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겨울의 감정을 지나

나의 사랑하는 H에게 헌정하는

by 마른틈

ㅡ2025년. 11월 초순ㅡ

S : H, 사실은요, 매일 아침 씻으러 욕실에 들어갈 때면 펄떡펄떡 요동치는 심장소리가 끔찍하게 듣기 싫어요. 그 소리에 잡아먹힐 것만 같아요. 그 손목을 마구 긋고, 난도질해 버리고 싶어요. 피를 철철 내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요. 그러면 그 소리가 좀 멎을 것 같아서… H, 나 아침이 오는 게 너무 무서워요.

H : 하… 정말 애쓰고 있네요. 잘 참고 있어요. 조금만 더 참아봐요. 필히 좋은 날들로, 좋은 일들로 보상받을 거예요. 잘하고 있어요. 잘 참고 있어요.



ㅡ2025년. 11월의 중간 날ㅡ

H : S. 오늘은 잘 있었어요?

S : 응. 오늘은 카페에 가서, 맛있는 거 먹었어요. 배가 불러요.

H : 와, 제일 좋은 소식인데? 오랜만에 S가 밝아 보여서 좋네요.

S : 오랫동안 참아왔던 말을 했거든요. 답답함이 조금 해소됐어요. 별개로 죄책감은 여전하지만요.



ㅡ2025년 11월의 마지막 날ㅡ

H : S. 내가 공모전 공고들을 좀 스크랩해왔어요, 오늘도 무력하게 누워있었죠? 그만 누워있고 이거 좀 써봐요. 나도 제출하려고요.

S : ……

H : 내가 생각해 봤는데 S, 이거 ‘그때’ 일로 써보면 어때요? 공모전 주제랑도 잘 어울릴 것 같아요.

S : … H는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해요?

H : 나는 S에게 도움이 되고 싶으니까요.



ㅡ2025년 12월 초순ㅡ

S : H, 나 기대했던 공모전에서 떨어졌어요. 나는 숨을 쉴 자격도 없어요.

H : 아, 공모전 한 번에 되면 뭐 셰익스피어게? 나는 다섯 번 출품해서 다섯 번 떨어지고 팝업도, 브런치도 오마이뉴스도 죄다 다 떨어졌는데? 원래 떨어지는 게 일상이에요.

S : 그렇지만… 나는 이제 '공신력 있는 인정'에 인생을 걸었어요. 이거 안되면 나는 되돌릴 곳이 없다는 마음이었는걸요…. 떨어지는 게 타격이 덜한 마음을 가지려면 타격이 덜한 상황이 갖춰져야 하는데 자꾸 상황이 나빠지기만 하니까 하염없이 슬퍼져요.

H : 비교군이 필요하겠네요. 나는 매달 돈이 없어서 죽을 생각만 했어요. 폰 끊긴다고 맨날 문자와요. 그런데 나한테서 그런 티 나나요?

S : 아니요…. 그래서 제가 더 한심하네요…

H : S는 그동안 아팠잖아요. 이제 잘 살기 위해서 초석을 다지는 중인 거예요. 급하게 생각하고 자꾸 끝만 바라보지 말아요.

S : H, 미안해요… 내가 너무 구제불능이라… 매번 한심한 얘기만 해서… 매번 내 감정 쓰레기통 역할만 하게 해서 너무 미안해요….

H : 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털어놓을 곳 하나쯤은 꼭 필요한 법이에요. 미안해하지 말고 언제든 얘기해 줘요.



ㅡ2025년 12월의 어느 날ㅡ

S : 나 병원 왔는데 맥박 수치 144가 찍혔어요. 하하 이러다 급사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아요 H.

H : 왜요? 왜 그런 거야???

S : 스트레스 관리가 어지간히 안 되는 것 같아요. 어제 울다가 호흡 곤란이 왔거든요.

H : 아… 어제 많이 힘들긴 했었죠…



ㅡ2025년 12월 중순ㅡ

H : S! 뭐해요?

S : 손톱 관리해요.

H : 오, 예쁘게 다듬었어요?

S : 네, 방치한 지 한 달이 넘어가니까 너무 울퉁불퉁해서 꼴 보기 싫었어요. 문득 든 생각인데, 제가 내일이라도 갑자기 심장 마비 같은 거로 죽어버리면, 제 시체를 정리하는 사람들이 제 손톱을 다듬는 허드렛일 같은 건 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H : …응, 꾹꾹 담아놓지 말고 하고 싶은 말들 다 털어놓아요. 잘하고 있어요, S.



