸이 아파서 요양하러 왔다아이가. 너무 짓궂게 굴지들 말고 잘 쫌 해라. 설희는 저기 동수 옆 빈자리 앉으면 된다.”
선생님의 손가락 끝을 따라온 그 애의 시선을 마주하자 아침에 토끼처럼 동그랗던 눈의 아이는 난데없었다. 어딘가 불편한 듯 미간을 찌푸린 그 애가 조금 힘없이 다가온다.
그래, 그 꼴을 봤으니 나 같아도 짝꿍 하기 꺼림칙하겠다만, 그렇다고 그렇게 대놓고 티를 낼 필요는 없지 않나…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삐뚤어져 잔뜩 심술이 뻗친다.
“안녕, 나는 설희야. 너 아침에 그… 맞지? 이름이 동수야?”
그 애가 부르는 내 이름은 순이가 장난스럽게 부르는 그것과 무언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목소리 끝에서 폭신하게 번지는 것이… 귀가 화끈거리는 것만 같다. 설희는 목소리도 얼굴만큼이나 희고 곱구나.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박동수, 정신 차려.
“어. 괜히 살갑게 굴지 말고 신경 꺼라.”
“응…? 그게 아니라… 나는…”
나는 빨갛게 달아오른 귓불을 감추기 위해 그 애의 반대쪽으로 몸을 말아 엎드렸다.
쉬는 시간마다 몰려온 아이들은 그 애에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어디서 왔니. 그게 서울교복이니. 부모님은 뭐 하시니. 너는 왜 이렇게 말이 없어. 낯을 많이 가리나 보구나. 빨리 적응하긴 텄다 텄어. 애들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던 설희는 진이 빠졌는지 수업 시간 내내 끙끙대며 잔기침을 흘렸다. 나는 힐끗힐끗 그 모습을 바라보다, 다음 쉬는 시간에도 잔뜩 호기심을 품고 달려드는 아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느그들 구경났나! 쫌 가라 마. 시끄럽다 안카나!”
시시덕대며 몰려오던 반 아이들이 멈칫하며 흩어지는 사이, 잠시 순이와 눈이 마주쳤다. 순이는 무어라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이내 먼저 고개를 돌렸다. 다음은 문학 수업이었다.
‘고마워 동수야.’
나무 책상의 경계선을 따라 희고 반듯한 줄 공책 한 권이 조심스레 선을 넘어왔다. 그 주인처럼 단정하고 예쁜 글씨였다.
그때 문학 선생님의 낭랑한 목소리가 교실 안을 채운다. 어느 꽃과 같은 시 구절을 읊으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아무 의미도 없던 것이 또렷이 각인되는 일이라 말한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설희가 내 이름을 부르기 전 나는 누구에게도 흐릿한 존재였다. 그건 나조차도 나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애가 나를 둥그렇게 부르고, 그 단정한 글씨에 폭신하게 담아내 주었던 순간……
“야 똥수야! 짝꿍 얼굴 다 닳겄다, 닳겄어. 그래서 이 시인 이름이 뭐라카노?”
“예… 예?”
교실 전체에 폭소가 터져 나왔다. 나는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설희의 얼굴만은 유난히 잘 보였다. 빨갛게 잘 익은 복숭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과 후 집에 가는 길. 순이가 연신 재잘거린다.
“똥수야. 니 짝꿍 겁나 하얗더라. 삐쩍 곯아가꼬… 스울 아들은 다 그런가? 이름도 어째 그리 세련됐다 아이가, 설희라카더나? 내 이름은 순이, 순이! 그게 뭐고, 순이가! 서울깍쟁이들이라 그런가 보다. 교복도 우리 거보다 훨씬 살랑거리고, 재질도 좋아 보이더라. 맞제? 내도 그런 거 입으면 좀 괜찮아 보일라나…”
“모르겠는데…”
순이의 입술이 비죽 나왔다. 문득 조금 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니,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설희가 조심스레 따라오고 있었다. 함께 돌아본 순이가 “엄마야…”하며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다음날 오랜만에 비가 그쳤다. 본격적으로 가을이 오려는지 하늘이 한껏 높아지고 공기는 선선해졌다. 나는 깨진 유리창을 신문지로 대충 감싸둔 것이 혹시 눈에 띌까 싶어, 몸만 간신히 빠져나갈 만큼 녹슨 대문을 열어 나왔다. 그리고는 괜히 근처를 서성이며 발끝으로 바닥을 톡톡 찼다.
