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저장 되는 우리의 하루
가끔은 문장을 다 지워버리고 싶다.
그럴 때면 삭제버튼을 보며 손가락이 근질거린다.
'이 문장, 왜 이렇게 촌스럽지?'
'이 인물, 왜 이렇게 수다 쟁이지?'
결국 커서를 올리고, 딸깍.
그 순간엔 잠깐의 쾌감이 있다. 마치 오래된 사진을 정리하는 기분.
하지만 곧 후회가 밀려온다.
"지우지 말 걸."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삭제버튼은 사람의 마음을 너무 쉽게 오해하게 만든다.
단지, 눈에 보이지 않았으면 했을 뿐인데 공백을 만들어 버린다.
글뿐만이 아니다.
가끔은 내 하루도 통째로 삭제하고 싶을 때가 있다.
아침에 동네 사람들을 만나서 쓸데없이 떠들어 댔던 수다쟁이의 순간.
아이의 학교 준비물을 깜빡한 순간.
저녁식탁을 위해 열심히 준비했던 돈가스를 태워 먹은 순간.
조금만 더 참고 말을 하지 말걸,
조금만 더 일찍 나갔더라면,
조금만 덜 완벽하려 했다면.
그 '조금만'이 언제나 마음을 괴롭힌다.
그러니 몽땅 다 선택해서 삭제!
그렇게 명령어 하나로 정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속이 시원할까.
하지만 현실엔 삭제 버튼이 없다.
되돌리기 버튼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인생의 프로그램은 삭제 버튼, 되돌리기 버튼 없이 자동 저장만 허용한다.
문장을 지울 때와 마음을 정리할 때는 닮았다.
둘 다 솔직해질 용기가 필요하고,
때로는 지우는 게 아니라 덮어두는 게 나을 때도 있다.
지우려는 건 미련이고, 남겨두는 건 용서인지도 모른다.
로맨스 소설을 쓸 때에도 삭제 버튼을 누르고 싶은 순간이 너무나도 많다.
남주의 고백 타이밍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사랑해라는 말을 입안에 넣고, 다른 말로 뱉어내기 일쑤이다.
"밥은 먹었어?"
"조심히 들어가. 도착하면 연락하고."
"오늘 무척 피곤해 보인다."
사실 이 말들은 모두 같은 뜻이다. 사랑해 대신 건네는, 일상의 우회.
말은 다르지만 마음의 목적지는 같다.
현실의 언어가 가장 솔직한 고백일 때도 있다.
하지만 로맨스 소설 속에서는 그 진심이 종종 불합격 판정을 받는다.
'이건 너무 현실적이잖아. 조금 더 로맨틱해야지.'
그럴 때면 삭제버튼을 향한 손가락이 다시 꿈틀거린다.
하지만 조금 기다리면 안다.
지금은 미완이지만,
결국 이 문장은 다듬어지거나,
혹은 다른 장면으로 변주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그런 걸 보면 글도, 마음도 비슷한 것 같다.
처음엔 다 지워버리고 싶다가도,
시간이 조금 지나면 남겨두길 잘했다고 느낀다.
사라졌다고 믿었던 마음이 다시 돌아오듯,
지운 줄 알았던 문장도 어느새 다시 떠오른다.
그래서 나는 인생처럼 삭제보단 저장을 택한다.
조금 부족하고 어색하더라도 그냥 남겨둔다.
어쩌면 오늘의 실수와 후회들이 다시 쓰일지도 모르니까.
노트북을 닫으면 불빛이 잦아든다.
지우고 싶던 하루가 조용히 저장되어 있다.
태운 돈가스 냄새, 준비물을 깜박한 마음,
그 모든 흔적이 오늘의 문장을 완성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인생은 삭제보다 기록으로 남는 편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