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앞에서 나이는 무용하다.

by 마른틈

세상을 살아가며 ‘경력’이라는 것은 언제나 고귀한 가치일 것이다. 특히 요즘같이 먹고살기 힘든 시대에 ‘경력직 신입’이라는 해괴망측한 단어까지 등장하였으니 “아니 그럼 신입은 어디서 경력을 쌓으라는 말이오!”라는 푸념이 절로 나오는 세상 아니겠는가. 심지어 이런 우습고 빌어먹을 세상에서는 ‘밥을 많이 먹은 경험’조차 경력이 된다. 우리는 그것은 짬바라 부르고, 조금 더 예쁘게 포장해서 연륜이라 말한다.

더욱이 효와 예, 유교 사상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대한민국에서는 연륜의 가치가 한층 더 전통적이고 보편적으로 통용된다. 그리하여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그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일단은 배려하고 존중해야 하는 것. 사실 미덕이라기보단 강요에 가깝다.

물론 사람 사이의 관계라면 당연히 상호 존중과 배려가 바탕에 깔려야 하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나이순으로 줄 세워질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것은 관계에 있어 본질이 아닐 테니. 허나 대부분의 경우, 그 존중과 배려는 일방통행에 그치고 만다. 일의 경위와는 관계없이 아랫사람이 불쾌감을 삼키고 속을 삭여야만 미덕이라 포장되는 것은 얼마쯤 씁쓸한 현실이다.


그런데 이런 당연한 ‘미덕’과 ‘관습’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 있다. 그건 바로 게임 속 세상이다. 그곳은 보편적 가치일 ‘예의’보다 ‘힘’이 우선시되며, 모든 의사소통이 힘의 논리에 따라 결정된다. 게임에서 힘이란 곧 레벨이다. 레벨이 높은 자가 곧 형님이 되고, 레벨이 낮은 자는 아우가 되는 것. 그것이 게임의 법칙이다.

다만 이 당연한 법칙이 익숙하지 않은 자에게는 영 어색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연륜이 최우선의 가치로 여겨지길 바라며,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한다.




마른틈씨는 그 게임을 오래 했다. 적어도 얼마 전 새로 들어오셨다는 아버지뻘의 그분보다는 몇 개월은 먼저 시작하였으니, 각종 레이드의 *기믹과 요령에 대해서는 해박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 들어온 그는 사람 좋게 굴면서도 왕년에 자신이 다른 게임에서 얼마나 유명했는지, *RPG에 대해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를 줄곧 어필했다. 하지만 그래서 뭐? 그 게임과 이 게임은 엄연히 다른 게임이고, 레이드를 함께하기에 그는 퍽 쪼랩이었다. 그러니 연세도 있으신데 그 열정이 대단하시네ㅡ 라고 웃으며 받아주었던 것이 패착이라면 그랬다.


그는 꽤나 열정적으로 게임에 임하며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플레이 보며 길드원들은 나이를 잊은 그의 열정에 응원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것이 시간이라면 아무리 피로한 상황에도 기꺼이 내어주었으며, 물질적 지원이라면 삼삼오오 보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 덕에 그는 어느덧 게임에 잘 적응한 듯 보였다. 물론 *고인물이었던 마른틈씨의 눈에는 여전히도 어느쯤 허둥대는 모습이 보였으나 그쯤은 그저 웃어 넘기기면 될 일이었다. 그가 계속 사람 좋게 굴었다면 말이다.


사실 아버지뻘의 그를 게임에 적응시키기 위해 마른틈씨를 포함한 길드원들은 꽤 고된 마음을 숨기고 있었다. 스포츠 선수만 해도 서른이 채 되기 전에 은퇴하는 것이 일반적이거늘, 게임도 나름의 스포츠라면 e-스포츠인 것이다. 나이라는 건 생각보다 절대적인 가치로, 그가 왕년에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뽐내었든 흘러가는 시간 앞에 순간적인 반응속도와 판단력은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그의 레이드 적응을 위해 숙련의 그들이 기꺼이 핸디캡을 감내하며 긴 시간을 쏟은 건 순수한 선의였다. 당장 내일 새벽 이른 출근 일정이 잡혀있어도 말이다. 물론 그 행위에 누구도 보상을 바라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도움을 받는 이가 그 마음에 고마움을 가진다면 그것으로 될 일이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게임에 적응한 그는 유감스럽게도 우매함의 봉우리 정상에 오르고 말았다. 예의상 건넨 “와 형님 잘하십니다”라는 칭찬과 몇 번의 *공팟 경험은 그를 착각에 빠트렸고, 왕년에 떨쳤다던 명성과 열정은 끝내 그의 오만을 폭발시킨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그는 본인을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는 그들에게 고마움을 잊고 어느 순간, 되레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달라진 그의 태도에 우리는 모두 어리둥절했으나, 그는 어디까지나 모두의 아버지뻘 인사였다. 하여 표출하지 못한 답답한 마음들은 길드 운영진이었던 마른틈씨에게 전부 전해졌다.