하지만 건너편 그 애의 집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자니, 분주하게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소리와 함께 삐걱이는 철문이 크게 열렸다.
“어? 똥수! 니 설마 내 기다렸나? 짜식 의리 있네?!”
“어어… 가자.”
미련이 남는 걸음을 옮기며 그 집을 몇 번이나 뒤돌아보았지만, 그날 설희의 자리는 끝내 주인 없는 빈자리로 남았다.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 되어서야 나는 다시 설희를 볼 수 있었다. 교실에 들어가니 이미 자리에 앉아있는 설희와 눈이 마주쳤다. 그 애는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흐리게 웃었다.
“잘 지냈어?”
“어… 학교 왜 안 나왔나?”
“조금… 아팠어.”
어쩐지 고단해 보이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또 비 올라카네.”
“비 오는 거 싫어해?”
“그럼 좋아하는 사람도 있나.”
“……그렇구나.”
그 애는 잔뜩 상처받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뭘 잘못 말했나…? 하지만 비만 오면 막일이라도 잡히지 않는 아버지가 무엇이든 집어던지며 화풀이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날 설희는 모든 수업이 끝날 때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 단단히 화가 난 것 같긴 한데,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종례까지 마쳤지만, 그 애는 여전히 꼼짝도 않고 앉아있었다.
“똥수, 집에 안 가나?”
나는 설희를 흘끗 바라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어, 순아. 니 먼저 가라. 나 할 일이 좀 있다.”
“와, 뭔데. 기다릴게. 같이 가자.”
“아이다, 가라.”
나와 설희를 번갈아 바라보던 순이가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한참의 시간이 더 지나고 그 애가 천천히 일어섰다. 나도 허둥지둥 뒤따라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니 예상대로 비가 내렸다. 쯧, 아침부터 하늘이 흐린 게 불길하다 싶더니.
그런데 그 애가 망설임도 없이 빗속을 뚫고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그 손에 들린 연한 보랏빛의 우산을 펼치지도 않고서, 그저 허망하게 든 채였다.
설희의 헐렁한 교복 자락에 빗물이 스며드는 게 보였다. 얇은 천 위로 어둑한 색이 번지며 그 힘없는 움직임을 따라 얄궂게 흔들렸다. 앞머리에 매달려 내려온 빗방울은 눈썹 끝을 타고 턱 끝에서 맴돌다 마침내 뚝,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무엇인지 모를 것이 목구멍에 콱 틀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허겁지겁 달려가 그 애의 손목을 붙잡았다.
“니 지금 뭐 하는 거고?”
“이거 놔!”
“몸도 안 좋다카는 애가, 우산도 있으면서 이게 뭐 하는 짓이고!”
“네가 무슨 상관인데!”
“… 비만 오면 아부지가 다 때려 부숴가 그랬다! 집도 부수고! 어무이도 부숴가 도망가삐고! 그래서 비가 싫다 안카노!”
그 애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아, 처음 마주하던 순간의 그 얼굴이다. 토끼처럼 동그랗게 뜬 눈 위로 속눈썹이 처연하게 떨린다. 빗물에 젖은 교복 자락이 무겁게 달라붙어 그 끝단에서 물방울이 주르륵 떨어져 내렸다. 친구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선생님들도 퇴근했는지 쏟아지는 빗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희게 질린 얼굴이 애처로웠다. 젖은 교복 자락 속이 언뜻 비치는 것 같아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애의 손에서 우산을 뺏어 펼쳐 들고는 “잠시 들고 있으라.”며 쥐여주었다. 여전히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껌뻑이던 그 애는 엉겁결에 우산을 받아 들고는 덜덜 떨었다. 나는 입고 있던 후드를 벗어 그 애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자크를 목 끝까지 채워 올리는 순간, 나와 그 애의 시선이 얽혀 들었다.
