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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베트남2_ 하노이(1)

2010년에 보기 시작한 베트남의 역사 등. 또한 한국과의 미래

첫째 날_ 한-베 협력사 건설현장 및 모델하우스 → 호찌민 묘 → 한국대사관 → 수상 인형극
베트남 여행_ 도시별 정리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베트남으로 여행을 간다면 하노이는 정치, 사회 등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주로 가며 인근에 있는 섬인 하롱베이와 함께 4일 전후로 다녀오는 경우가 많다. 반면 다소 젊은 사람들은 '동양의 파리'로 불리는 프랑스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호찌민으로 가서 인근에 해변이 있는 푸꾸옥 및 나트랑과 함께 다녀오는 편. 그 외에 휴양으론 요즘은 동부 해안가 도시들인 호이안, 다낭을 가는 듯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최근 다낭에 놀러간 한국인이 감전사로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전기에 감전된 것도 미숙한 베트남 호텔 서비스이며, 이후 빠른 구급조치를 못한 것도 아쉬울 뿐. 한국처럼 시스템이 훌륭하고 초동조치 등이 빠르게 이뤄지는 곳도 별로 없다. 운이 참 좋지 않은 사례지만, 내가 먼저 조심할 준비는 갖춰가면서 여행도 해야 한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하노이 [ Hanoi, 河內 ]
요약: 베트남의 수도이자 역사와 정치 중심지이다. 베트남 북부에 위치하며 규모와 인구수에서 남부의 호찌민보다 작지만 역사와 정치적 측면을 고려할 때 베트남을 대표하는 도시이다.

원어명: Hà Nội
위치: 베트남 북부 / 면적(㎢): 3,344
행정구분: 12개 군(Quận, 郡), 1개의 시사(thị xã, 市社), 17개의 시외 현(Huyện, 縣)
인구(명): 8,993,082(2019년)

하노이 확대 계획에 따라 하떠이성(Hà Tây) 전역과 빈푹성(Bình Phước), 메린현(Mê Linh), 호아빈성(Hòa Bình), 르엉선(Lương Sơn)에 있는 4개의 현(縣,Huyện)이 2008년 8월 1일에 하노이로 합병되며, 하노이의 면적은 약 3.6배, 인구는 약 2배의 규모로 커졌다.

하노이의 역사는 서기 210년경부터 시작되었으며, 1010년 전 레[前黎] 왕조의 국왕 리타이또(Lý Thái Tổ, 李太祖, 리태조)가 수도를 오늘날의 하노이 지역인 '탕롱(Thang Long, 昇龍)'으로 옮긴 이후부터 쩐 왕조와 호 왕조 시기까지 하노이는 베트남의 수도로서 역할을 하였다. 프랑스 식민지배 당시(1875∼1945)에는 인도차이나반도의 중심지로 성장하였고, 1945년 식민 지배를 벗어난 후에는 베트남의 공식 수도가 되었다. 1975년 이후 베트남 최대의 경제중심도시인 호찌민에 투자와 인프라가 대거 구축되며 상대적으로 경제적 격차가 커졌으나, 2008년 이후 하노이 확대 계획에 의해 수도로서 정체성과 이념면에서 발전이 진행되고 있다. 2010년 9월 도시건설 1,000년을 맞이한 유서 깊은 도시이다.

하노이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본청과 1996년 자매교류를 맺었으며, 하노이 내 롱비엔군과 하이바쯩군이 각각 경상남도 거창군(2018년 11월 14일), 부산광역시 금정구(2004년 11월 16일)와 우호교류를 맺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노이 [Hanoi, 河內]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SNUAC))


그렇게 하노이, 베트남에서의 실제 탐방 첫날 아침이 밝았다.

단체 한국인들의 투숙이라 한식에 가깝게 요리해주었던 조식

지금은, 외국에서 이렇게 한식을 조리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임을 알게 되었다. 귀했던 한식.


