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글 아닙니다. 아니 맞나?
학창 시절, 반장은 언제나 투표로 뽑혔다. 실로 별 의미도 없을 인기투표였으나, 어찌 되었든 ‘민주주의’에 의거한 공정한 방식이었다. 종이에 또박또박 이름을 적어 내면 불러내는 이름마다 칠판에 바를 정(正) 자가 하나씩 새겨졌다. 그렇게 선출된 반장은 다음날이면 의례적으로 반 아이들에게 햄버거를 한 개씩 돌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바로 민생지원금의 시초 아니었을까…? 아무튼 중요한 건 반장이 ‘민주적 절차’로 뽑혔다는 사실이다.
하여간에 꼭 반장이 아니더라도, 민주정권을 가진 이후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완장’은 투표로 정해지는 것이 보편적인 가치가 되었다. 그것이 가장 무난하고, 편하고, 모두가 받아들이기 쉽기에 그렇다. 만일 이를 부정하고 강제로 ‘장’의 자리를 요구한다면, 뼈아픈 역사를 가진 국민 특유의 불신 어린 시선이 꽂힐 테니, 그건 서로에게 좋은 결과가 될 수 없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그 보편적인 가치를 무시하는 완장이 있다면 믿겠는가? 그 자리는 애초부터 ‘장’이 정해져 있으며 누구도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다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날 뿐이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그 자리는 바로 ‘길드장’이다.
대부분의 ‘완장’에는 보상이 따르기 마련이다. 국회의원이라면 명예와 연금이 있을 것이고, 학생회장이나 반장은 리더십을 가장한 생활기록부 한 줄이 남는다. 군대의 조교나 분대장은 휴가 같은 특혜를 얻을 수 있으며, 아파트 입주자 대표만 하더라도 약소한 월급과 관리비에 대한 결정권을 갖는다.
허나 길드장이라는 자리는 다르다. 월급은커녕 신규 길드원을 위해 사비를 끌어다 쓰는 데다, 부르면 기꺼이 달려가는 예스맨에 가깝다. 게다가 불특정 다수가 모이는 익명의 공간에서는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으니, 길드원들 사이를 중재하고 각종 빌런들을 퇴치하는 수호대 역할까지 떠맡아야 한다. 아주 슈퍼맨이 따로 없다.
예컨대, 이런 거다.
분명 일주일 전까지 다 같이 하하 호호 잘 지내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저 사람 아이템 먹튀 했어요”라는 제보가 들어오면 상황은 급변한다. 변호사도 아닐 길드장이 사건 해결을 위해 중재를 시도하면 피해자는 개인적인 문제니, 공개적으로 얘기하고 싶지 않다며 소극적으로 군다.
결국 길드장은 상대방과 대화를 통해서만 상황을 중재해야 하거늘, 그가 순순히 인정하지 않는다면 일이 복잡해진다. 사건은 개싸움으로 번지고, 종래에는 “왜 공론화시켰느냐”며 원망까지 듣게 되는 것이다.
이에 지쳐 둘 다 내보내면 이번에는 다른 문제가 터진다. 나간 두 사람은 길드에서 오래 활동하던 인물로, 각자의 친했던 길드원들이 덩달아 탈퇴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흔들리기 시작한 분위기는 점차 길드 전체로 번지고, 결국엔 길드장만 나쁜 사람으로 남아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에 상처받은 길드장은 끝내 운영을 포기해 버리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그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것이니, 우리는 그 무게를 이해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이처럼 길드장의 하루는 예기치 못한 일의 연속이다. 꼭 길드장이 아니더라도 어느 집단이든 규모가 커질수록 통제하기가 어려워진다. 갈등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리더는 그 한가운데서 중재해야 하는 심리적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는다. 이를 ‘집단지도력’이라 한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집단 속에서 중심을 지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회사든 학교든, 혹은 게임 속이든, 리더는 늘 고단하다.
사람들은 리더에게 늘 명확하고 빠른 결정력을 기대한다. 때론 허울뿐인 민주적 절차 속 논쟁 보다, 단호한 선택이 집단을 안정시키기도 한다. 이런 심리를 설명하는 것이 바로 ‘권위에 대한 수용’ 이론이다. 위기상황일수록 구성원들은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끌기보단 빠르고 단호한 결정을 내리는 권위자에게 신뢰감을 가지지 않겠나. 그리하여 수많은 게임 속에서 오랜 길드생활을 지켜봐 온 마른틈씨는 길드장의 ‘독재정권’을 지지하게 되었다.
다만 현실에서만큼은 어떤 리더를 따를지, 그리고 그 결정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를 지혜롭게 선택하는 일이 우리의 몫이 되겠다. 현실은 게임처럼 ‘리셋’이 없고, 길드처럼 마음이 맞지 않는다고 버튼 한 번에 쉽게 탈주할 수 있는 곳도 아니지 않겠는가. 절이 싫어도 중이 떠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니 말이다.
[SYSTEM: 투표 결과 발표]
마른틈 正正一
ㅁr른틈 正一
cracklight 一
무효표 一
[SYSTEM: ‘마른틈’님이 길드장이 되었습니다.]
[SYSTEM: 길드가 해체되었습니다.]
+
마른틈씨는 완장 다는 거 싫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