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정리의 철학

로맨스 소설을 쓰는 엄마의 냉장고 실험기

by 오로라

냉장고 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에 닿는 순간, 무언가 나를 쳐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김치통 옆에서 멀쩡한 척 서 있는 딸기잼 하나.

라벨은 여전히 신선한데, 그 표정엔 약간의 불안이 깃들어 있었다.

유통기한을 확인하려 통의 아랫면을 확인하니 희미하게 쓰인 숫자가 보인다.

"우와.. 작년이네."


남편이 물었다.

"그걸 왜 아직 안 버렸어?"

나는 최대한 당당하게 대답했다.

"언젠가 먹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 언젠가는 나에게 편리한 단어다.

집안 어딘가에 잠자고 있을 물건들의 생명 연장권.

하지만 대부분의 언젠가는 오지 않는다.


냉장고 속은 나에게 과거의 의지 보관소라고 할 수 있다.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사다 둔 큐브 닭가슴살.

홈카페 열풍에 휩쓸려 사다 둔 시럽.

남편의 힐링 안주로 쓰겠다고 사둔 치즈.

모두 다 한때의 열정과 유행, 즉흥적인 다짐의 잔해들이다.


냉장고 정리는 매번 작지만 진지한 싸움이다.

버릴 것과 남길 것을 결정해야 하니까.

매번 반찬통 뚜껑을 열 때마다,

"음. 이건 아직 괜찮겠어."라면서

손끝으로 눌러보고, 냄새를 맡고 다시 넣어둔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음 정리 때도 또 거기에 있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결국 썩는 건 언제나 과거의 미련이 묻은 음식이다.


남편은 냉장고를 단순한 보관함으로 본다.

"유통기한이 지났잖아. 버려."

그에게 냉장고는 기능적 공간이다.

하지만 나는 감정의 창고로 본다.

"아직 마음의 기한은 남았어."

그 말은 나에게 하는 변명 같기도 하다.


사실 나는 냉장고를 열 때마다, 내 안의 미련도 함께 꺼내 본다.

그 시럽은 홈카페를 준비하며 즐거웠던 나를 기억하게 하고,

그 치즈는 남편과 와인 한 잔 하던 저녁을 떠올리게 한다.

그 시절의 나는 뭔가 열정적이었고, 예뻤던 것 같다.

그래서 쉽게 버릴 수가 없다.


하지만 냉장고는 정직하다.

'지나간 건 썩는다.'

결국 냄새가 나기 전에 버려야 한다.

음식이든, 감정이든.


딸기잼 뚜껑을 열자 묘하게 쉰 향기가 났다.

'달콤함도 오래 두면 변한다.'

그 문장 하나가 머릿속에 박혔다.

"이건 오늘 소설에 써야겠다."

순간, 로맨스 소설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사랑도 그렇다. 표현하지 않는 감정은 변한다.

서랍 속 편지처럼, 냉장고 구석의 잼처럼.

한때는 진심이었지만, 말하지 않고 두면 썩는다.

사랑의 유통기한은 날짜로 찍히지 않는다.

대신 표현으로 갱신된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해 줄 때마다, 기한은 연장된다.


나는 딸기잼을 버리고, 냉장고 선반을 닦았다.

닦아내는 동안 이상하게 마음이 후련했다.

유통기한을 지키는 일은 결국 현재를 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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