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님 부디 이 외로운 마음을 굽어살피소서

by 마른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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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명 : 여왕벌의 궁정

▶ 목표 : 무리 속 절대 권력을 쥔 ‘여왕’을 따르며 살아남아라.

▶ 난이도 : ★★★★★

▶ 위험 요소 : 아부, 고립, 내로남불

▶ 보상 : 일시적 소속감의 착각, 배신의 트로피

▶ 실패 시 : 여왕의 왕국에서 추방 및 여왕과 일벌들의 조롱




한 무리 속에서 살아남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그것은 이제 막 입학한 아이들이 있는 학교에서도, 계급에 의해 움직이는 직장에서도 그렇다. 그리고 이 당연한 법칙은 불특정 다수가 모이는 온라인 세계에서도 적용된다. 오히려 익명이라는 가면 아래 사람들은 솔직하게 본능과 욕구를 드러내는 것에 조금 더 거리낌이 없다. 그 중심에는 ‘여왕’이라 불리는 이가 존재하건대 그녀의 한마디와 미소, 눈물 한 방울이면 공동체의 질서는 종잇조각과도 같이 무용해진다.


보통 왕국의 건국사를 살펴보면, 뛰어난 통치자가 여러 부족을 카리스마와 무력으로 정복해 통합하고, 이어 정통성을 확보한 뒤 각종 제도와 편의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여왕님은 이 과정을 전부 패스한다. 어느 날 갑자기 순진무구한 얼굴로 나타나 일벌들이 피땀 흘려 조립해 놓은 안락한 왕좌를 가리키며 “다리가 조금 아픈데 여기에 앉아도 되겠냐”라고 해사하게 웃으며 물으신다. 그 목소리가 마치 백 년 전 신의 신탁을 받든 듯 고요한 새벽의 종소리처럼 울려 퍼면, 성녀님의 현신이라도 마주한 기분에 그간의 고생을 까마득하게 잊은 일벌들은 홀린 듯 고개만 끄덕이는 것이라.

개중 불경한 이단아가 하나 있어 감히 목소리를 내건대, 결백한 여왕님께서 소맷자락에 찍어내는 눈물은 성수가 될지니 그 이단아가 아무리 피땀 흘려 왕국의 건설에 이바지했더라도 추방되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새로 오픈한 게임의 초기 멤버들이었다. 새로운 시스템과 환경은 낯설었지만, 나만 뒤처진 것이 아니라는 안도감이 있었다. 내가 모르는 것은 너도 모른다는 동질감, 하여 각자 새로 알게 된 정보를 빠르게 나누며 함께 성장해 나갔다.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며 협동하는 장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낯선 환경은 곧 익숙해지고 밤새 손에 땀을 쥐며 도전하던 레이드는 숙제가 되어가던 어느 날, 곱디고운 목소리의 여성 길드원이 새로 들어왔다.


길드 내 여자라곤 걸걸한 목소리로 “아ㅡ 똑바로 좀 합시다. 아저씨들”하며 다그치던 원년 멤버 마른틈씨가 전부였다. 그런데 그곳에 “아… 안녕하세요… 오늘 처음 시작했어요…”라며 어찌할 바 모르는 가냘픈 목소리의 그녀가 등장했을 때, 그 존재만으로도 굳세고 투박한 사내들의 마음을 흔들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그들은 시작부터 “부담 갖지 말라, 신입에게 원래 다 주는 것이다~”라며 온갖 아이템과 아바타를 그녀에게 헌정했다. 마른틈씨는 그 우스운 꼴을 보며 속으로 ‘아이고 아저씨들 열심히 사시네’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이미 그들보다 상위콘텐츠를 즐기고 있었으니 딱히 부러울 필요가 없었지만, 그들이 말하는 ‘신입에게 다 주는 것’이라는 말 앞에 (여성)이라는 단어를 붙여주고 싶은 것을 참느라 피식 웃고 말았던 것이다.