기상 후 8시 전까지 식사를 마치고 호텔 로비에 집합했다. 단체 여행은, 인솔자의 규율을 잘 지켜줘야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같이 여행을 할 때 '같은 시간을 공유'하면서 보내는 것이므로. 내가 늦는다면, 다른 사람이 그곳에서 보낼 오감의 시간 또한 지체하고 뺴앗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익히 소문으로 들었던, 오토바이가 이동수단으로 월등히 많다는 이곳의 소식이 실감이 났다

이날 오전의 첫 일정은 한-베 합자 건설회사의 주상복합 건설현장 방문. 한국의 우수한 건축 기술을 해외에서 인정받아, 실제 건설이 이뤄지고 있는 곳에 가보는 귀중한 경험이었던 것. 이곳에선 바로, 한국의 두산중공업 회사가 주재하고 있었다.

아마 지금은 멋진 타워로 완성됐을 듯한 이곳! <구글맵>

이 현장을 지금 보면서, 한국은 1970년 이후 이런 식으로 미국 등의 원조를 받아 한창 건설을 했었을 때란 생각이 들었다. 원조를 받던 한국에서, 한국인의 철두철미함을 더해 이렇게 언제부턴가 타국으로 건축 기술로 수출에 이바지를 어느새 해가고 있었던 것. 특히 건설 분야는 고도의 설계와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섬세함, 꼼꼼히 관리해야 하는 점 등이 검증돼야 가능하며 세계적으로 수출을 할 수 있는 나라가 몇 되지 않는 것으로 안다. 세계적으로 이름 있는 건축물에 한국 건설의 기술력이 있다. 싱가포르의 상징인 '마리나베이샌즈'는 쌍용건설, 올해 튀르키예(터키)에 지은 세계 최장 현수교라는 '차나칼레 대교'는 DL이앤씨-SK에코플랜트에서 시공했다. 그런 점에서 이걸 다시 보는 지금, 괜스레 더욱 뿌듯한 기분도 들었다.


건물의 완성된 모습을 볼 수 있는 모델하우스 또한 방문, 자세한 설명도 들었다. 지금이라면, 투자 관점에서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듯.


하노이에서 예뻤던 몇 장면 중 하나로 기억

당시 우리가 탐방할 때의 하노이의 모습들은 넓고 자연적인 공간이 많아서, 이런 알록달록하게 조화로운 건물이 있는 곳은 자주 보진 못했다. 대형버스를 대절해 타고 다녀서 직접 도보로 다니며 못 보기도 했지만.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들어가는 길에 마주했던 예쁜 풍경을 남겼는데, 이 장면이 기억에 선명하다.

당시 이렇게 식당에서 기타로 현지 음악을 연주해 주는 곳도 있었다. 지금 더 발달했다면, 스피커를 통해 음악을 틀어놓을 수도 있을 터.



음식이 나쁘지 않았으나, 비린내가 조금 났으며 향신료 맛이 나는 양념 등을 맛본 기억이 있다. 그래서 보통 이와 비슷한 동남아 음식들을 먹을 땐 느끼함을 잡아주는 콜라나 사이다를 거의 필수로 마시기도 했다. 이에 비해 우리 한식은 음식 재료를 다루는 것부터 조리, 취식 전까지도 위생과 깔끔한 맛에 신경을 쓰며 조리를 한다는 것을 또한 새삼스레 느낀다.


지나가면서 본 넓은 시내의 호수를 지나


이후 우린 <한국대사관>으로 가는 길에 있는 베트남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호치민 묘>를 방문했다. 우측 사진을 자세히 보면, 근위병이 웃음을 못 참고 웃고 있다. 쳐다보는 것을 느낀 듯 ㅋㅋ