그는 본인의 적응을 위해 타인의 시간을 당연히 요구했다. 그 긴 시간, 목소리가 갈라지도록 고단하였던 이들에게 ‘수고했다. 고맙다’의 인사를 생략하는 것은 이제 별스럽지도 않을 일이었다. 또 어느 날에는 허둥대던 본인의 실수를 그를 돕 파티원에게 떠넘기며 화를 냈다. 물론 그 파티원은 이동 경로만 보아도 그의 허둥스런 실수를 모두 짚어낼 만큼 노련한 인사였음을, 그는 몰랐을 것이다. 언젠가는 보스의 기믹에 대해 길드 내 정석으로 굳어진 국민 파훼법을 부정하고, 본인이 공팟에서 배워온 별 희한한 방법만을 고집하기도 했다.


유감스럽게도 마른틈씨의 가슴속엔 혁명가의 불씨가 타고 있었다. 스트레스를 피해 최선을 다해 도망 다니는 현재와 달리, 그때의 그녀는 쌈닭의 기질이 다분했다. 하여 듣기 싫은 말, 하기 싫은 말을 신랄하게 퍼붓는 재주가 있던 것이다.

그의 아집이 똘똘 뭉쳐 모두가 불편해하던 시점, 마른틈씨는 더 이상 참지 않았다. “당신보다 게임 경험이 숱하게 많은 이들이 모두 당신을 돕고 있는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함부로 굴지 말라”며 쏘아댔다. 아주 버릇없고, 직설적인 일침이었다.

늘 연장자로서 존중받는 플레이를 해오던 그는 새파랗게 어린놈의 새끼가 건방지게 눈을 똑바로 뜨고 대드는 꼴을 도무지 견딜 수 없던 모양이다. 허울 좋던 그의 ‘사람 좋은’ 가식은 단번에 벗겨졌다. 그는 마른틈씨에게 고함을 치며 상스러운 욕설을 퍼붓는데서 그치지 않고 “어디 여자 주제에…”라는 말로 본인의 가부장적, 혐오적인 사상을 서슴없이 드러내고 말았다.


그렇게 밑천이 전부 까발려진 그는 결국 길드를 떠났다. 어찌보면 권선징악의 말로였을까? 허나 그에게 아낌없이 건네던 모든 선의는 우리의 몫이었다. 늘 새로운 이를 기꺼이 맞이하던 우리였지만, 그 정성과 노력이 무용해지는 것만큼 허무한 일은 없는 것이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그는 ‘인지 부조화’ 속에 갇혀있었다. 현실에서 그는 ‘존경받는 아버지’ 혹은 ‘사람 좋은 상사’였을지 모른다. 연륜과 지위가 곧 근거가 되는 현실에서 그는 전보다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일정한 권위를 보장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게임 속에서는 나이보단 레벨이, 직급보단 실력이 곧 권위였다. 그는 서툰 초보자였고,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야 겨우 레이드를 따라갈 수 있었다.

이 두 질서가 충돌하자 그는 그 간극을 해소하기 위해 오만을 선택한 것이다. ‘나는 존중받아 마땅하다’라는 기존의 신념과 ‘나는 실력 없는 쪼랩이다’라는 현실 중, 억지로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는 쪽으로 말이다.


그러나 인간관계란 늘 ‘사회적 교환 이론’ 위에 존재하는 것이니, 당신이 누군가의 선의와 시간을 소비했다면 그에 따른 존중과 감사가 따라야 한다. 그는 평소 누려오던 ‘연륜’의 배려에 취해 이 당연한 법칙을 잊었고, 수많은 관계와의 균형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결국 ‘권위’란 나이나 경력에 따라 저절로 굴러들어 오는 값싼 훈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함께하는 이들을 인정하고, 그들의 수고에 감사할 줄 아는 태도에서 세워진다. 그렇지 못할 때 남는 것은 ‘존중’이 아니라 ‘외면’ 일뿐이니.




[SYSTEM NOTICE]

- '연륜 기반 권위' 시스템이 삭제되었습니다.

- 힘은 '레벨 * 실력' 수치로만 산정됩니다.

- 일부 이용자는 패치에 적응하지 못하고 게임을 종료했습니다.


*기믹: 보스 몬스터의 특정 패턴이나 공략 방법

*공팟: '공개파티'의 줄임말. 길드나 지인들이 모인 파티가 아닌 누구나 참여 가능하도록 공개되어 있는 파티

*RPG: Role Playing Game의 줄임말로 캐릭터를 육성하며 이야기를 진행하는 게임 장르

*고인물: 오랫동안 게임을 해와서 웬만한 건 다 아는, 숙련된 플레이어를 부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