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진절한 마음을 끌어안는 동안, 나는 찐득찐득한 진창 속을 하염없이 헤매면서도, 역설적으로 나를 예뻐해 주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깨달았다.
나를 꼭 한 번 만나 대접하고 싶었다던 정 작가님은 내가 그녀의 문장에 위로받았음을 고백하자, 고이 접히는 예쁜 눈망울 가득 눈물이 고이셨다.
읽지 말아 달라는 나의 부탁에, 띄엄띄엄한 행간 사이에서 의미와 추측을 읽어내며 노심초사해 주던 이들, 그 모든 조심스러움을 감수하고 한 단어, 한 문장마다 따라와 주던 당신들에게 나는 위로받았다.
언제든 무작정 몸만 챙겨 도망오라던 큰언니와 단짝 친구도 생겼다. 만일 내가 언젠가 또 도망치고 싶어질 때면, 그들은 그저 무사한 나의 안위에 안도하며 다시금 예쁜 것과 좋은 것만을 보여주어 이생의 미련을 일깨워줄 것이다.
때때로 대책 없이 침잠하는 나의 감정선을 고스란히 따라와 주며, 내가 만나 행복한 이들과의 자리에 '자신이 대접한 차 한 잔’이 곁들여지면 좋겠다던 말과 함께, 멋진 책을 보내준 애독자께도 감사를 전한다.
내내 “돌아올 거지? 안 오는 건 아니지?”라며 나의 빈자리를 아쉬워해 주던 동료들, 내 편지를 읽고 눈물을 흘리셨다던 조금 수더분하지만, 감성적인 우리 대표님도 보고 싶다.
멋진 명함이 생긴 것을 축하하며, 돌아오면 명함 지갑을 손수 만들러 가자고 말해준 나의 우상도 있다. 나는 그녀처럼 사회에서 제 역할 이상을 해내는, 아주 멋진 커리어우먼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저 어떤 티도 내지 않은 채 심심한 듯, 굳이 먼 나의 회사까지 찾아와 함께 밥을 먹어주는 친절을 베풀고, 먼 여행지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들을 일러주며 티 나지 않게 나의 생존을 확인하던 친구에게도 나는 큰 빚을 졌다.
언제나 나의 이야기를, 때로는 조금 더 욕심내는 이야기까지 기꺼이 기다려주던 H와는 언젠가 꼭 이루고 싶은 약속을 했다. 나의 무사 귀환을 바라며 자신의 욕심인 양 숙제를 줄줄이 늘어놓던 그녀의 마음을, 나는 끝내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차갑고 푸른 제주의 일정을 마무리하며, 나는 감사한 당신들의 선물을 찬찬히 골라냈다.
사실 나는 ‘기브 앤 테이크’의 귀재인 데다가 실효성을 중시하는 ISTP다. 게다가 핸드메이드 소품샵의 사장이므로, 어지간한 소품은 직접 만들 수 있고, 그것들의 원가 또한 대부분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여행이라는 핑계로 ‘기념품’ 같은 것을 줄줄이 챙기는 쓸데없는 짓은 잘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쩐지 이번만큼은 그저 당신들이 고마워서, 그들의 취향을 떠올리며 선물을 고르는 시간들이 소중하고 기꺼웠다. 금액 따위는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그저 당신들이 기뻐했으면 했다. 그것이면 족했다.
나는 가장 먼저 대표님의 선물을 구하러 나섰다. 술을 아주 좋아하는 우리 대표님은 전시욕이 있으시니, 패키징이 깔끔한 제주 특산 술이 좋겠다 싶어 양조장을 찾았다. 그곳에서 직접 시음을 하고, 깔끔한 향이 인상적인 50도짜리 술을 집어 들었다. 동시에 친구들에게 줄 달콤한 와인도 두 병 골라 택배를 부친다.
스타벅스를 좋아하는 과장님에게는 제주에서만 구할 수 있는 스벅 제주 에디션 그릇을, 부장님을 닮은 동물 모양의 도기 소주잔을, 필기를 자주 하는 신입사원 씨에게는 이름을 각인한 세상에 하나뿐인 펜을 골랐다.
초콜릿을 좋아하는 H에게는 기념품샵의 흔한 백년초 초콜릿 대신, 핸드메이드 공방에서 개성 있는 달콤한 수제 초콜릿과 꽃차를 고른다. 아, 그녀는 카페인에 취약하니 부러 카페인이 없는 차로 고른다. 그녀의 바쁜 일정이 끝나고 도란도란 마주앉아, 향기롭고 씁쓸한 꽃차와 함께 달콤하고 특별한 초콜릿을 씹으며 밀린 수다를 떨어야만 하겠지.
수제 명함 지갑을 만들어주겠다던 그녀는 최근 조금 더 넓은 집으로 이사했다고 했으니, 귀여운 펠팅 고양이 발 매트를 골라본다. 그녀의 집에는 알록달록한 소품이 많았으니, 조화롭게 어우러질 것 같다.
나에게 주는 선물도 골랐다. 위와 같은 이유로 ‘예쁘지만 쓸모없는 것’은 절대 사지 않는 나지만, 이번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잔뜩 산다. 예쁘지만 쓸모없는 것의 최고봉인 오르골, 어쩌면 조금은 쓸모 있을 머리 끈, 장식용 머그컵, 키링 같은 것들….
그중에서도 마지막으로 고른 소원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운명이나 신 같은 것을 믿지 않는 무지한 인간이지만, ‘행운’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안위와 평온을 빌어주는 당신들의 마음은 믿는다. 액세서리 같은 것은 거추장스러워 잘 챙기지 않던 나였지만, 누군가의 말처럼 행운이 필요해지고 부터는 조금 유치하게 생긴 행운 반지를 매일같이 끼고 다녔다. 비록 그 본질이 고작 3천 원짜리 일지라도. 그러니 이 소원 팔찌는, 내가 나에게 주는 행운이다.
나는 이번 제주행을 아주 오래, 많이 기억하고 싶었다. 어떤 진창과 조금의 행운, 그리고 수많은 이의 다정이 함께했던 나의 고단하고 아름다웠던 여행. 돌이켜보면 나의 수많은 여행은 늘 흐릿한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혔다. 그러니 이토록 많은, 나를 위한 예쁘지만 쓸모없는 선물들은 이 제주행을 아주 오래 기억하게 해 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선물은 단 하나도 고르지 못했다.
7년을 함께했음에도 나는 그의 취향을 알지 못했다. 고작 두 달여를 함께한 동료들의 취향은 금세 파악하면서도 그의 취향을 모른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내가 그에게 세심하지 못했던 걸까, 그가 조금 특이한 사람이었던 걸까.
“다른 사람들은 뭘 좋아하는지 보이는데 당신은 정말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당신은 늘 시큰둥했잖아”
내 말에 그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나도 그게 내 문제라고 생각해.”
그를 떠나기로 결심하면서 나는 수많은 자책에 시달렸다.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깊이 갉아먹은 것은 ‘그가 나 같은 사람이랑 함께한 시간이 아까워서, 그가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자책하고 싶지 않아 그에게 묻는다.
“7년 동안 남편 취향도 모르는 내가 문제가 아니라, 취향이 없는 당신이 이상한 게 맞는 거지?”
나를 아주 잘 아는 그가 대답한다.
“이상한 것에 죄책감 가질 필요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