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 저장의 배신으로 탄생한 뜻밖의 결말
글이 잘 풀릴 때는 이상한 기운이 감돈다.
머릿속은 평온한데 손가락은 미친 듯이 움직인다. 그날이 바로 그랬다.
남주와 여주가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서로 눈이 마주치며 추파를 주고받던 그 순간. 나는 거의 숨을 참고 있었다.
"이 장면이 오늘의 하이라이트다."
심장이 두근거렸고, 키보드 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하이라이트는 너무도 허무하게 끝났다.
커서의 움직임이 키보드의 소리보다 느려지더니, 갑자기 아무 글자도 써지지 않았다. 화면이 얼어붙은 것이다.
처음엔 눈을 의심했다. 혹시 내가 타자를 너무 빨리 쳐서 컴퓨터가 따라오지 못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키보드를 세게 두드려도, 마우스를 이리저리 흔들어도, 화면은 빙판처럼 멈춰 있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10년 전 남편이 결혼기념일 선물로 사준 노트북. 결혼 생활과 함께 굴곡을 잘 버텨온 충실한 전우였다.
배터리도 금방 닳고, 인터넷도 느린 것 같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잘 굴러가길래 은근히 믿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지금, 절정의 순간에 숨을 멈춰 버리다니.
"괜찮아. 자동 저장이 있으니까."
나는 마치 컴퓨터 수리에 도가 튼 전문가처럼 태연하게 노트북을 다시 재부팅했다. 그간 수없이 겪은 멈춤 사태에도 늘 복구는 되었으니까.
하지만 원고를 다시 열었을 때, 화면에 뜬 건 두 시간 전원고였다. 약 120분의 노동이 공중분해된 것이다.
"자동 저장. 넌 대체 왜 선택사항이 거냐!!!"
그제야 알았다. 한글은 자동 저장을 켜놔야 한다는 것을. 나는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사실은 아무도 날 지켜주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순간, 배신당한 주인공들의 모든 감정을 실감했다.
내 글이, 내 남주와 여주가, 자동저장이라는 이름의 배신자에게 납치당한 셈이었다.
복구된 원고의 마지막 문장은 이랬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원래라면 곧바로 여주를 에스코트하며 무도회를 마쳐야 하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젠 평생 침묵하는 남주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글 프로그램이 내 남주의 운명을 결정해 버렸다.
내가 쓴 건 로맨스가 아니라, 그저 추파만 던지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모태 솔로의 회고록이었다.
허무했지만 다시 써야 했다.
억울했지만, 손끝에 남아 있는 기억을 더듬어 문장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기억은 선명했다. 오히려 다시 쓰다 보니 첫 버전보다 대사가 좀 더 매끄럽게 흘렀다.
여주의 망설임은 더 자연스러웠고, 그 망설임을 지켜보는 남주의 눈빛은 더 매혹적이었다.
마치 사라진 문장이 나를 향해 윙크하며 말하는 것 같았다.
"좀 더 잘 써 보라고 내가 도망친 거야."
글을 쓰다 보면 잃어버리는 순간이 많다.
자동 저장을 켜 두지 않아서, 혹은 깜빡하고 저장을 안 해서, 혹은 단순한 실수 때문에.
하지만 잃어버림 속에서 다시 쓰게 되고, 그 과정에서 살아나는 문장이 있다.
마치 빨래를 여러 번 헹궈야 섬유가 더 깨끗해지듯, 글도 한 번 날려 먹어야 더 깔끔하게 살아나는 경우가 있다.
이건 글뿐 아니라 생활도 비슷하다. 사진을 잘못 눌러 날려버린 날엔, 다음엔 더 조심스레 앨범을 정리하게 된다. 김치찌개를 태운 날엔, 다시 끓일 땐 불 조절을 기가 막히게 하게 된다.
잃어버림은 아픔이지만, 동시에 숙련의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오늘도 나는 노트북 앞에 앉는다. 자동 저장은 믿지 못하지만, 다시 써 내려갈 내 손가락만큼은 믿는다.
남주는 결코 ‘아무 말도 못한채‘ 끝나지 않을것이다. 최소한 프로그램 오류보다 끈질긴 내가 붙잡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