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윌라에서 스토너 오디오북을 듣기 시작했다. 윌라의 차갑고 단단한 낭독은 처음에는 몰입되었지만, 어느 순간 이 목소리로는 끝까지 듣기 조금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밀리의 서재에도 있을 것 같아 찾아보니, 다행히 오디오북이 올라와 있어 밀리의 서재에서 완독 할 수 있었다. 스토너라는 인물의 조용한 삶을 따라가기엔 밀리의 서재의 부드러운 톤이 훨씬 잘 어울렸다. 마치 한 사람의 생을 무대 위에서 천천히 조명하는 연극을 보는 느낌이었다.
또한 듣기만 하기에는 아까운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 윌라의 전자책과 실제 책을 빌려 밑줄을 많이 그으며 읽었다. 기억해두고 싶은 문장이 많았기 때문이다. 오디오북과 전자책을 동시에 따라가다 보니, 장면들이 눈과 귀에 동시에 들어오며 몰입감이 훨씬 깊어졌다.
스토너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답답함도 있었다. 참고 또 참고, 능력이 있음에도 끝내 활짝 펼치지 못한 채 조용히 흘러가버린 삶.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답답함이 현실적이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역시 늘 뜻대로 흘러가지는 않으니까. 그래서인지 스토너의 이야기는 조용하지만 오래 마음속에 남았다.
1장.
“창문으로 비스듬히 들어온 햇빛이 동료 학생들의 얼굴에 안착해서, 마치 그들의 안에서 나온 빛이 어둠에 맞서 퍼져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한 학생이 눈을 깜박이자 가느다란 그림자 하나가 뺨에 내려앉았다. 햇빛이 뺨의 솜털에 붙들려 있었다.”
“램프의 불빛이 구석의 어둠에 맞서 너울거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열심히 바라보고 있으면 어둠이 빛 속으로 모여들어 그가 읽던 책에 나오는 상상의 모습들을 펼쳐 보였다.”
3장.
“전에는 죽음을 문학적 사건 또는 불완전한 육체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조용하게 마모되어 가는 과정으로만 생각했다.”
7장.
“그는 밭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마른 흙 한 덩이를 손으로 집었다. 그리고 그것을 부스러뜨리며 달빛 속에서 어둡게 보이는 흙 알갱이들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제 두 분은 평생을 바친 땅속에 누워 있었다. 땅은 앞으로 서서히 두 분을 자기 것으로 만들 것이다. 습기와 부패의 기운이 두 분의 시신이 담긴 소나무 상자를 서서히 침범해서 두 분의 몸을 건드리다가, 마침내 두 분의 마지막 흔적까지 모조리 먹어치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두 분은 이미 오래전에 자신을 바쳤던 이 고집스러운 땅의 무의미한 일부가 될 것이다.”
그의 부모가 결국 땅으로 돌아가는 장면은 잔인할 만큼 현실적이지만, 동시에 묘하게 평온한 느낌이었다.
11장.
“마치 그가 알고 있던 것들이 때로 머리에서 싹 비워져 버리는 것 같았다. 그의 의지력이 모든 힘을 잃어버리는 것 같기도 했다. 가끔은 자신이 식물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자신을 찔러 활기를 되찾아 줄 뭔가를 갈망했다. 고통이라도 좋았다.”
“자신의 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과연 그랬던 적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곤 했다.”
“그 하얀 풍경 위에서 움직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죽음 같은 풍경이 그를 잡아당기고, 그의 의식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공기 중의 소리를 끌어당겨 차갑고 하얗고 부드러운 눈 밑에 묻어버릴 때처럼. 그는 자신이 그 하얀 풍경을 향해 끌려가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 한없이 펼쳐진 하얀 풍경은 어둠의 일부가 되어 반짝였다. 마른 눈 속에 발을 디딜 때마다 뽀드득 소리가 억눌린 듯 커다랗게 울리는 것을 의식하면서.”
스토너의 내면이 얼마나 조용히 무너져가고 있는지는 이런 문장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16장.
“그가 너무나 오랫동안 속에 담아두었던 그 상실감이 쏟아져 나와 그를 집어삼켰다.”
이 한 문장에 그의 삶 전체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스토너는 큰 사건 없이도 한 사람의 삶을 이렇게 고요하고 깊게 그릴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책이다. 평범한 하루들이 모여 인생을 만드는 방식, 그 안에서 조용히 피어오르는 감정들,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내면의 변화들을 아주 세밀하게 담고 있다.
오디오북으로 들으며 읽었더니 장면이 귀와 눈을 동시에 적시며 마음속에 오래 남았다. 서늘한 공기, 해가 기울어지는 교정, 스토너의 조용한 걸음까지 그림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읽는 동안 마음은 차분해지고, 오랜만에 속도가 느려지는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평범한 이야기인데도 오래 여운을 주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