“난 비가 와도 아프고, 안 와도 아파.”
“…그러나”
“그런데 해가 뜨면 아예 밖에 나갈 수가 없어.”
“와 그런데,”
“글쎄… 그냥 어릴 때부터 그랬어. 햇빛이 닿으면 더 아파. 숨쉬기도 어렵고, 어지럽고. 그럴 때면 꼭 내 몸이 나를 미워하는 것 같아. 그래서 학교도 자주 못 가고, 친구도 잘 못 사귀었어. 그래서 항상 집에만 있었어. 난 늘 혼자였어. 그래도 내가 안심하고 밖에 나갈 수 있는 날이 비 오는 날인데, 네가 비 오는 날은 아무도 안 좋아한다고 해서… 나는 네가 그런 줄도 모르고…”
“좋아하께.”
“응?”
“앞으로 비 오는 날 좋아할끼다. 그래, 니가 학교 못 오는 날엔 내가 느그 집 놀러 갈게. 그래도 되나.”
“정말…?”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흐리게 웃는 얼굴의 그 애가 눈부시게 예뻤다. 어쩌면 먹구름 속 숨어버린 태양이 바로 이 애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 나는 아침마다 창을 열어 가장 먼저 날씨부터 확인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여전히 아버지는 고약했지만, 해가 뜨지 않는 날이면 새벽같이 집을 나섰다. 대문 앞을 서성이다 보면 어김없이 순이와 마주쳤다.
“오~ 똥수. 감동인데?”
순이는 늘 장난스러웠고, 나는 차마 ‘네가 아니라 설희를 기다리던 거’라는 말은 할 수 없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설희도 같이 가자.”
잠시 멈칫하던 순이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맞다! 같은 동네 사는데 같이 가면 좋제~”
어쩐지 돌아오는 목소리가 쓸쓸했던 것도 같으나 곧바로 평소처럼 명랑하게 구는 모습에 나는 그저 기분 탓이라 여겼다.
가을이 완연해지고 아이들이 하나둘 춘추복으로 환복했다. 이전 학교의 교복을 고수하던 설희도 우리 학교 춘추복을 입었다. 가을이 되고 아쉬운 점은 여름처럼 비가 자주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희는 꽤 자주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
“아~ 날씨 진짜 좋다. 여름에 비 너무 많이 와서 짜증났다. 안 그러나 똥수?”
“난 비 오는 게 더 좋다 안카나…”
“…그러나. 니 설희 땜에 그라지? 학교 끝나고 설희 불러가 놀면 되겠구만!”
“설희 못 나오지 않겠나…”
“니 바보가. 걔 해 못 본다카매. 해도 짧아졌다 아이가. 해지고 저녁에 걔 집 앞에 가가 얘기나 하면 될 거 아인교?”
여상한 순이의 말에 눈이 번쩍 뜨이고 만 것이다. 학교 종이 울리고 나는 서둘러 가방을 챙기며 창밖을 바라봤다. 어느새 낮은 건물 끝에 걸린 해가 느릿하게 기울어 있었다. 주황빛 물감이 풀어진 듯, 일렁이며 번진 사이로 노란빛이 스며든 것을 보니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평소에는 그토록 느긋하던 종례 시간이거늘, 오늘따라 그 시간이 천년만년 같다. 얼마쯤 다리를 떨어대고, 시곗바늘을 여덟 번이나 보았더니 종례가 끝났다. 나는 번개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순이를 향해 말했다.
“가자. 지금 당장.”
