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 맡겨진 소녀 / 클레어 키건

by 크랜베리

어느 여름, 한 소녀가 엄마의 출산을 앞두고 낯선 친척 집에 ‘맡겨진다’. 무심한 아버지와 지친 엄마 곁에서 자란 아이는, 아이 없이 살아가던 부부의 조용한 시골집에서 처음으로 따뜻한 돌봄과 애정을 경험한다.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 는 약 100쪽 분량의 짧은 이야기지만, 소설의 이야기 만큼은 깊은 여운이 남는다. 한 문장, 한 문장마다 감정을 꾹 눌러 담은 듯한 이 책은, 말로 다하지 않아도 마음에 닿는 힘을 가진다. 잠깐의 시간을 들이면 읽을 수 있지만, 생각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머무는 이야기다.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집>

소녀는 처음으로 자신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공간을 만난다. 무심한 아버지와 지친 엄마 밑에서 스스로를 감춰야 했던 아이는, 아주머니의 말속에서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비밀이 있는 곳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는 거야.” 아주머니가 말한다.

“우린 부끄러운 일 같은 거 없어도 돼.”

“알겠어요.” 나는 울지 않으려고 심호흡을 한다. (27p)


그 짧은 대화가 소녀의 마음을 흔든다. 방어하지 않아도 되는 어른, 감추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 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아이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물에 비친 나>

이 책에서 ‘물’은 중요한 상징으로 반복된다. 씻고, 마시고, 나를 비추는 물. 그 물은 지친 아이를 깨끗이 감싸고, 처음으로 단정한 모습의 자신을 마주하게 해준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30p)


처음엔 초라하고 지쳐 있던 아이가, 씻고, 단정한 옷을 입고, 여섯 잔이나 물을 마신다.


그리고 조용히 바란다.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



<아이를 잡아주는 손>

어린 소녀가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걷는 장면은 짧지만 깊은 울림을 준다. 그저 손을 맞잡은 것뿐인데, 아이는 이렇게 느낀다.


“내가 아주머니의 균형을 잡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30p)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수 있었다는 감각.

그 손이 어른의 균형을 잡아준다는 착각은, 사실은 아이 자신이 이제 누군가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상징처럼 다가온다. 그 감정이 낯설지만 이상하게 따뜻하다. 소녀는 처음으로, 함께 있다는 감정을 느낀다.



<손을 잡는다는 것>

소녀가 아저씨의 손을 잡는 장면에서는, 그동안 받지 못했던 사랑의 빈자리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69p)


처음 느껴보는 따뜻함은 낯설고, 벅차고, 조금은 무겁다. 그래서 소녀는 그 손을 놓아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하지만 말없이 함께 걷는 시간은 아이의 마음을 천천히 진정시킨다. 그렇게 걷는 동안, 소녀는 알게 된다. 손을 잡아주는 건 말보다 더 큰 위로가 된다는 걸.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는 순간>

이 소설에는 침묵이 많다. 말하지 않는 순간에 감정이 깊게 깃들어 있다. 킨셀라 아저씨가 소녀에게 건네는 말은 그래서 더욱 인상 깊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72p–73p)


말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을 지킬 줄 아는 어른.

클레어 키건은 설명보다 여백으로 감정을 전한다.

그 조용한 문장들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마지막 장면, 그리고 “아빠”>

소설의 마지막에서, 소녀는 자신을 데리러 온 아버지 앞에서 무언가를 깨달은 듯 아저씨를 꼭 껴안는다.

그리고 눈을 뜨고 말한다.


“아빠.”

그를 부른다. “아빠.” (98p)


그 부름이 진짜 아버지를 향한 것인지,

자신을 따뜻하게 품어준 아저씨를 향한 것인지는 끝내 알 수 없다. 하지만 바로 그 모호함 속에 이 이야기가 품고 있는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책 속의 문장들


27p

“네, 이 집에 비밀은 없어요."

"비밀이 있는 곳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는 거야." 아주머니가 말한다. "우린 부끄러운 일 같은 거 없어도 돼."

"알겠어요." 나는 울지 않으려고 심호흡을 한다.



30p

이제 태양이 기울어서 일렁이는 물결에 우리가 어떻게 비치는지 보여준다. 순간적으로 무서워진다. 나는 아까 이 집에 도착했을 때처럼 집시 아이 같은 내가 아니라, 지금처럼 깨끗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뒤에서 아주머니가 지키고 서 있는 내가 보일 때까지 기다린다. 그런 다음 머그잔을 물에 담갔다가 입으로 가져온다.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나는 머그잔을 다시 물에 넣었다가 햇빛과 일직선이 되도록 들어 올린다. 나는 물을 여섯 잔이나 마시면서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 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오솔길을 따라 밭을 다시 지나올 때 내가 아주머니의 균형을 잡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없으면 아주머니는 분명 넘어질 것이다. 내가 없을 때는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다가 평소에는 틀림없이 양동이를 두 개 가져왔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나는 이런 기분을 또 언제 느꼈었는지 기억하려 애쓰지만 그랬던 때가 생각나지 않아서 슬프기도 하고, 기억할 수 없어 행복하기도 하다.



57p

길을 따라 걸어가는데 공기에서 뭔가 더 어두운 것, 갑자기 들이닥쳐서 전부 바꿔놓을 무언가의 맛이 난다.



69p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72p-73p

"이상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란다." 아저씨가 말한다.

"오늘 밤 너에게도 이상한 일이 일어났지만, 에드나에게 나쁜 뜻은 없었어. 사람이 너무 좋거든, 에드나는. 남한테서 좋은 점을 찾으려고 하는데, 그래서 가끔은 다른 사람을 믿으면서도 실망할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라지. 하지만 가끔은 실망하고."

아저씨가 웃는다. 이상하고 슬픈 웃음소리다.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아저씨가 말한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97p

아저씨는 나를 보자마자 딱 멈추더니 꼼짝도 하지 않는다. 나는 망설임 없이 아저씨를 향해 계속 달려가고, 그 앞에 도착하자 대문이 활짝 열리고 아저씨의 품에 부딪친다. 아저씨가 팔로 나를 안아 든다. 아저씨는 한참 동안 나를 꼭 끌어안는다. 쿵쾅거리는 내 심장이 느껴지고 숨이 헐떡거리더니 심장과 호흡이 제각각 다르게 차분해진다. 어느 순간, 시간이 한참 지난 것만 같은데, 나무 사이로 느닷없는 돌풍이 불어 우리에게 크고 뚱뚱한 빗방울을 떨어뜨린다.



98p

나는 손을 놓으면 물에 빠지기라도 할 것처럼 아저씨를 꼭 붙든 채 아주머니가 목구멍 속으로 흐느끼다가 울다가를 반복하는 소리를 듣는다. 꼭 한 명이 아니라 두 명 때문에 우는 것 같다. 나는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지만 그래도 억지로 뜬다.

더욱 심오한 무언가 때문에 나는 아저씨의 품에 안긴 채 꼭 잡고 놓지 않는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아빠."




짧은 책이지만 마음에 오래 남는 이야기를 찾고 있다면, 이 책을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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