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터 속 로맨스가 나의 하루를 기록한다
나는 매일 일기를 쓴다. 적어도 가족들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남편이 퇴근 후 옆에서 궁금증 가득한 눈빛을 보내며 묻는다.
"요즘도 일기 쓰는 거 맞지?"
그럴 때마다 나는 최대한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응. 일기는 매일 써야 일기잖아."
아이는 더 귀엽다. 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면 옆에서 감탄을 내뱉는다.
"엄마는 일기를 진짜 열심히 쓴다."
나는 흐뭇한 마음을 꾹 누르며 고개만 끄덕인다.
사실 일기가 맞다. 다만 가족들이 생각하는 방식의 일기는 아니다.
컴퓨터 화면 속 사정은 조금 다르다.
저녁 반찬 고민 대신 남주가 여주에게 어떤 선물을 건넬지 고민한다. 빨래하기 귀찮을 때는 여주와 남주가
만나는 장소를 코인 세탁방으로 정한다. 심지어 설거지를 하다 떠오른 대사는 그대로 붙잡혀 모니터 속에 저장해 버린다. 나는 분명 일기를 쓰고 있다.
다만 그 일기를 대신 써 내려가는 건 남주와 여주라는 점만 다를 뿐이다.
처음엔 나도 일기와 소설을 구분하려 애썼다.
"이건 진짜 일기장, 저건 창작 일기장"
폴더도 따로 만들었고, 당연히 파일명도 달랐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두 세계가 겹쳐졌다.
장을 보기 위해 수첩에 "두부"라고 적고,
마음속으로는 "여주의 얼굴은 두부처럼 순백이었다."라고 읊조린다.
빨래를 건조기에 넣으면서 "남주의 마음은 뽀송하게 건조되어 가고 있었다."
라는 문장을 떠올리거나,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의 간을 보면서 "여주에 대한 마음이 된장찌개처럼 끓어올랐다."라는 문장을 만들기도 한다.
설거지를 할 때 고무장갑에 붙은 거품을 보며, "남주의 마음은 거품처럼 가볍게 흩날렸다."
라고 써야지 하며 결심하기까지 한다. 심지어 엘리베이터에 탈 때조자 "버튼 하나로 오르락내리락하는 마음"이라는 비유가 불쑥 솟는다.
생활과 소설이 엉겨 붙으니, 모니터는 점점 희극 무대로 변해간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 미쳤나 봐."라고 중얼거린다.
사실 나는 평생 일기를 못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초등학교 시절엔 숙제라서 어쩔 수 없이 빈칸을 채웠다. 어느 날엔 " 아침밥을 먹었다. 점심밥을 먹었다. 저녁밥을 먹었다." 딱 세 줄로 버틴 적도 있었다. 예쁜 다이어리를 사놓고도 몇 장 쓰다 책꽂이에 꽂아둔 채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나는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쓴다. 때로는 그 글은 일기보다 훨씬 길고, 훨씬 솔직하다.
만약 진짜 일기였다면 이렇게 썼을 것이다.
"오늘 빨래를 두 번씩이나 했다.", "아이가 수학 문제 답을 못 찾아서 울었다."
하지만 이 문장이 소설 속으로 들어가면 이렇게 변한다.
"그의 마음은 빨래처럼 구겨져 있었지만, 여주의 미소 하나로 산뜻하게 펴지고 말았다."
"그녀에게 남주는 답이 없는 수학문제였다."
이쯤 되면 일기와 소설의 경계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렇게 쓴 글을 모아 보니, 깨닫게 된다.
나는 내 하루를 기록하지 않았을 뿐, 내 감정을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 입혀 써 내려가고 있었다. 결국 내가 쓴 로맨스는 변장한 일기였다.
내 폴더 속에는 두 개의 세상이 있다.
하나는 여전히 깨끗한 일기장 폴더. 다른 하나는 빼곡히 채워진 소설 폴더.
누군가 내 컴퓨터를 들여다본다면 일기를 쓰지 않은 사람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실상은 반대다.
나는 누구보다 꼬박꼬박 일기를 쓰고 있다. 다만, 그 기록의 주체가 남주와 여주일 뿐이다.
그 기록이 언젠가는 세상에 공개될지, 아니면 나만의 비밀로 남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그 글들이야말로 매일의 나를 가장 정확히 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일기를 쓴다. 남주와 여주가 대신 써 내려가는, 나의 또 다른 하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