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나 잘 지내자고

오늘 하기로 한 건 다 했고?

by 파르르

커피를 내려 마시다 문득 생각했다. '잠깐 있어보자... 시험이 몇 주 남았더라.' 요즘은 때 늦은 전직 준비로 여러 자격증을 준비하고 있다. 하루에 공부 5시간, 지난번에 시험에 떨어진 이후로 더 빡빡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불안하거든. 당연히 될 줄 알았던 것들이 계획을 뒤틀어버린다. 맞다. 안 될 것까지 예상했어야 했다.


예상의 예상, 허를 찌르는 수를 계속해서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내가 대비해도 사건은 계속 생긴다. 친구를 꼭 만나야만 하는 일이 생기거나, 몸이 아플 때도 있다. 이걸 다 계산하기에는 내 CPU가 모자라다. 오버클럭이 가능하면 좋겠다만, 컴퓨터도 수명이 짧아지듯. 오버해서 계획을 세우면 꼭 중요한 순간에 번아웃이 온다. 소모성으로 뇌와 심장을 갈아 끼울 수 있으면 좋겠지만, 장기는 교환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날 울게 한다.


울어서 뭐해. 훌훌 털어놓고 계획을 다시 세운다. 왜 이렇게 만나자는 사람이 많은지. 평생을 친구가 없어 외롭게 살았던 것 같은데. 나를 찾아주는 사람들이 고마우면서도 밉다. '왜 하필 지금이야.' 속으로 생각해도 "야 좋지. 빨리 보자."라며 스케줄을 구겨 넣는다. 당신과 주말을 보내면 나는 필히 밤을 새야 한다. 계획한 내용이 그렇다.


일정 관리를 잘한다고 칭찬받은 적이 있었다. 그걸 PM의 역량이라고 부른다던가. 그런데 나라는 인간의 조직도는 PM만 있는 것 같다. 프로젝트를 관리만 한다. 개발도 하고, 디자인도 하는 것처럼 제작을 해야 하는데. 기획만 하고 있는 것이다. 기깔난 기획서를 만들고, 기획회의를 하느라 진이 다 빠져서 제작은 들어가지도 못한다. 눈만 높아져서,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학부 시절에 의류 제작 수업을 들을 때마다, 내 학점은 A였다. 자부심이기도 하지만 열등감이기도 한 그것. 나는 내가 만들지 못하는 것들은 기획할 수 없었다. 친구들이 무리해서 기획을 하고, 완성도가 떨어지더라도 유의미한 도전을 할 때. 나는 내가 만들 수 있는 역량을 정확히 재단하고 일정을 정확하게 지켰다. 한 번도 제출에 늦은 적은 없다.


한편, 매일 제출 기한을 놓치고 무리해서 디자인한 탓에 제작물은 항상 아쉬웠던 친구가 있었다. 이제 와서 말하지만, 지 깜냥도 모르고 디자인을 하는 게 우스웠던 적도 있다. 그런데 졸업 패션쇼 때, 걔가 만든 옷이 가장 빛나더라. 아니, 나만 빼고 다 빛났다. 내가 안정을 취하고 있을 때. 뛰어들고, 무리했던 친구들이 저렇게 됐구나. 저게 예술이구나 생각했고, 그 뒤로 나는 패션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하지만 미련은 언제나 발목을 잡는 법. 나는 그들의 '무리'가 부러웠던 듯하다. 깜냥은 알 바 아니라는 그런 태도. 그냥 해보는 태도가 좋아서 뭐든 줍는다. 그렇게 내 생활계획표에는 숨 쉴 틈이 남아나지 않는다.


계획표를 잘 세우면, 잘 이룰 것 같다는 생각은 어린 마음이었다. 계획 하나가 수틀리면 다음 계획이 무너진다. 하루가 무너지면 내일이 무너진다. 연, 분기, 월, 주, 일, 시간 단위로 철저하게 세워놓은 것들은 마치 블록 같아서 하나만 빠져도 무너지는 젠가가 되어버린다.


블록 하나를 빠트려서 젠가를 무너뜨리고 2년을 보냈다. 깨진 유리창 이론, 나비효과, 스노우볼 이펙트 뭐 그런 것이다. '억울해.' 매일 밤을 외치던 나의 목소리. 그렇게 평생을 망칠 각오로 모든 것들을 버려냈다. 좌절했다기 보단 좌절 하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내가 간과했던 사실이 있다. 젠가 게임을 평생에 걸쳐 한번만 하는 사람이 어딨어. 내가 평생을 계획 삼아 불안한 사탑을 쌓고 있을 때, 친구들은 하루하루 젠가를 무너뜨리고 다시 쌓았다. 오늘 일은 오늘 끝내고, 내일은 내일 다시 생각하는 일. 무너지면 또 쌓으면 되는 일이었다. 보수적으로 생각해봐도 계획 세우는 일은 하루에 5분이면 족했다. 나 솔직히 말해서 계획 세우면서 열심히 사는 코스프레를 했던 것 같다. 뭐 뽕이라도 찬 것 마냥 말이야.


그냥 오늘이나 잘 지내자. 오늘 하루나 잘 보내자는 말이다. 공부하기로 했으면 오늘 공부했냐고, 합격과 불합격은 그날이 되기 전엔 모르지. 내가 아는 부분만 나오면 합격할 수도 있고, 내가 모르는 부분만 나오면 떨어지는 일이다. 젠가도 그렇게 오래 할 필요 없다. 오늘 젠가 끝내고 내일은 테트리스도 하고, 모레는 다른 게임도 해야지. 평생에 걸쳐 젠가만 하고 있으면 그것도 지겨운 일이다.


그냥 오늘 할 공부나 하고, 오늘 하기로 한 것들이나 잘 하자. 못하면 내일 하고, 어쩔 수 없으면 그때 가서 생각하자. 뭐... 오늘이나 잘 지내자고.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잘 차려진 뷔페, 하지만 내 위는 작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