“어어, 와 그리 급하노~ 알겠다, 간다아~”
순이는 느긋한 말투와는 달리 얼른 가방을 메고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마음이 급해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지만, “똥수야, 쫌만 천천히 가라. 내 니처럼 다리 길지 않다!”는 순이의 말에 속도를 조절해야만 했다. 어느새 해는 다 저물고, 짙은 청색의 고요한 하늘이 그 집 뒤편을 수놓고 있었다. 마치 우리를 기다렸던 것처럼 설희는 문밖으로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냈다.
“왔어?”
맑고 투명한 그 목소리에 내내 다급하던 마음이 사르르 녹는 듯했다. 아, 그래 나는 저 애가 보고 싶었던 거다. 괜히 귀때기가 홧홧한 기분에 목덜미만 긁적이다 겨우 꺼낸 말이라곤 “놀이터 가자.”는 말이 전부였다.
어느샌가 곰살맞게 그 애의 팔짱을 끼고 앞서 걷는 순이가 귓속말로 무어라 속삭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듣던 설희가 곰곰이 생각하는가 싶더니 수줍게 웃는다. 언제나 웃는 모습이 예쁜 아이였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놀이터. 더운 여름날엔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가득하던 그곳도 제법 쌀쌀해진 가을바람에 한산했다. 사이좋게 그네에 걸터앉은 여자애들을 보며 나는 괜히 발끝만 툭툭 찼다. 바람에 낙엽이 느릿하게 떨어지고, 철제 그네가 천천히 삐걱거렸다.
“여기… 오랜만이다.”
설희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여기 처음 오는 데 아이가?”
순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냐… 사실 아주 어릴 때 여기 잠깐 살았었어…. 곧바로 이사 가서 기억은 잘 안 나지만….”
“그라모 오다가다 마주쳤을 수도 있겠네. 우리는 쭉 여기 살았으니까.”
“그런가…? 그랬을 수도 있겠다.”
푸스스, 맥없이 웃는 그 애의 웃음소리에 불현듯 어릴 적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손발이 꽝꽝 얼 정도로 시린 겨울밤이었다. 나는 지금보다 훨씬 작고 어렸고, 어머니도 집을 나가기 전이었다. 그날 아버지는 문득 자신에게 딸린 인생이 몹시 화가 났다. 그따위 이유만으로 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어머니는 어린 나를 품에 끌어안은 채 아버지의 주먹과 발길질을 고스란히 받아냈다. 그 손에 소주병이 들리는 것을 보고서야 어머니는 나를 번쩍 안아 현관 밖으로 내던지듯 밀어냈다. 그렇게 문이 닫히는 찰나, 그 왜소한 등 너머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을 보았지만, 겁에 질려 무력한 나는 앞만 보고 달릴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나는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어. 어머니를 지킬 수 없어. 나는 작고 약하니까. 한심하게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다 늘어난 민소매 차림에 찢어진 슬리퍼를 질질 끌며 놀이터 구석, 약간 언 모래 위에 웅크려 앉았다. 몸이 부르르 떨리고 입술이 딱딱 부딪히는 것이 무서워서인지, 추워서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너 안 추워?”
그때, 이 동네 것이 아닌 낯선 말씨가 들려왔다. 고개를 드니 온통 하얀색으로 뒤덮인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눈이 내리는 줄 알았다. 하얀 털옷 속에 목까지 단단히 올라온 니트, 귀를 감싼 앙증맞은 방울이 달린 귀마개, 솜이 가득 들어있을 듯 폭신하고 두툼해 보이는 부츠. 푹 눌러쓴 털모자에 가려 얼굴은 또렷이 보이지 않았지만, 드러난 피부는 눈처럼 창백했다. 마치 동화 속의 겨울 요정 같았다. 나는 추운 것도 잊고 그 애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그 요정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는 곧 자기 장갑을 벗어 내게 건넸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해 여전히 그 애와 장갑을 번갈아 보며 입만 벌릴 뿐이었다.