일벌들의 근면스러운 정성에 힘입어 적응을 끝낸 여왕은 드디어 첫 레이드에 출격하였다. 보스의 화려한 패턴 앞에 그녀는 허둥대며 엉뚱하게 스킬을 썼고, 마른틈씨가 그 모습을 보며 엽다며 웃어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단언컨대 마른틈씨는 악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곧 여왕님의 목소리가 울먹이며 흔들리는 것이었다.


“마른틈님. 저 너무 긴장하고 힘들었는데… 저보고 비웃으셔서 손발이 덜덜 떨리고… 트라우마 와서 앞으로 레이드 못 갈 것 같아요… 사과해 주세요…”

“그래 마른틈이 잘못했네, 사과해~”

"맞아 울지 마, 괜찮아"


예? 녜? 내? 뭐라고?

이 미친놈들이 뭐라는 거야? 너희 내가 다 입히고 먹이고 키우고….


하지만 매우 유감스럽게도 마른틈씨는 글을 쓰는 솜씨의 절반만큼도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상황에 순간적으로 ‘어? 그런가?’ 싶었고, 또 본디 말은 막 뱉고 기분이 나쁘다면 사과 또한 헤프게 뱉는 성정이었으므로.


“어… 미안해요…”


가만, 내가 사과를 왜 하고 있지? 사실 이 파티 *빡숙 파티였잖아? 쟤는 *숙코였고?


그 집단의 성비는 처참하게 망가져 있었다. 분명 생물학적으로는 마른틈씨 또한 여성이었으나, 그녀는 초반부터 그들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동고동락해 왔으며, 연약함을 무기로 그들의 도움을 받기보단 조금 더 앞서나가 이끌어주는 처지에 수렴했다. 그렇기에 새로 등장한 연약한 그녀는 여성을 보호하고 싶은 남성의 진화심리를 정확히 자극하였다. 우리는 그것을 알기 쉽게 ‘기사도 정신’이라고 한다.

갑작스레 울먹이는 그녀에 정확한 앞뒤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다수가 동조하여 마른틈씨에게 억울한 상황으로 흘러간 것은 집단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심리적 메커니즘 때문이었다. 다수의 의견에 동참하지 않으면 배제될 것 같은 두려움에,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키고 집단의 판단을 따르게 하는 것. 사회심리학에서는 이를 ‘집단동조’라 부른다.


하여 왕국을 일구는 일에 가장 열정적이었던 마른틈씨는 유감스럽게도 그곳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우매한 그 집단은 엄한 희생양을 만들어 갈등의 원인을 개인에게 전가하면, 잠시의 안도감만을 얻을 뿐이라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리하면 결국 제2의 마른틈씨와 제3의 마른틈씨가 생길 뿐이라는 것도 말이다.


마른틈씨는 결국 오픈 초기부터 함께한 길드를 떠나게 되었다. 어느 날 불쑥 나타난 아리따운 그녀가 여왕이 된 줄도 모르고, 끝내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자신의 아둔함을 탓하며.

후에 듣기를 그 여왕은 남성 일벌들의 징병제에 대해 망발을 떨다가 쿠데타를 맞이했다 하니, 참으로 우스운 결말이 아닐 수 없다.




[SYSTEM: 퀘스트 실패!]

"여왕님은 당신을 굽어살피지 않으셨습니다…."

▶ 결과 : 무리에서 추방됨

▶ 부작용 : 외로움 * 배신감 * 조롱으로 인한 중첩 피해

▶ 상태 : 이름 없는 난민 신세로 전락하였습니다

▶ 교훈 : 여왕의 은총은 일시적인 허상이었으니, 홀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빡숙: ‘빡세게 숙련된’ 실수 없이 기믹을 기계적으로 효율적으로 플레이할 수 있는 상태

*숙코: ‘숙련코스프레’ 숙련자가 아닌데 숙련자들 사이에 몰래 끼어 숙련인 것처럼 속이고 플레이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