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니까 쓰는 거지. 그거.

by 오로라

머리카락에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바로 흰 머리카락. 나이가 들면서 노화가 진행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막상 거울을 볼 때마다 흰 머리카락을 목격하는 것은 유쾌하지 않다.


엊그제 염색을 한 것 같은데 고새 하얀 속살을 드러내고는 ‘안녕?’ 하고 인사를 하는데 살포시 무시한다. 그렇게 며칠을 더 보내게 되면, 머리카락 한 올에 두 가지 색이 공존하는 블랙 앤 화이트 존이 생겨나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한 달 새 머리카락이 이렇게나 길게 자란다고? 하는 인체의 신비를 깨닫기도 한다.


또 신기한 점은 흰 머리카락의 영토 확장은 엄청나게 은밀하고 빠르다는 것이다.


서른 중반에 아이를 낳고 정수리 쪽에서 빼꼼하고 고개를 내밀던 녀석들이 몇 년이 지나자 이제는 옆머리까지 공략하고 있다. 사실 옆머리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포니테일로 머리를 묶은 나를 유심히 보던 남편에 의해 그들의 행적이 발각되었다.

참 부지런도 하다.


누군가 그랬다. 옆머리에 나는 흰 머리카락은 노화의 증거라고. 노화의 증거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몰랐는데.. 나이를 먹고 있었구나.”


아직도 서른 초반인 것 같은데. 갑자기 나이가 선명해지는 것 같다.


서글픈가?


아니. 그렇진 않다. 그만큼 내가 추억할 수 있는 기억들이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며 웬만한 일은 부들부들 떨지 않고 흘려보낼 여유도 생겼고, 아니다 싶으면 확실하게 끊어내는 결단력도 생겼다. 물론 아직 흔들릴 때는 있지만 뭐 그래도 서른의 나보다는 낫다.


그래서 나는 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런데 딱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바로 ‘나잇값’.


나잇값의 딜레마


나잇값이란 말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후부터 직, 간접적으로 함께 해왔던 것 같다. 고3 시절 만우절 날엔 “나잇값 하자.”라고 하셨던 담임선생님의 말씀에 장난치고 싶었던 마음과 나잇값을 하고 싶었던 마음이 공존했었던 기억이 있다.


좀 더 나이가 들었을 땐, 머리 모양 때문에 친구에게 “나잇값 좀 해라.”라는 말을 들었었다.

민망한 마음에 “그럼 양 갈래 머리는 몇 살까지 할 수 있는 건데?” 하고 묻자, 친구는 한숨을 푹 쉬며 ”어쨌든, 우리 나이엔 오버야. “라고 했다. 그때 친구의 표정이 꼭 ‘꼴 보기 싫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이 후엔 양 갈래 머리를 하지 않았다.


지금은 나잇값 좀 해라.라는 말은 듣지 않는다. 나잇값에 대한 논란이 나올 거리를 만들지 않는다고 하는 게 맞겠다. 예를 들면, 크롭 티셔츠를 입고 싶은데, “악! 글쓴이 배꼽 안 본 눈 삽니다!!”라는 반응을 볼까 두려워, 제일 큰 사이즈를 사서 입는다. 남들이 볼 땐 보통의 티셔츠지만 나에게는 크롭티셔츠이니 나름 만족스럽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 나잇값은 선택 후 민폐의 유무라고 볼 수가 있겠다.


그렇다면 내가 로맨스 소설을 쓰는 것은 나잇값의 문제인가? 한동안 고민하고 고민했던 질문이다.


글을 쓰던 어느 날 죄책감이 훅하고 나를 훑어갔던 적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주인공의 ‘키스신’ 때문이었다. ‘뽀뽀를 쪽 했습니다.’라고 쓰기엔 너무 동화다웠다. ‘전체연령감상가능‘을 지향하지만, 손만 잡아도 설레는 상황을 연출하기에 나의 글솜씨가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택했다. 15세를.


그 후에 창피함이 몰려왔다. 나잇값 못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너무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그래서 한동안 앉아서 생각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민폐를 끼치는 건 아니니 괜찮다고 나를 토닥였다.


호기롭게 시작했던 로맨스 소설 쓰기는 회를 거듭할수록 나에게 큰 숙제들을 던져주었다. 생각지도 못한 감정들이 마구 쏟아졌다. 그걸 나름대로 열심히 처리하느라 처음 먹었던 용기 조각이 점점 닳아 없어지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이봐!”


의기소침해지려는 찰나,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반골이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누가 너 보러 나잇값 못한다고 그랬어? 아니잖아. 왜 혼자 그러고 앉았어!! 그리고 생각해 봐라. 어른이니까 쓰는 거지. 뽀뽀하는 거.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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