호치민 영묘 [ Mausoleum of Ho Chi Minh ]
우상에 가까운 정치적 인물에게 바친 단순한 기념관

응우엔 탓 탄이라는 이름으로 1890년 출생한 호찌민('빛을 밝히는 이'라는 의미)은 하나의 전설이다. 여행가, 애국자, 혁명가, 군인, 지도자였던 그는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했을 뿐 아니라 프랑스 공산당의 초기 당원이기도 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베트민 단체와 함께 일본에 대한 저항 운동을 이끌었던 그는, 일본이 항복함으로 생긴 힘의 공백을 잘 이용했다. 1945년 9월, 중앙 하노이에 모인 50만 명의 군중들에게 그는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했다. 프랑스는 이러한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1946년 지배권을 되찾으려 시도했다. 이는 베트민과 프랑스 사이의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결국 1954년 베트남은 분열되었다. 호찌민은 북 베트남의 대통령이 되었고 1969년 베트남 전쟁 중에 사망했다.

거의 우상이라 할 만한 그의 지위를 고려하여, 당 간부들은 그의 유해를 방부 처리하고 그가 독립을 선언했던 자리에 영묘를 짓자는 결정을 내렸다. 베트남에서 나는 고유의 자재들로 지어진 3층짜리 건물이 설계되어 세워졌다. 단순한 튜닉과 샌들을 갖춰 입은 그의 유해는 유리관에 안치되었으며, 관은 기둥들로 둥글게 둘러싸여 있고 꼭대기에 '추 티츠(대통령) 호찌민'이라는 글자가 쓰인 회색에 정육면체 모양을 한 땅딸막한 건물 안에 들어 있다. 로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독립과 자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영묘는 넓은 퍼레이드 터 앞에 서 있는데, 이곳에서는 군대 사열식이 열린다.

오늘날, 이 영묘는 호찌민을 기리는 베트남 행사의 초점이다. 근처에는 호찌민 박물관과 그의 옛 집도 있는데, 이는 대나무 기둥에 목재를 이용한 단 두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전통적인 양식의 소박한 집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호찌민 영묘 [Mausoleum of Ho Chi Minh]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 2009. 1. 20., 리처드 카벤디쉬, 코이치로 마츠무라, 김희진)

프랑스에게서 베트남의 독립을 이끈 베트남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그였기에 베트남 국민은 그를 우상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후 한국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분열돼 한국전쟁(625)을 치른 것처럼, 베트남에선 남북으로 분열됐을 때 호치민은 북베트남의 대통령이 되었고 결국 전쟁 중 사망했다. 또한 그는 전형적인 엘리트코스의 인물이라기 보다, 서민같이 살아선지 국민들에게 더욱 영향력이 컸기에 그의 이름을 딴 호치민 시가 생겼고 이렇게 묘까지 크게 지어서 기리는 것. 그가 외친 "독립과 자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라는 로비에 쓰여있던 글귀처럼, 어느 나라에서나 이런 인물들은 존중받고 기려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옛날 수많은 독립운동가분들과, 해방 후 지금의 대한민국의 기틀을 닦은 초대 대통령을 엮임 한 이승만(이분에 대해 부정적인 내용도 있을 수 있으나, 앞의 내용대로 한국을 바로잡는데 공신이 컸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터.)처럼 말이다.


당시 여행할 때, 이렇게 역사가 재밌게 느껴졌다면 훨씬 여행이 즐거웠을 텐데 하는 생각이 문득. ㅎㅎ


이동하는 도중에 공원 및 정원도 방문해 쉬기도 했다


대사관서 근무하는 서기관님께 한-베트남 수교 등 자세한 설명을 듣다

오후 공식 첫 일정으론 <한국대사관>에 방문했다. 한-베트남은 1992년에 외교관계를 수립, 하노이에 대사관을 설치한 이후 교류를 계속하고 있었다. 대사관 방문 당시엔 현재 2022년 말보다도 초고성장을 하고 있었다. 그때 대학생이었지만 더 열린 생각과 투자에 대한 사고가 있었더라면, 서기관님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어떤 것이 더 발전하고 한국에서 수출할 수 있는 것들이 뭐가 있는지 등에 대해 생각했을 법도 싶다.


