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의 거짓된 평안
새싹이 돋아나고 만물이 역동하는 계절, 봄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 처박힌 마음마저 파릇해질 수는 없는 법이지. 본디 사람이란 게 그렇다. 간사하고 옹졸하기 짝이 없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이토록 가시밭길이라면, 한 다리를 접어 펴고 팔을 머리 뒤에 괸 채 푹신한 잔디밭 위에 누워 뒹구는 이가 그토록 무심하고 배 아픈 법이다.
마음이 따끔거릴 땐 예쁜 양말을 신는다. 두어 달 전 제주에서 골라온, 귀엽고 예쁜 양말 네 켤레. 고양이나 꽃 모양이 규칙 없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올록볼록한 질감까지 더해진 그것들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대체로 마음이 처박힐 땐 고개도 함께 처박히는 법이라 그 시선 끝에 닿은 게 알록달록하고 유치한 양말 한 켤레라면, 문득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을 도리가 없는 법이지.
비록 이런 것을 신기엔 조금 시들어버린 나이가 마음에 걸리지만 괜찮다. 나는 동안이니까, 졸라 최강 동안이니까. 쓸데없이 예쁘고 비싸, 학생 때도 못 신어본 양말 하나쯤은 아무도 모르게 신어내면 된다. 어차피 세상 사람들은 내게 관심이 없다.
한때 ‘사회적 위치’를 간절히 바라던 삶이다. 잡힐 듯 잡히지 않던 그것은 여러 형태로 내게 좌절감을 쥐여주었다. 불안, 시기, 질투, 초조와 같은 자격지심과 피해망상. 그때 스스로에게 제일 자주 하던 말은 단언컨대.
“난 정말 쓰레기야. 이렇게 하등 쓸모없을 수가 없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보이지 않는 작은 점이 되어 존재 의미를 잃어갔다. 무릇 기억되지 못하는 존재는 무(無)와 같으니, 나는 ‘없는 것’이 되길 바랐다. ‘있음에도 존재치 못한 것’이 아니라.
업무 관련 카톡방이 서른다섯, 위챗방이 열여섯 개다. 아마도 앞으로 끝도 없이 늘어나겠지. 시시각각 울리는 이메일과 새로운 이슈마다 반응하는 메신저 알림이 빨갛게 재촉한다. 모르는 단어마다 검색해 채워 넣은 단어장을 넘겨 가며 메일을 해석하고 고객에게 적당히 가공된 정보를 전달한다. 수많은 이들만큼이나 다양한 니즈를 해석하고 처리하고 있노라면, 마치 만능 사기꾼이라도 된 기분이다.
그토록 바라던 ‘사회적 위치’를 가졌으니 어쩌면 감개무량하겠다. 애초에 내가 바란 것은 대단한 지위나 명예 따위가 아닌, 그저 매일 같은 자리와 내 전용 텀블러에 담아 마시는 콜드브루 한 잔, 그리고 나만이 처리할 수 있는 ‘나의 일’ 정도였으니. 여전히 간사하기 짝이 없는 나는 이런 내 모습이 마음에 드는 것 같다. 아주 만족스럽다.
나 쫌 멋진대? 나 장난 아닌데? 나 짱인데?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끝날 일이 아니라고요!”
“…그럼 제가 어떻게 해드리면 될까요”
“뭘 어떡해요. 여기서 뭘 어쩌겠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당신한테 한풀이하는 거뿐이지”
잔뜩 격앙된 목소리로, 당당히 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겠다는 고객사에 나는 부푼 억울함을 눌러 담고, 체념 섞인 한숨을 몰래 내쉰다.
“… 예, 그럼 그렇게 하십시오. 제가 겸허히 듣겠습니다.”
저는 그저 중간 전달자일 뿐인데요….
못내 억울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떨리는 목소리를 들키지 않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고 또 가다듬는다. 나는 쓰레기다. 나는 개똥벌레. 나는 바닥에 들러붙은 껌 쪼가리.
알고 있다. 못내 억울한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내가 조금 더 많이 알았더라면, 조율을 더 잘했더라면, 양쪽에 얕보여 이토록 멍청하게 휘둘리지는 않았으리란 것을. 이 모든 상황을 능숙하게 이끌 수도 있었을 텐데, 결국 내가 부족한 탓이다.
바보. 멍청이. 허접스러운 나.
“틈아, 배고프지”
중국에 출장 가 계신 대표님께 보고를 올리고 업무 관련 이슈를 전달받던 중, 뜬금없는 안부에 눈동자를 도로록 굴려 모니터 하단의 시간을 확인한다. 11시 57분. 당신이 계신 곳은 아마 이제 오전 11시쯤.
“…네, 엄청요”
“내가 한국 가면 맛있는 거 사줄게. 먹고 싶은 거 생각해 놔라”
“……”
“원래 다 그렇게 크는기다. 잘하고 있다.”
나는 잠시 멈칫이다, 조금 웃으며 대답한다.
“네 그럼요. 이번에 정말 많이 배웠어요. 저 괜찮습니다!”
약 이 주간 업무가 마비될 만큼의 거래처 갑질을 오롯이 받아낸 마음이 사르르 녹는 건 별수 없는 일이다. 나는 불행의 역치는 높고 행복의 역치는 낮은 사람이니까. 뛰어난 회복탄력성은 언제나 그렇듯 내 특기다.
마른틈. 넌 멋져! 넌 최고야! 너가 짱이야!
아니, 아니다. 사실은 거짓된 마음이다. 이 흩날리는 봄과는 조금 동떨어진, 새빨간 거짓말. 나는 사실 누구보다 내가 부족하고 못난 인간임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아무도 모를 손바닥 손금 속에 가려진 흉터만큼이나, 나의 모자람을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만, 올록볼록이는 귀여운 양말을 신어낸 내게 선의의 거짓을, 거짓된 평안을. 그리하여 조금 더 괜찮은 내일과 봄을 허락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