“너 그러다 내일 엄청 아파…”
은방울꽃 같은 그 애의 목소리에 퍼뜩 내 손을 바라본다. 잔뜩 불어 터진 손끝에는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벌겋게 부어오른 마디에는 살갗이 갈라져 흰 껍질이 일어나 있었고, 피부는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다. 어쩐지 그 꼴이 지저분해 부끄러웠다.
시선을 옮기자 그 애가 내민 장갑이 눈에 들어왔다. 작고 따뜻해 보이는 하얀 벙어리장갑 한 켤레. 보송보송하고 포근한 털로 덮인 그것에는 정성스러운 꽈배기 모양의 무늬가 가지런히 수놓아져 있었다. 손목에 달린 고급스러운 진주 단추가 재촉하듯 달랑거렸다. 나는 감히 그것을 만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 애는 머뭇대는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폭 한숨을 내쉬곤, 주저 없이 내 손을 잡아 장갑을 끼워주었다.
“너 부모님 말씀 엄청 안 듣지?”
순식간에 따뜻해지는 온기에 당황한 나머지, 나는 이번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네 목소리 듣기 정말 어렵다…. 난 이제 가야 해. 너도 얼른 들어가. 네가 안 아파봐서 잘 모르나 본데, 아프면 정말 힘들어.”
푸스스, 힘없이 웃고는 잔기침을 흘리는 그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뒤늦게 이름을 묻고 싶었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린 터였다. 그저 추운 겨울날 밤, 민소매 차림에 어울리지 않게 하얗고 보드라운 장갑만을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다.
그 애가 혹시 너였을까. 나는 그때보다 훨씬 커버린 설희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보다 창백한 혈색이 안쓰럽지만 조용하고 단단한 입매, 낯선 말씨와 투명한 목소리, 눈처럼 흰 피부…. 어쩐지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설희가 조심스레 물었다.
“우리 사진 찍지 않을래…?”
“사진? 지금 찍는다고?”
“내가 폴라로이드 가져왔어. 찍어서 바로 볼 수 있어.”
“우와, 이게 진짜 바로 나오는 거가?”
말로만 듣던 것을 실제로 보아 잔뜩 신기해하는 순이를 보며 잠시 웃던 설희가 조심스레 말했다.
“동수도… 같이 찍지 않을래?”
“……그래, 찍자.”
그렇게 우리는 이것저것 포즈를 바꿔가며 사진을 찍었다. 얼굴을 반쯤 가리고 웃거나, 순이가 장난스럽게 브이를 그리는 사진, 설희가 조용히 웃는 사진, 순이가 찍어준 설희와 내 사진. 폴라로이드 사진이 느릿하게 흘러나오고 그것이 뿌옇게 익는 것을 기다리며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완연한 어둠만이 깔리고 싸늘한 바람에 낙엽이 흩날리는 밤. 시간 가는 줄도 모르던 그때, 설희의 기침 소리가 고요한 공기를 균열처럼 깨트렸다.
“켁… 켁, 콜록…콜록…”
일시적인 줄 알았던 증상이 멈추지 않고 몸을 말아 웅크리는 그 애의 모습에 나도 순이도 표정을 굳혔다. 설희는 입을 틀어막은 채 헐떡이듯 숨을 뱉다가, 손바닥에 얕게 번진 붉은색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떨었다. 나도 숨을 들이 삼켰다. 설희의 볼이 희게 질렸다. 그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본 순간 나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그대로 설희를 업어 들었다.
“순이야 내 가방 쫌!”
“어? 어어…!”
설희는 놀라울 정도로 가벼웠다. 그 애를 업은 채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달려 도착한 그 집 문 앞. 다급한 마음에 초인종을 몇 번이고 눌렀다. 문이 벌컥 열리고 마주한 설희의 부모님은 그 애의 상태를 곧바로 알아차린 듯했다. 곧이어 차갑게 내려 꽂히는 시선이 내게 향했지만 나는 그 눈빛을 애써 못 본 척해야 했다.
