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 냉장고

by 오로라

집 근처에 아이스크림 가게가 생겼다. 알록달록한 가게의 외관이 동네에 활기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았다. 그건 아마도 내가 아이스크림을 좋아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낀 것일 수도 있겠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아이스크림 가게답게 냉장고들이 질서 정연하게 아이스크림들을 품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 종류의 아이스크림들이 냉장고 안에 가득 들어가 있는데 보기가 참 좋았다.


어린 시절에 좋아했던 아이스크림부터 요새 건강을 생각해서 나오는 당 제로 아이스크림까지. 아이스크림 바(하드)부터 시작해서 콘까지. 낱개 아이스크림부터 상자 아이스크림까지. 카테고라이징 되어 있는 냉장고를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지기까지 했다.


바구니를 들고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을 잔뜩 골랐다. 계산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참 만족스러웠다. 꼭 부자가 된 것 같았다.


집에 들어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소설을 쓰기 위해 메모장을 열었다. 그런데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글을 쓰기 위해 이전 회차를 읽어보고 또 읽었지만, 도통 상황 전개가 그려지지 않았다. 그렇다. 소재가 똑! 하고 떨어진 것이다. 아이스크림으로 만들어 놓았던 부자 마음이 소재의 부재로 빈털터리 심경으로 고새 바뀌어버렸다.


곧 고통의 시간이 몰려올 것이다.


소설을 연재하면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은 바로 이때가 아닌가 싶다. 물론, 자유연재의 형식으로 내가 올리고 싶을 때 글을 올리긴 하지만, 만에 하나 내 글을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규칙적인 연재가 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기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나 혼자만의 약속이라도 말이다.


그런데 웃긴 점은, 이렇게 집중하려고 하면 할수록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이전 회차의 마지막 이야기가 달려 나가는 여주를 쫓아 달려가는 남주라고 하면, 달려가던 남주가 어딘가에 걸려 넘어지는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다. 그것도 “와당탕 쿵 당.” 소리를 내며 말이다. 여주는 달려가다 이 소리를 듣고 다시 돌아와 만신창이가 된 남주의 얼굴에 자신이 입고 있던 카디건을 씌워주며 말한다. ”당신.. 나에게 빚진 거예요.”라고. 어머나.. 세상에.. 박력이 넘친다. 왜 소원 하나 들어달라고까지 하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만다.


아니면 여주의 달리기가 바람처럼 빨라 도저히 남주가 잡지 못하는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다. 남주는 닿을 수 없는 여주의 뒷모습을 아련하게 바라보며 멈추어 서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느린 게 아니에요. 당신이 빠른 거예요.”라고.

눈빛이 어느 정도로 아련한지를 상상하다 킥킥 웃음을 터트린다.


아이스크림 냉장고와 같은 소재 냉장고


나에게도 소재 냉장고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치 속이 꽉 차 있는 아이스크림 냉장고처럼 말이다. 아무거나 골라 담아도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이야깃거리가 가득 찬 소재 냉장고. 글쓴이가 욕심이 많아 양껏 많이 담아도 한동안 소재가 사라지지 않고, 상황별로 분류가 돼 있어서, ”뭘 쓰면 좋을까?” 하는 생각만으로도 척척! 쓸거리가 튀어나오는 그런 냉장고 말이다.

“오늘은 딸기맛 로맨스! 내일은 초코 맛 로맨스!”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상상만 해도 신이 난다.


아직 밤은 길다. 내일 아침에 못 일어날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추면 되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밤새도록 이런 상상을 끊임없이 하게 될까 봐 겁도 난다.

하.. 그러고 보니 지금 나에게 시급한 것은 소재 냉장고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마음대로 뻗어나가는 불필요한 상상을 삭제해 줄 최면술사가 필요한 것인지도....


“레드 썬! 당신은 이제 셋을 세면 글쓰기에 필요한 생각만 하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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