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 마취 앞에서 나는 이상한 걱정을 한다.
수면내시경을 예약했을 때까진 아무렇지 않았다.
그저 배 좀 비우고, 자고 일어나면 끝나는 익숙한 절차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수면마취'라는 단어였다.
거기서부터 심장이 슬쩍 BPM을 올리기 시작했다.
'잠든 동안..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너무 걱정되는데.'
TV에서 종종 수면 마취 후, 의식과 상관없이 중얼거리던 연예인들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제야 떠올랐다.
나는 로맨스 소설을 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갑자기 걱정이 밀려왔다.
무슨 말을 할지 나조차도 알 수 없으니 말이다.
문제는, 키스신, 포옹신, 고백신 대사들이
버스 하차 버튼처럼 언제든 누르면 튀어나올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여기.. 키스 들어가야지."
"여기는 포옹."
더 무서운 상상은 대사로 연기를 하는 나 자신이었다.
"오늘 너 때문에 공기가 바뀌었어."
"괜찮아. 천천히 와도..
"기다릴 수 있어.."
아아...
이런 말은 모니터 안에서만 빛난다.
현실에서 들으면 그냥 이상한 사람이다.
마취 중에 이걸 말한다?
그건 거의 내시경실 한복판에서 '로맨스 소설 낭독회'를 여는 꼴이다.
병원에 도착했지만 머릿속은 시술이 아니라
'입단속 작전회의'로 가득했다.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심장박동 때문인지 간호사 선생님이 물었다.
"긴장되세요?"
'아.. 사실은 제가 쓰는 로맨스 소설 속 남주가
수면내시경실까지 따라올까 봐 걱정되어요.'
라는 말은 할 수 없으니,
"조금요." 하고 웃었다.
침대에 누워 팔을 내미는 순간,
머릿속 입조심 경비대에서 사이렌을 울렸다.
-삐용삐용!
-대사 금지.
-연기 금지.
-그냥.. 가만히 있으시오. 제발.
경비대원들이 미니어처 병정처럼 우왕좌왕 뛰어다녔다.
의사 선생님께서 말했다.
"금방 끝납니다."
금방이요?
나에게 중요한 건 시술 시간이 아닌
내가 의식을 붙잡고 있을 시간이었다.
약물이 들어오자
눈꺼풀에 모래주머니가 달린 것 마냥 툭 하고 내려왔다.
나는 마지막 남은 정신력을 주먹 쥐듯 모아 외쳤다.
'제발... 입.... 조... ㅅ."
마취의 힘 앞에서 인간의 의지는 정말 미약했다.
마취는 역류하는 거대한 파도처럼 나를 덮었다.
모든 소리는 먹먹한 파도 속으로 잠기고, 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눈을 뜨자 간호사 선생님이 웃으며 물었다.
"정신 드셨어요?"
"아이.. 아이.. 제가."
"더 누워계세요."
총총총 뒷모습을 보이며 떠나는 간호사 선생님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몸을 가누게 되고 나서 조심히 물었다.
"혹시.. 제가.. 실수라던가."
"없어요. 잘하셨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안도가 밀려왔다.
입단속 경비대가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나의 남주는 병원 문턱을 넘지 않았고, 조용히 모니터 안에서 머물러 있었다.
로맨스는 역시.. 깨어 있을 때만 하는 게 맞다.
낄낄 빠빠 남주. 넌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