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시리즈 1편
나는 오늘도 노트북 앞에서 문장을 볶고 있다.
대사 한 줄 굽고, 감정 한 스푼 넣고,
"이 정도면 설레는 걸." 싶은 순간에.
방금까지 노트북 화면 속에 있던 남자가
주방에서 프라이팬을 들고 '흠흠' 소리를 냈다.
표정은 다정한데, 태도는 항의였다.
"작가님, 우리 얘기 좀 합시다."
그는 내가 만든 로맨스 소설 속 남주다.
본업은 요리사.
하지만 내가 시키는 일은 '감정 볶기'.'다정 끓이기' 등
'말로 설레게 하기'다.
주방보다 마음 쪽 노동이 훨씬 많은 사람.
"전 이래 봬도 유명한 파인 다이닝 셰프입니다."
그가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저를 대사 제조기처럼 쓰고 있어요."
나는 변명하려 했다.
"아니. 그건 독자들이 좋아하지 않을까.. 해서.. 뭐..
나도.."
그는 말을 끊었다.
"그건 알겠어요. 근데.. 전 요리사입니다.
감정을 볶는 건 부업이어야 하는데, 당신 소설에선 주업이 되었어요."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계략형 남주답게 그는 노트북 밖에서도 똑 부러지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능숙하게 프라이팬을 뒤집으며 항의 목록을 꺼냈다.
1. 대사 과로
"저도 쉬게 해 주세요. 말도 체력이 있어야 하는데, 당신은 저에게 숨 쉴 시간을 안 줍니다."
2. 직업 미사용
"저 셰프라면서요. 그런데 정작 요리는 거의 안 시키더군요. 저 입으로만 요리하는 남자 아닙니다."
3. 감정 과다 노출
"왜 사랑을 제가 설명해야 합니까? 남편분은 '밥 먹었어?'이 한 줄로 끝내시던데요?"
어이가 없었다. 그가 요리사인건 내가 정했지만, 이렇게 직업의식을 갖고 있을 줄은 몰랐다.
거기다 로맨스 주인공이니까 당연히 달콤하게 감정 노출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귀엽게 항의를 하니, 일단 남주의 생각을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넌 어떤 방식으로 사랑을 하고 싶어?"
그는 프라이팬을 내려놓고 말했다.
"사랑은 천천히 끓이는 겁니다. 센 불에 확 태워놓고
갑자기 '설레!!'라고 종용하지 마세요. 저는 3분 요리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래 정성을 들이는 요리를 하는 사람입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나는 늘 서둘렀다.
문장도, 감정도, 결말도. 얼른 이 한 편을 쓰고,
다음 편도 써야 하니까. 그래서 남주에게 '빠른 설렘'을 강요했다.
내 표정을 살피던 그가 조용히 덧붙였다.
"저는 레시피가 있는 사람인데, 당신은 날마다 즉흥적으로 저를 굽고 있어요. 그것도 설탕을 잔뜩 부어가며."
나는 결국 인정했다. 그의 말이 맞았으니까.
"작가님. 앞으로 감정은 제 타이밍에 맞춰 나갑니다.
저를 설렘 자판기처럼 취급하는 걸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요."
"아니. 그건.. "
당황스러워 변명을 하려는 순간 깨달았다.
내가 쓰는 글이라 모든 걸 조종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내가 만든 캐릭터는 '작가 지시 불복종' 기능을 탑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의 변명이 끝나기도 전에 남주가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제가 직접 제 장르를 선택하겠습니다."
"응??"
"제가 원하면 로맨스도 하고, 제가 원하면 서사도 만들고, 제가 원하면 요리하는 장면도 넣을 겁니다. 당신은 그냥.. 문장만 써주세요."
뻔뻔한 요구에 입이 떡 벌어졌다.
"아니. 이건 로맨스라고. 주인공이라고 장르를 막 정하면 안 돼."
"식당에 가면 메뉴 고르는 자유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하물며 저는 소설의 주인공인데 내 삶의 조리권 정도는 줘야 공평할 것 같은데요."
나는 대답 대신 한숨을 푹하고 내쉬었다.
그러자 그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재촉하지 말고 조금만 믿고 기다려 주세요.
저도 맛있게 설레게 해드리고 싶으니까요."
그 말은 전과는 다르게 약간의 다정함이 섞인 조언 같았다.
"한 가지만 약속해 주세요. 대사를 요리처럼 써주세요.
너무 급하게 굽지 말고, 차례차례 순서대로. 읽는 사람이 천천히 음미할 수 있게."
그제야 알았다. 이 남자, 결국 나에게서 설렘 주도권을 가져가려는 중이었다. 그 방식이 다정해서 그렇지, 여전히 계략형이었다.
기분 나쁜것도 잠시.
그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나는 그의 조언대로 감정이 익어가는 그 시간을 배워보려고 한다. 대사도 시간을 들여 우려내고, 설렘도 천천히 농도를 맞추면서 말이다.
결국,
로맨스도, 글쓰기도, 삶도
빨리 완성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오래 버티는 온도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 온도는 서두르지 않을 때 비로소 유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