세계적으로 저성장인 지금 시대에도 베트남은 7% 정도의 고성장률을 진행하고 있으며, 한국과의 무역 교역도 대체로 성장하고 있다. 2021년 11월 당시 기사에 따르면 한-베트남 교역액은 700억 달러 이상이며, 한국의 무역흑자는 276억 달러 이상이었다. 베트남은 여전히 한국에 없어선 안 될 미국 중국 다음의 세 번째인 중요한 교역 상대국이며, 특히 팬데믹 이후 중국을 대체하는데 큰 도움을 줄 곳이기도 하다. <출처>


시내 곳곳에서 보였던 제사를 지낼 수 있는 터

앞에 베트남에 대한 전체 정보에서 적은 종교의 내용에선 불교가 7.9%, 무교가 80%라고 인용해 적었지만 다른 곳들의 정보를 취합해 본 결과 약간 다른 면이 있었다. 즉, <나무위키> 자료로 2022년 즈음 자료에 따르면 토착 신앙 및 무종교 73.2%, 불교 70%, 기독교 8.3%, 까오다이교 등의 신흥종교 6.2%. 기타 0.1%로 나왔다. 결국 이를 종합해 보면 무교이거나 혼합 종교에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한 상태로 무교가 7~80%, 불교가 70% 정도라 하는 게 맞을 거 같다.  대부분의 인구가 제사를 지내는 풍습은 대승불교를 따른 한국처럼, 베트남 또한 중국 영향을 받아 대부분의 국민이 지내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겠다.


아시아에서 아직 인력거를 하는 풍습은 중국에서의 영향이 아닐지. 

또, 누구는 자전거를 끌고 누구는 탔다. 똑같은 인간인데 말이다... 여러 생각이 들었던 그때.


National Puppetry Theatre(국립 인형극장 - 수상 인형극)

다음엔 수상 인형극을 하는 극장에 갔다. 동남아에서 패키지여행을 할 때 종종 포함돼 있는 코스. 강이나 연못에서 풍년과 축복 등을 빌며 행해진 베트남의 전통공연예술. 수상인형극 관련 기록은 11세기에야 등장하지만, 홍강 삼각주 인근이 오랜 기간 베트남의 전통을 창작하고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11세기 이전, 최대 기원전 1,000년에는 수상인형극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베트남의 수상인형극에는 풍년의 기원에서부터 베트남의 독립까지 베트남인들의 삶과 역사가 녹아있다고 한다.


그 나라, 도시의 문화생활을 보면 그곳에서 살아온 시민의 생활 및 풍습 등을 헤아려 역사에 연결해 이해해 볼 수도 있다.


도로는 다차선이며 굉장히 넓고, 도로 양쪽으로 상점들이 모여있었다. 지금은 좀 정비가 되지 않았을지.


그리곤 마지막으로 우리는, 허기진 배를 채우러 식당으로 향했다.


여기서 우린 신을 영접했다. 다름 아닌, 한식 빨간 돼지고기 신!ㅋㅋ 한국 고추장으로 볶은 듯한 제육볶음,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먹었는데 과식을 했다. 역시 한국인은 한식이 딱이었을까? 그렇게 맛있는 경우는 오랜만이었다.


세계 여러 곳에서 한식을 먹어봤는데, 동남아서 먹는 한식은 내 경우엔 현지식보다 대체로 맛있었던 경우가 많았다. 일단 동남아의 위생이 한국보다 부족한 경우가 눈에 보이는 덜 씻긴 재료들, 음식에서의 냄새 등으로 확연히 티가 났지만 한식당은 그걸 다소 방지해 줬기에. 한국에서의 비교적 깨끗한 조리 방식은, 이렇게 외국에 갔을 때 더 빛을 발하는 듯했다.


이때 내가 대학생이었지만 트인 식견으로, 한식 관련 음식을 어떻게 수출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창업 아이템도 생각해 봤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ㅎㅎ 하지만 세계경제위기라는 지금도, 어딘가에선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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