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는 원래 몰래 피는 법이다

사랑은 대문자가 아니라 소문자로 흐른다.

by 오로라

로맨스는 원래 몰래 피는 법이다.

정원에 표지판 들고 “지금 막 피어남!”이라고 외치는 꽃은 없다. 대부분은 어제와 오늘 사이의 틈, 숨 쉬듯 흘러가는 시간 속 어딘가에서 피어나기 시작한다.


내 로맨스 소설도 그렇다.

설거지와 빨래 사이의 공백, 전자레인지 돌아가는 1분 30초 같은 귀여운 시간대에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가장 안전한 화단은 식탁 위다.

아이의 연필, 숙제 공책, 영수증 더미.

그 틈 사이에 내 휴대폰이 살포시 눕는다.

누가 지나가면 화면은 즉시 ‘장보기 목록’으로 변신한다.

“우유, 달걀, 초콜릿, 그리고… 오늘은 심장이 좀 빠르게 뛴다.”


초콜릿 옆의 그 문장은 늘 들키지 않는다.

장보기 목록은 모든 비밀을 감춰주는 만능 담요다.


설거지 시간은 최대 제작비를 지원하는 촬영장이다.

세제 거품은 안개 효과, 젖은 수세미는 빗속 장면, 흐르는 물소리는 배경음.


“그는 그저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쓰고 나면 싱크대 물이 살짝 더 깊어진다.


아이 숙제 감독도 훌륭한 로맨스 타임이다.

아이에게 “받아쓰기 10개”를 외치며 나는 아이 마음을 받아쓰기를 한다.


‘두근거림, 응시, 느린 호흡, 그리고… 지우개.’


아이 손이 지우개로 가는 순간, 나는 남주의 대사를 한 문장 고친다. “사랑해”가 너무 곧장이라면 “오늘 하늘이 참 좋다”로.


‘좋다’는 말은 로맨스의 풍속계다.

내 마음에 바람이 산뜻하게 분다.


저녁엔 새로 들인 식기세척기가 덜컥거린다.

로맨스 소설의 남주보다 말수가 적은 남편이 묻는다.


“무슨 소리야?”

“그릇 소리야.”


나는 다시 로맨스 회로를 돌린다. 그릇 소리와 입맞춤 소리는 가끔 같은 리듬으로 이어진다.

달그락 , 두근 , 달그락 , 두근.

우리 집 비트는 힙합이 아니라 식기세척기다.


배달 문자도 로맨스에 큰 기여를 한다.

“주문하신 음식이 도착했습니다.”

이 문자는 수많은 이별과 재회의 밤을 구했다.

대사는 이렇게 바뀐다.


“늦었네.”


긴장감 높은 순간, 여주의 배가 꼬르륵 울리면

남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조용히 손을 잡아준다. 로맨스에서 ‘배고픔’은 갈등을 눌러주는 최고의 기름기다.


동네 엄마들 단톡방은 스릴러다.

“오늘 알림장에 준비물이 있다고 하네요.”

밤 10시에 이 문자가 도착하면 나는 즉시 소설에 긴장 장면을 넣는다.

지금의 이 마음을 글로 써야 하니까.

준비물도, 눈빛도, 은근히 쪼여야 전개가 빨라진다.


나는 종종 로맨스의 본질을 의심한다.

새 향초, 금빛 튀김옷, 맞춤법 완벽한 대사… 그런 게 사랑의 증거는 아니다.

오히려 로맨스는 조용히 숨어 자라는 풀 같다.

햇빛이 너무 강하면 타버린다.

그래서 나는 몰래 키운다.

들킬까 봐가 아니라, 조용해야 커지는 종류의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해받을 필요도, 박수받을 필요도 없이

‘알고 싶은 마음’ 하나만 있으면 되는 세계.

그 세계에서 “사랑해”는 대문자가 아니라 소문자처럼 흘러간다.

귀에 바짝 붙여야 들리는 말.

가까이 와야 읽히는 글씨체.

몰래 피는 로맨스의 서체는 늘 가늘고 따뜻하다.


물론 들킬 때도 있다.


아이: “엄마, 초콜릿 뒤에 ‘숨멎’이 있어?”

나: “그건… 초콜릿이 너무 좋아서.”


초콜릿은 훌륭한 커버다.

뒤에 어떤 문장을 넣어도 설득된다.

간식장은 초콜릿으로 가득, 메모장은 달콤한 문장으로 가득하다.


어떤 날은 단 한 줄도 못 쓴다.

하지만 그 한 줄을 못 쓴 덕분에

식탁에 놓인 세상의 조도를 보게 된다.

줄무늬 식탁보 사이로 스며드는 오후,

가볍게 흔들리는 컵의 물결, 아이의 지우개 가루,

남편의 코끝에 걸린 먼지 한 톨.


그 모든 게 연출 없는 연출처럼 보이는 순간,

나는 안다. 오늘도 로맨스는 몰래 자랐다고.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장보기 목록에 글을 쓴다.

“우유, 달걀, 초콜릿, 그리고 설레는 웃음.”

이 모든 건 내가 쓰는 로맨스의 핵심 재료다.


가끔은 상상한다.

이 로맨스가 언젠가 공개되면

사람들은 어디에서 가장 크게 웃을까.


내가 의도한 장면에서 웃으면 성공이다.

로맨스는 원래 웃다가 시작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웃음은 경계선을 낮추고, 낮아진 경계 사이로 꽃이 고개를 든다.


밤이 오면 집은 조용해진다.

전자레인지도 쉬고, 세탁기도 쉰다.

그때 휴대폰이 가벼워진다.

나는 가장 조용한 단어들을 꺼내 식탁 가장자리에 한 줄을 붙인다.


오늘의 줄기와 내일의 꽃.

몰래 피는 걸 알기에, 더 오래 본다.


이제 알겠다.

내가 이걸 몰래 쓰는 건 누군가에게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용히, 제대로 피어나게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몰래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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