며칠이 흘렀다. 가을비가 몇 차례 내렸지만, 설희는 줄곧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 애가 괜찮은지 확인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마치 네 탓이라는 듯 싸늘하게 책망하던 눈빛이 떠올라 근처에 서성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나는 매일, 창밖을 기다리며 그 애를 기다렸다. 그 애가 학교에 나오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무사한지라도 알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비가 오던 점심시간이었다.
“동수… 동수야… 헉… 헉…”
“너… 설희… 너 학교 온 기가? 몸은 괜찮은 기가?”
“응… 아니…, 나랑 어디 좀… 가자. 부탁이야…”
“……뭐라고? 지금?”
“응… 부탁이야…”
답지 않은 행동이라 생각했지만, 그 아이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일 먼저 나를 찾아주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마음이 들었다. 다만 그 애의 얇은 교복 자락이 눈에 걸려서, 입고 있던 후드티를 벗어 단단히 여며주고 우산을 들었다. 그러자 설희가 내 손목을 다급히 잡아끌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반 아이들이 “올~ 똥수~”하고 놀려댔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다급한 손길에 이끌리면서도 나는 그 애에게 단 한 방울의 빗물도 스치지 못하도록 온 힘을 다해 우산을 기울였다. 학교 뒤편, 운동장 끝을 돌아 작은 오솔길을 걸었다. 평평하던 그 길은 얼마 가지 않아 서서히 경사지다가 풀숲과 자잘한 돌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졌다. 산이라기엔 낮지만, 언덕이라기엔 제법 오르막이 있는 그곳. 몸이 약한 설희에겐 조금 벅찰 만했다. 계단도 난간도 없는 그 길을 오르고자 하는 설희는 숨을 쌕쌕 몰아쉬면서도 눈을 반짝였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설희는 주저 없이 내 손을 잡고 언덕을 올랐다. 그 애의 손은 아주 작고 말랑거렸다.
“나랑 같이 이거 심자.”
“이게 뭐꼬.”
“수선화 뿌리야.”
곧 쓰러질 것처럼 연약한 그 애의 눈빛만큼은 여느 때보다 곧고 단단했다. 설희가 잠시 숨을 골랐다.
“수선화는… 봄이 오면 제일 먼저 핀대. 그러니까 동수야… 내년 봄에 잘 피었는지, 꼭 같이 보러 오자.”
나는 어느 가을밤, 끊어질 듯 토해내던 그 애의 숨결과 손바닥에 번져가던 선홍빛의 핏물, 마치 그것에 색을 빼앗긴 듯 창백하게 질려버린 뺨, 그리고 한없이 가볍기만 했던 그 애의 무게를 떠올리고 말았다.
“그래. 꼭 그러자.”
잿빛 하늘 아래, 가늘고 연약한 빗줄기가 듬성듬성 미끄러졌다. 소리 없이 스치는 바람에 축축이 젖은 잔디가 낮게 고개를 흔들었다. 단단히 그러겠노라 대답하는 내게 그제야 안도한 듯, 그 애가 흐드러지게 웃었다. 나는 그런 그 애야말로 수선화 같다고 생각했다.
잔디밭 가장자리를 손바닥으로 다독여 눌러주었다. 물기가 저민 흙이 씨앗을 깊숙이 삼킨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설희가 지그시 눈을 감고 소원을 빈다. 그리고는 벌써 봄을 보고 온 사람처럼 말했다.
