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글은 안 써지지만, 세상은 써진다

로맨스 소설을 쓰는 엄마의 세상 채집 기록

by 오로라

집에 있으면 세탁기와 건조기가

번갈아 가며 나를 부른다.

“이리 와서 나 좀 돌려줘.”
그 목소리가 귀신처럼 들린다.


그래서 오늘은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커피 향이 진한 곳으로.
“그래, 오늘은 카페에서 글을 써야겠어.”
마치 드라마 속 작가들처럼 말이다.


머릿속엔 완벽한 장면이 있었다.

창가 자리, 따뜻한 햇살, 라테 거품,

그리고 집중하고 있는 나.
하지만 현실의 나는 휴대폰 하나 들고 있다.
노트북은 무겁고, 콘센트 자리는 늘 만석이다.
게다가 나는 혼자다.
결국 앉을 수 있는 곳은 구석 테이블뿐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꼭 한 문단이라도 쓴다.’
의지를 불태우며 폰을 켰는데,
첫 단어를 쓰기도 전에 옆자리의 대화가 들려왔다.


“내가 진짜 복장이 터져서. 결혼하고 달라졌어. 아주 미워 죽겠어.”

귀가 반사적으로 켜졌다.
내 귀는 늘 자동 녹음 상태다.
커피를 젓는 척하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두 여자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근데 웃긴 건, 그런 사람이 뭐가 좋다고… 발톱을 깎아줬다니까. 내가 진짜 미쳤지.”


오. 이건 시작이었다.
결혼하고 달라진 남편이 미운데 좋다고?
이건 이미 로맨스의 절반이다.
나는 얼른 손가락을 놀렸다.


[미운데 좋아.]


완벽했다.

작가의 영감은 이렇게 우연한 틈에서 들어온다.

그 짧은 순간만큼은 나도 베스트셀러 작가라도 된 듯했다.


하지만 옆자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나 없으면, 아이들 밥은 잘 챙겨 먹여.”

“뭐야. 남편 멋지네.”


그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뒤쪽 테이블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때려치워야지. 더러워서 못 해 먹겠어.”
“그래도 이번 달 월급은 나왔잖아. 월급 밀리는 곳이 얼마나 많은데. 넌 복 받은 거야.”


사랑 이야기가 지나가니

곧바로 현실 이야기가 흘러왔다.
누군가는 가족을 견디고,

누군가는 상사를 견디고 있었다.
카페 안의 공기엔 웃음보다 한숨이 조금 더 많았다.


나는 커피잔을 들어 거품이 꺼진 라테를 한 모금 마셨다. 잔에 든 커피를 바라보는데, 순간 이상하게도 문장이 떠올랐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대사를 연습 중이다.’


누군가는 가족과의 장면을, 누군가는 퇴사 장면을 리허설 중이다. 그리고 나는 글쓰기 장면을 리허설 중.


그때 옆자리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말하고 나니까 속 시원하다. 고마워.”

그녀의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장면을 눈으로 따라가며 생각했다.
사람마다 자신이 버티는 방법이 있구나.
누군가는 수다로, 누군가는 커피로, 그리고 나는 문장으로 버틴다.


사랑, 직장, 위로, 그리고 각자의 사정.
카페는 결국 세상의 축소판이었다.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그냥 커피 한 잔으로 하루를 견디고 있었다.

문득 생각했다.
나는 글을 쓰러 온 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들으려 온거구나.

누군가의 평범한 하루 속에
소설보다 진한 문장이 숨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메모장을 열어보았다.
오늘의 기록은 단 한 줄.


[미운데 좋아]


짧고, 불완전하고, 그래서 진짜였다.
나는 많은 걸 쓰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세상을 들었다.

어쩌면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조용히 듣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한 문단도 쓰지 못했지만 괜찮다.
귀와 눈이, 오늘은 글보다 더 많은 일을 해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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