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로맨스 소설 여주라면,
남편과 사랑에 빠졌을까?

드라마틱하진 않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가는 사람

by 오로라

가끔 이런 상상을 해본다.

내가 로맨스 소설의 여주라면.. 과연 남편과 사랑에 빠졌을까?


여주인공은 보통 이렇다.

어딜 가든 조명 잘 받고, 위기 상황에서는 늘 멋지게 탈출하며,

감정은 또렷하고 대사는 명료하다.

특히 로맨스 장르 여주는 사랑에 빠질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잡는다.

운명, 구원, 케미, 심쿵,

초보 운전인 나라도 책 속에서는 능숙하게 차선을 변경할 수 있는 그 느낌적인 느낌.


그래서 상상해 봤다.

정말 내가 그런 여주라면,

현실의 남편과 사랑에 빠질 수 있었을까?


로맨스 소설 속 남주는 대부분 이렇다.

걸을 때 바람이 살짝 불어와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미소만 지었을 뿐인데 독자들의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시련은 깊고 과거사는 드라마틱하며,

표정은 미묘하게 흔들리고,

때로는 그 표정 하나가 세계관을 좌우하기도 한다.


반면 현실의 남편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리면 모자부터 찾고,

매력적인 미소 대신 "음식 태웠어?" 라며 저녁 식탁의 안부를 확인한다.

과거사는 드라마틱하진 않지만,

가족과 치킨을 먹을 때 부인과 딸에게 닭다리를 양보하느라

닭다리가 허락되지 않았던 날들의 슬픔 정도는 있다.

표정은 미묘하게 흔들리는 건 본 적 없지만,

피곤할 때 눈이 반쯤 감기는 실용적인 움직임은 아주 확실하다.


이쯤 되면 장르가 다르다는 느낌이 확 든다.

로맨스 남주는 판타지이고,

내 옆에 서 있는 남편은 현실이다.


예를 들면, 내가 우울할 때 남주는 말없이 안아주겠지만

남편은 조용히 "치킨 먹을래?"라고 묻는다.

근데 그게 또 기가 막히게 위로가 된다.

이건 현실의 장점이다. 효율적이고 맛있다.


그리고 남편에게만 있는 '현실 로맨스력'이 있다.

내가 병원에 갈 때 옆에서 괜히 같이 긴장해주는 사람.

새벽에 내가 불안해서 깼을 때 말없이 물 한 컵을 건네주는 사람.

하자보수, 층간소음, 청약, 대출 같은 현실의 전쟁터에서

가족을 위해 묵묵히 서 있는 사람.


만약 내가 로맨스 소설의 여주라면?

초반에는 남편 같은 사람에게 크게 관심을 못 가졌을지도 모른다.

왜냐면 드라마틱한 장면이 없으니까.

심장박동을 흔드는 배경음도 없고,

비 오는 날 우산 씌워주면서 슬로모션으로 돌아보는 장면도 없고,

태양 아래서 은색으로 빛나는 자동차도 없다.


하지만 이야기 후반부쯤,

내가 진짜 넘어야 하는 장면이 나왔을 때.

지치고, 흔들리고, 쉽게 무너지려고 하는 장면!

그때 딱!!! 나타나서

"괜찮아. 같이 하자."

이 한마디를 해줄 사람은 남편이었을 것 같다.


내가 로맨스 소설의 여주라면 남편과 사랑에 빠졌을까?


빠졌을 것이다.

대신 내가 먼저 티를 내고,

남편은 알아차리는데 시간이 좀 걸렸을 것이다.

아마 둘이 이어지는 건 3권쯤이 아닐까 예상해 본다.


그리고 그 후로는 잔잔하게 오래가는 사랑을 했을 것이다.

현실의 생활력으로, 꾸준하게, 매일 조금씩.


결국 나는 판타지를 쓰는 사람이지만

현실에서는 현실의 사랑을 배우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로맨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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