“내년 봄에… 정말 예쁘게 필 거야.”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무단조퇴에 대해 다음날 담임 선생님께 불려 가 혼이 났지만, 설희 덕분인지 약간의 훈계 정도로 끝이 났다. 학교는 여전히 북적였지만 설희가 없는 교실은 언제나 시큰둥했다. 짧았던 가을이 지나고 날씨는 점점 더 추워졌다. 그럼에도 설희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괜히 창가를 힐끔거리거나, 운동장 끄트머리의 교문을 멍하니 바라보는 일이 습관이 되었다. 그럴 때면 잠시 설희 자리에 앉은 순이가 함께 바깥을 바라보곤 했지만,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설희가 보고 싶어질 때면 나는 양지바른 언덕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 땅은 종종 하얀 눈발에 덮여있었고, 아무것도 솟아오르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불안해졌다. 혹시 시간이 지나도 어떤 것도 피지 못하면 어쩌나. 너무 추워서 뿌리가 얼어버린 건 아닐까. 아니, 어쩌면 내가 너무 가끔 들여다본 게 문제였는지도 몰라…. 무거운 마음에 터덜터덜 돌아오는 길이면, 오솔길 끄트머리에 복잡한 표정의 순이가 서 있곤 했다.
“니 또 여 와 있었나.”
“그냥… 아무것도 아이다.”
그렇게 길고 긴 겨울도 지나가던 어느 날이었다. 조회 시간, 어두운 표정의 담임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설희가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져가 서울 올라가 치료받다가 어젯밤에 그만 세상 뜬 기라…. 오늘은 오후 수업만 하고 내 장례식장 갈 낀데, 종례는 니들끼리 알아서 하고 퍼뜩 가라. 설희 좋은 데 가라고 다들 기도해 주고…”
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잔뜩 울렸다. 이상했다. 주변을 둘러봐도 충격에 빠진 아이들은 입만 멍하니 벌리고 있을 뿐, 아무도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시끄러운지 모를 일이다.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한 거지, 누가 죽었다고? 그 애가… 설희가 죽었다고?
그럴 리가 없다. 물론 그 애가 조금 아프고 연약하지만, 말도 안 되게 가볍기도 했지만, 나랑 약속했다. 봄에 수선화가 핀 것을 함께 보러 오자고 분명히 약속했다. 그러면서 예쁘게 웃기까지 했다. 그래 놓고 죽었을 리가 없지 않나.
목구멍을 타고 역류하는 감정들이 차마 뱉어지지 못하고, 바싹 마르는 입속에서 꿀떡꿀떡 삼켜졌다. 저릿한 손끝을 꾹꾹 눌러내며 눈을 꽉 감아냈다. 세상이 온통 기울었다. 그 애의 빈자리를 보며 몇 번을 되뇌었다.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교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자꾸만 몸이 앞으로 고꾸라질 듯 쏟아졌다. 폐가 찢어질 것 같았다. 휘청이며 간신히 그 집 앞에 도착해 손잡이를 붙잡았지만, 굳건히 잠긴 그 문은 그토록 무정했다. 반쯤 열린 창틀을 통해 하얀 커튼만이 슬며시 흔들릴 뿐이다.
발걸음을 돌려 그 언덕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힘없이 걷던 발걸음이었으나 어느새 뜀박질이 되어 있었다. 따라오는 사람도 없거늘, 마치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듯 허겁지겁 그랬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허탈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거칠게 얼었던 땅 위로, 여리게 솟은 연둣빛 싹 하나가 얼굴을 내밀고 있는 탓이었다. 손가락만 한 그 새싹은 차가운 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와의 약속을 지키듯, 내년 봄에 예쁘게 피겠다던 그 애의 말처럼.
“동수야… 다 내 탓이다…”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걸음 소리.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순이였다.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똥수”라 부르지 않는다는 것만 빼면 다 똑같았다. 터덜터덜 다가온 순이가 갑자기 무릎을 꿇는다.
“… 내가… 그날 밤에 설희한테 수선화 심으면 소원 이뤄진다고 했다… 내가 부추긴 거라. 갸 아픈 거 뻔히 알면서도, 내가… 동수 니 좋아해 갖고 질투 나가꼬… 그래도 그라믄 안됐는 기라… 그러고 아파서 학교도 못 나온 거 아이가 싶어서…… 흑… 그 정도로 미워한 건 아닌데…. 진짜다. 나도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순이는 목이 메는지 말을 잇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서럽게 울었다. 나는 문득, 그 가을밤 설희의 팔짱을 끼고 귓속말을 속삭이던 순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밉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내겐 순이를 미워할 자격도 없었다. 나는 서럽게 우는 그 애를 바라보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니도, 설희 좋아했제?”