ㅡ2025년 12월의 어느 날ㅡ

S : H는 종종 어미새 같아요. 자꾸만 나한테 뭘 물어다 주네요.

H : 그거 있죠, 자전거 처음 배울 때 뒤에서 잡아주면 비틀비틀하면서 타다가 몰래 손을 놓아도 모르고 잘 타게 되잖아요. 지금은 S가 마음이 힘들어서 그렇지, 조금만 이끌어 주면 금방 뛰어다닐 거라 생각해요. 나도 아무한테나 안이래요. S는 분명 더 멋있는 사람이 될게 보여서 이러는 거예요.



ㅡ2025년 12월의 또 어느 날ㅡ

S : H. 나 수면제 타러 정신과 왔어요…

H : 잘했어요. 상담 좀 받아봤어요?

S : … 사실 얘기하고 싶진 않아서… 별 얘기는 안 했어요. 그냥 스트레스 검사라는 걸 받았는데 수치가 엄청 낮게 나왔어요. 제가 70대 노인이랑 맞먹는 수치래요 푸하하.

H : 아이고 S 어르신. 그간 얼마나 힘들었을까… 병원에 가겠다고 마음먹은 거부터 큰일이었을 건데 정말 잘했어요.

S : 사실 돌아오는 길에 졸피뎀 치사량 같은 거 검색하면서 왔지만요….

H : 에라이…

S : 사실 저는 거만해서 의사 말 같은 거 안 믿어요. 특히 정신과는요. 그런데 그래도 기계 말은 믿거든요. 기계가 제가 아픈 게 맞다고 말해주니까 갑자기 너무 위로되는 거 있죠. 제가 엄살떠는 게 아니라고 인정받은 기분이었어요. 아픈 거 마음껏 인정해도 된다고… 그렇게 말해주는 거 같아서 갑자기 너무 안도감이 느껴졌어요.

H : 마음을 쏟아낸 것만으로도,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나아질 수 있는 첫 단계라고 생각해요. 잘하고 있어요, S



ㅡ2025년 12월 중순ㅡ

S : H, 여기 퇴근길이 엄청 엄청 예뻐요, 캐럴도 울리고 몽글몽글한 기분이 들어요. 저 오늘 기분이 꽤 좋았어요. 새로 들어간 회사도 엄청 마음에 들었고요. 음… 좀 근래 들어 꽤 많이 행복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상하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참을 수 없이 죽고 싶었어요. 이 감정이, 너무너무 낯설었어요. 나 왜 이럴까요? 나 정말 고장 났나 봐, 어떡해요…

H : 안도감이 생기고 예쁜 걸 보고 나니까 마음이 가라앉았어요?

S : 네, 오히려요. 기뻐야 하는데 슬퍼요. 왜일까요? 내가 좀 미운가…? 동화처럼 예쁜 세상을 보니까 더더욱 현실감이 없어서 더 그런 거 같기도 하고…?

H : 이 행복이 잠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했나…? 못 믿겠는 감정이랑 왜 이제야 찾은 걸까 싶은 감정이요.

S : 아 그래요. 그렇게 얘기하니까 약간 알 것 같아요. ‘왜 이제야’네요. 이미 손쓸 수 없이 슬퍼져버렸는데, 왜 이제야. 왜 이제 와서 나한테 이럴까. 진작에 이러지. 내가 이렇게 망가져 버리기 전에, 내가 너무 상처받기 전에, 벼랑 끝까지 몰려 버리기 전에 진작에 좀 이래 주지. 왜 이제 와서. H, 나 조금 억울한가 봐요. 하하, 감사할 줄도 모르고 저 좀 쓰레기 같죠?

H : 벼랑에 몰렸다가 안도감이 들면 그런 감정이 드는 건 당연해요. 전혀 잘못되지 않았어요. 원망스러울 수밖에요. 모든 일은 타이밍 같아요. 죽어라 열심히 한다고 해서 다 잘되란 법 없고, 쫄딱 망한 후에야 다시 일어서기도 하고요. 감사를 못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에요. 지금까지 S 마음에 여유가 없었어서 낯설 뿐이에요. 비난하지 말고 마음이 하는 얘기 가만히 들어줘요. 힘들었다잖아요.



