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회로

by 오로라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말 그대로 이상하다. 소설을 쓰기 시작하며 생긴 내 머릿속 로맨스 회로가 시도 때도 없이 작동한다. 그럴 상황이 아닌데도 상황을 재구성하고 핑크빛 기류를 팡팡 내뿜게 하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저녁에 편의점을 가기 위해 길을 나서는데 쓰레기를 낑낑거리고 옮기고 있는 젊은 여성을 보았다. 로맨스 세포가 없었던 시절엔, “오! 엄마 심부름.”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거나. 그런데 상황을 꾸미기 시작했다.


[금요일 저녁 영희가 두 손 가득 재활용쓰레기를 들고 낑낑거리며 분리수거장으로 향하고 있다. 그때 뒤에서 탁탁탁 달려오는 발소리. 영희는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고, 오랜 시간 동안 친구로 지냈던 철수가 웃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어! 이번 주에 못 온다 하지 않았어? “

철수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으며 영희의 손에 들린 재활용 쓰레기를 들어준다.

“잘됐다. 동창회 가서 맘 놓고 술 마실 수 있겠다.”

영희는 쓰레기를 건네주며 활짝 웃는다. ]


이야기를 짓고 난 후, “하지만 철수는 서브 남주. 진짜 남주는 민수.”라고 인물설정까지 하고 나면 마무리가 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의 상상의 대상이 되어준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언제나 분홍빛의 상황을 그리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버스정류장에서 이어폰을 끼고 있는 남성을 보았는데, 그 사람의 얼굴이 슬퍼 보였다. ‘슬픈 노래를 듣는 건가?’라는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오지 않을 여자를 기다리고 있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는 그녀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라는 실연당한 남주의 상황을 그려내고 있었다.


물론, ‘그 후엔 말괄량이 여주를 만나 좌충우돌 로맨스를 그려나간다.’ 까지가 내 상상의 마지막이지만 (상상의 결말은 언제나 해피엔딩) 알 수 없는 죄책감이 생기기 시작했고, 마음대로 움직이던 로맨스 회로도 주춤해졌다.


철저한 무관심을 바탕으로 한 글쓴이의 이성관계


이건 주눅이 들어 있는 내 로맨스 회로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림과 동시에 자신 있게 작동하길 바란다는 소망을 실어 생각해 낸 방법이다.


서로에게 호감이 없는 남녀의 행동을 어떻게 재구성하면 분홍빛깔 가득한 로맨스 분위기를 낼 수 있을까? 바로 이것이 핵심!


어! 그럼 남사친, 여사친 이야기?


아니다. 친구도 서로에 대한 호감이 존재해야 이루어지는 관계며, 인간적으로 서로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친구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니 패스.


사실 이 방법에 대해 생각했을 때 떠올랐던 일화는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 방법은 일회용 아닌가?’라는 걱정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걱정은 노노. 한 가지 상황이라도 선택에 따라 여러 가지의 경우의 수가 발생할 수 있는 게 인생사니 말이다.


상황은 이러했다. 스튜어드를 준비하고 있던 대학생의 과외를 하고 있었을 때였는데,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지만, 서로에게 이성적인 감정이 없었다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편하게 이야기하고 편하게 수업을 진행했었는데, 어느 날 그 학생이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차비를 아낄 수 있다는 생각에 흐뭇해져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는데 , 누군가 열어둔 복도의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비둘기 십수 마리가 엘리베이터로 가는 통로를 점령하고 있었다.


나는 ”어. 비둘기네. “라고 이야기하며 문 앞에 서 있었고, 뒤따라오던 학생은 비둘기를 보자마자 ”월악! “ 소리를 내며 문밖으로 나를 밀어내고는 현관문을 쾅하고 닫았다.


비둘기들은 그 학생의 사자후에 놀라 도망갈 창문을 찾겠다고 날갯짓을 하며 파닥거리는 대환장 파티를 벌였고, 나는 그 난장판의 한가운데에서 이도 저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이게 뭐지?라는 생각을 하며 일단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는데, 복도에 비둘기가 있는 한, 그 학생이 나올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학생의 어머니가 나오셔서 ”선생님, 죄송해요. “라고 말하며 비둘기를 쫓아주셨다. 뒤이어 나온 학생은 엘리베이터에 타며 “전 새가 너무 무서워요. 다리밖에 없다는 게 정말..”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행동에 대해 변명을 했었다. 당시 나는 ‘뭐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었고 별생각도 없었다.


로맨스 회로 작동 ON


자! 이제 로맨스 회로를 돌려보겠다. 일단, 주인공의 외모는 최고 잘생긴 사람과 최고 예쁜 사람이라고 정해두겠다. 그래야 상상에 개연성이 생기니 말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새로 만드는 데 필요한 조건으로는 여자의 호감으로 입력.


“삐삐릭! 여자는 비둘기를 모두 쫓아내고 현관문을 두드리며 남주에게 말합니다. ‘이제 괜찮아요. 많이 놀랐죠?’라고. 그럼 남주는 발그레진 얼굴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비둘기군단에게 승리를 거둔 여주의 영광스러운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합니다. 삐리 삐리 삐리릭. “


에라.. 삐삐릭 이라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하지만 곧 로맨스 회로가 바뀐 과정에 적응하리라고 믿는다. 조금만 더 힘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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