순이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랬다. 걔는 우리 둘 다 진짜 좋아해 줬다. 그거면… 됐다.”
순이가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나는 묵묵히 그 애의 등을 두드리며, 소맷자락에 몰래 눈물을 훔쳤다. 진이 빠질 때까지 울고 난 후, 순이와 나는 막 돋아난 새싹이 어쩐지 설희를 닮은 것 같다는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천천히 언덕을 내려왔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삐걱대는 녹슨 현관을 열자마자 알코올 냄새가 후욱 밀려왔다. 기분 나쁜 예감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동수 너 이 새끼, 또 와 이리 늦었노. 요즘 애비가 아주 우습나?”
아버지는 손에 리모컨을 무기처럼 들고 나를 노려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그러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 앞에 우뚝 섰다.
“이제… 그마해라, 아부지.”
늘 움츠리고 내리깔던 시선을 활짝 들어 똑바로 마주했다.
“뭐라꼬?”
“뭐든 때려 부순다고 인생이 나아지나. 아무것도 안 바뀐다 아이가. 엄마 도망가뿐 것도, 나 이래 된 것도 다 아부지 때문 아니가.”
새삼스레 아버지가 이렇게 작았던가 싶어, 그가 별로 무섭지 않게 느껴졌다. 나는 더 이상 작지 않았다. 더 이상 도망칠 생각도 없었다. 평소와 다른 내 반응에 놀란 듯, 아버지가 주춤거렸다.
“나 이제 아부지 안 무섭다. 때리든 부수든 맘대로 해봐라. 이제 내 온몸으로 막아볼라니까.”
적잖이 충격받은 듯 아버지의 눈이 흔들렸다. 한동안 말을 잃은 채 담배를 꺼내 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울화가 치밀었다. 조금만 더 빨리했더라면. 그랬으면 어머니도 지킬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문을 쾅 닫아 방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밖에서 ‘툭’ 무언가 주저앉는 기척이 들렸다. 그러나 나는 그 소리를 듣지 않은 척했다.
이른 봄이 왔다. 그 애를 닮은 하얀 겨울이 지나고 시끌벅적한 새 학기가 시작됐다. 오솔길을 지난 언덕에는 매일같이 들렀다. 그간 막 돋아나 손가락만 하던 새싹은 훌쩍 커 무릎을 넘겼다. 나는 가방 안에서 오래도록 간직해 온 작고 부드러운 것을 조심조심 꺼냈다.
어릴 적 추운 겨울밤, 민소매 차림으로 추위에 떨던 내게 작고 하얀 아이가 건네주었던 그 부드러운 벙어리장갑. 나는 그것을 가장 환하게 핀 수선화 아래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설희야… 니 말한 대로 진짜 예쁘게 피었다. 그제?”
바람이 불었다. 양지바른 곳에 피어 찬란한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흔들리는 노란 수선화 뭉치가 흐드러지게 빛났다. 늘 햇빛을 피하던 너였는데, 너를 닮은 이 꽃은 참 따사롭게 피어난다.
마치 수선화처럼 환하게 웃던 그 애의 모습이 떠올랐다. 찬 기운을 밀어내는 따뜻한 바람 사이로, 어쩐지 맑고 청아한 너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는 듯했다.
‘내년에도 또 보러 와.’
(完)
아마도 제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 소설이 되지 않을까요.
한 달이 지났는데도 설희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등장인물들에게 애착을 가지게 되는 경험은 꽤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가을에는 트렌치코트를 입어야만 해]에
미공개 설희 시점 번외 편과 함께 수록될 예정입니다. 많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