ㅡ2025년 12월 말ㅡ

S : H, 나 할 말 있어요. 오늘 사무실에서 혼자 햄버거를 시켜 먹었는데요. 저는 사실 수제버거를 싫어해요. 그런데 그냥 변덕처럼 먹어봤어요. 그런데 세상에 제가 살면서 먹었던 버거 중에 제일 맛있는 거 있죠. 그래서 제가 무슨 생각한 줄 알아요?

H : 헉, 혹시 부정적인 생각한 거 아니죠?

S : 푸흐흐… 너무 맛있어서, 이거 먹으려고 하루쯤은 더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H : 아, 너무 잘했다. 아… 잘했어요. S, 행복 그거 진짜 별거 아녜요. 그렇게 살아가면 돼요. 정말 잘했어요 S. 맛있는 거 먹고, 좋은 거 보면서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면 돼요.



ㅡ2025년 12월의 마지막 날, H가 남긴 글 중 일부 발췌ㅡ

‘나의 친애하는 S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깊은 사고와 실로 다양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 오밀조밀 귀엽고 사랑스러운 얼굴은 또 어떻고. 때로는 본인보다 두 배 가까이 많은 나이를 가진 사람들을 아우르며 어느 단체를 이끌어가기도 하는 당참과, S를 믿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당돌함 또한 지녔다.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말을 실감하게 하는 사람이다.

허나 한동안의 S는 퍽 고단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하루를 살아내는 일보다 하루를 꾸역꾸역 삼켜내는 일이 더 어려워진 얼굴로, 매일같이 죽음을 원한다는 말을 눈물에 섞어 흘린다. 울지 않으면 견딜 수 없고, 울고 나면 더 공허해지는 밤들을 지나고 있다. 그 마음 쓰임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나는 감히 다 헤아릴 수조차 없다.

S는 때로 공신력 있는 이들에게 인정을 받아야만 본인의 쓸모가 입증된다는 말을 내뱉는다. 마치 누군가의 도장이 찍히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유예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미 세상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사람은 충분히 사랑받아야 할 이유를 지닌 존재다.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쓸모는 이미 넘친다.

나는 오늘도 S의 이야기를 듣는다. 대답을 찾지 못한 채로, 해결하지 못한 채로.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S의 이야기가 허공으로 흩어지지 않고 누군가에게 닿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 하나로 아직은, 삶의 가장자리를 붙잡아주길 바라면서.’



ㅡ2026년 새해ㅡ

S : H, 새해 복 많이 받아요. 고단했던 일상에 별사탕처럼 소소하고 기쁜, 그래서 그것들이 모인 나날들이 가슴 벅찬 한 해가 되길 바라요. 내가 당신의 아픈 손가락이 아니면 좋겠어요. H의 기쁜 소식을 알릴 때 주저하지 않고 달려와 축하받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단단하고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H : S는 내 아픈 손가락이 아니에요. 아껴주고 싶고 보듬어 주고 싶은 손가락이지. 그러니 힘들고 고된 일 있으면 언제든 털어놔도 괜찮아요. 어느 누구에게도 내 이야기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그 고립감과 외로움이 명치를 조이는 것처럼 아프게 느껴졌어요. 이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쏟아내야 다른 좋은 감정이 들어앉아 촉촉하고 생기 가득한 틈이 생길 거니까. S가 아픈 손가락이라서가 아니라, 안 아프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더욱 조심히 대하고 싶었어요. S, 정말 마음 가득 아껴요.



ㅡ2026년 1월 중ㅡ

H : S, 뭐 하고 지내요. 요즘 연락이 없어 걱정했어요.

S : 조금 정신이 없었어요. 미안해요. H, 나 할 말이 있어요.

H : 뭐예요?

S : 저 지금 대학 2학년 과정이 한 학기만 남았는데, 취업 때문에 선택한 학과라 사실 적성에도, 흥미에도 안 맞거든요. 그래서 마지막 학기만 마치고 문창과로 편입해 보려 해요. 엄청 어려서부터 배우고 싶다고 생각만 해오던 걸 실천하기로 결심한 거라 조금 의미 있는 것 같아요. 커리큘럼 볼래요? 엄청 재미있어 보이죠?

H : 와… 되게 매력적인데요?

S : 지금까지는 제가 선택한 전공도 아니고, 흥미도 없고… ‘학위만 따자’ 싶어서 시간만 대충 죽였거든요. 그런데 이 커리큘럼 보는데 너무 재미있어 보여서, 막 공부하고 싶어서 설레는 거 있죠. 저는 어릴 적에 작가는 돈이 안된다 그래서… 문과 대학은 생각도 못해 봤어요. 어쩌면 도둑 강의나 들을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졸업전공이 무려 문예창작학과가 되는 거예요!

H : 근사해요. 정말 이 네 글자로 밖에 표현할 수 없네요. 근사하다.



ㅡ2026년 1월의 어느 날ㅡ

S : H, 오늘 하늘 봤어요? 하늘이 예뻐요. 이거 봐요. 뭉게구름 되게 귀엽죠.

H : 그러게요. 솜사탕 같다. S, 하늘 얘기하는 거 엄청 오랜만에 보네요.

S : 응… 저 하늘 예쁘단 생각을 얼마 만에 해봤는지 모르겠어요. 원래 습관처럼 하늘 보는 걸 참 좋아했는데, 언제부터 안 보게 됐을까요. 새벽에는 창문을 보는데 햇빛이 건물에 반사되어 걸려있더라고요. 그게 눈물 나게 예쁜 거예요. 아, 이런 소소한 행복감을 내가 언제 느껴봤더라… 싶었어요.

H : S가 하늘 얘기할 때부터 마음에 뭉게구름이 뜬 것처럼 내가 다 좋았어요. S 마음에 점점 안정감이 스며드는 중인 것 같아서 기뻐요.



ㅡ2026년 1월 중순ㅡ

S : 나 새똥 맞았어요.

H : 헐…,

S : 그런데 진짜 찰나의 순간으로 조금만 비꼈으면 머리에 맞았을 텐데 옷에 맞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때요? 나 되게 긍정적이지 않아요?

H : 완전 러키비키네요. 나였으면 “아 XX!”부터 했을 거예요 ㅋㅋ

S : 그쵸? 보통 그게 일반적이죠? 저 되게 긍정적인 사람이었나 봐요. 그래서 사무실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사실 저는 꽤 삭막하게 살아온 주제에 자기애가 넘치는 사람이었거든요. 제 넘치는 자기애의 원천은 어쩌면 그렇게 대책 없는 긍정적인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이런 마음을 너무 오랜만에 다시 가지게 되어서… 기분이 정말 이상했어요.

H : 와, S 너무 멋진 사람이었네요. 역시 내가 사람을 제대로 봤어요.

S : H… 저 조금씩 다시 좋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H :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S : 어쩌면 너무 이른 거 아닐까요? 저 패션 우울증이었던 건 아닐까요? 이렇게 빨리 괜찮아져도 되는 걸까요?

H : 우울증의 정의까진 모르겠지만, S에게 고단함을 가져다주었던 것들이 하나씩 사라짐에 따라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거예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돼요.



ㅡ2026년 1월의 어느 날ㅡ

H : S. 나 이름 한자 좀 알려줄래요? 도장 선물해 주고 싶어요.

S : 갑자기요?

H : 내가 이번에 계약서를 쓰면서 좋은 펜과 좋은 도장으로 서명을 하고 도장을 찍는 게 정말 근사한 일이라는 걸 느꼈어요. 그래서 S에게 꼭 도장선물을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S가 앞으로 언젠가 출판계약서를 작성할 일이 생기면 꼭 내가 선물한 도장으로 날인해주면 정말 기쁠 것 같아요.

S : … 저 도장 선물 태어나서 처음 받아봐요. 기분이 너무 좋아요. 고마워요. 정말 소중하게 간직할게요.



ㅡ2026년 1월의 어느 날, H의 편지 중 일부 발췌ㅡ

‘문득 S가 브런치에 남겨두었던 문장이 떠올랐어요.

“좋은 밤이다.”

그리고 톡에 남겨두었던 말도요.

“하늘이 예뻐요”

무겁게 침잠해 있던 S 마음에 흩어져 있던 퍼즐들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한 모습이 보여 기뻤고, 울컥했어요. S의 밤과 하늘이 언제나 예쁘길 바라는 사람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꼭 전하고 싶어요.’



ㅡ2026년 1월 말ㅡ

S : H, 전에는 삶을 포기하지 못하게 만들어 줄 미련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그 미련이 엄청나게 크고 대단해야 하는 줄만 알았어요. 예컨대 목숨을 대체할 수 있을 만한 사랑 뭐 그런 것들이요. 이전에 제가 살아가는 원동력은 그런 것들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요즘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어요. H 말대로 나를 알아주는 회사, 내 글을 기다리는 독자, 내 안녕을 빌어주는 몇 명 같은 작은 미련들이 조금씩 모여서 살아가는 거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들을 해요. 그러니까 그 작은 미련들이 조금만 더 생겼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그러면 정말로 죽고 싶지 않을 것 같아요.

H : 나도 근 몇 년간 죽지 못해 살아있는 사람 중 하나였거든요. 만약 그때 죽었다면 지금 내 손에 쥐게 된 작은 것들을 미처 알지도 못하고 끝났겠다 싶어 져서 아찔해요. S 손에도 모래알 같이 작은 것들이 하나씩 계속 들어갈 거예요. 나도 한때는 공모전 수상이 나를 살게 할 거라 생각했어요. 탈락할 때마다 모래시계 안에 갇혀서 모래들에 덮쳐지는 기분이었는데, 그 모래시계를 다시 뒤집는 것도 결국 나더라고요. S도 꼭 뒤집어요. 알겠죠? 할 수 있다. S!



ㅡ2026년 2월의 초순ㅡ

H : S, 나 뭔가 하나 느낀 게 있는데요, 나는 그동안 S랑 대화하면서 내가 S의 이야기를 들어줬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S : 음…? 그럼요?

H : 나도 S를 통해 치유를 하고 있었어요. S가 나에 대해 쓴 글을 보면서 ‘아, 내가 그런 사람이구나’ 생각도 하고 S가 여행가 있느라 연락이 안 되는 동안 허전도 하고, 그러다 다시 연락되니까 체증이 풀리는 기분도 들고요. 어쩌면 내가 S의 이야기를 들어준 게 아니라 S가 내 이야기를 들어준 거였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S : 제가요…?

H : 응, 내가 S랑 이야기할 때 내 경험을 말하면 S는 그걸 듣고 힘을 얻거나, 힌트를 얻잖아요. 그러면서 오히려 나한테 고맙다고 말해요.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이야기하고 있던 거였을지도 몰라요.

S : …나는 이번 여행을 하면서 언젠가 꼭, H와 제주에 함께 오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H는 아주 동안이니까, 우리가 같이 다니면 정말 친구처럼 보일 거예요. 그렇게 여행을 오면 나 꼭 하고 싶은 게 있어요. 나도, 당신도 각자의 여행 에세이를 펴는 거예요. 나는 글을 쓸게요. H는 글도 쓰고 그림도 그려요. 그리고 우리 서로에게 편지 형식의 글을 주고받아요. 어때요? 아주 멋진 콜라보레이션이 될 것 같지 않아요?

H : 와… 정말 소름 돋았어요.

S : 언제가 됐든 기다릴게요.



ㅡ2026년 2월 중순ㅡ

S : H…! 나…! 출간 제안 들어왔어요! 게다가 메일 내용을 봤는데… 이 사람 지금 제 원고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읽었어요…!

H : 헉…! 미쳤다 꺅! 거 봐요 내가 될 거라 했잖아!!

S : 나, 꼭 H가 선물해 준 도장으로 계약할 거예요. 정말 고마워요!

H : 와… 나 심장이 막 뛰고 눈물이 고여요. 정말로 축하해요 S. 그 영광의 순간에 나를 끼워줘서 정말 고마워요.

S : 내 모든 슬픔의 순간에 함께해 줘서 고마웠어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이 모래알같이 작지만 소중한 것들을 쥐어볼 용기도 내지 못했을 거예요.



ㅡ2026년 2월의 말ㅡ

S : H. 나 계약 마쳤어요. 내가 글을 쓰는 걸 아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소식을 알렸고요. 아주아주 성대하고 요란하게 축하받고 있어요. 있죠, 나는 빈 수레가 요란한 게 정말 정말 큰 콤플렉스였어요. 이제 내 수레가 아주 조금은 덜 비게 되어서, 또 그걸 알려줄 수 있어서…, H. 나 행복해요. 충만해요. 살맛 나요.

H : S를 알고 나서 S에게 들었던 말 중에 가장 기쁘고 예쁜 말이네요…. 행복해요. 충만해요. 살맛 나요. S가 그 말을 오래오래 반복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요.

S : 내 고단했던 작년에 가장 큰 수확이 있었다면요, 그건 H를 만난 일이에요. 진심을 담아 당신에게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