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을 사랑하는 즉흥형 인간
저녁에는 마땅히 그래야 할 것들을 생각한다. 내일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생각한다. 가끔은 오버해서 입을 옷도 골라 둔다. 차려입지는 않아도 막 입은 느낌은 싫어서. 패션 전공자라는 적당한 압박감이 아무렇게나 입지는 못하게 한다. 독서실을 끊어 놓으니 그래도 책을 편다. 약을 챙기니 그래도 약을 먹는다. 시험을 접수하니 그래도 강의를 듣는다.
오늘도 그래야만 하는 내일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오늘 강의를 20분 정도 덜 들었고, 회사 화장실에서 졸았으며, 셔츠를 입으려다 니트를 입었다. 독서실에서는 프린트만 하나 해서 나왔다. 약은 그대로 구겨진 채로 있다가 방금 먹었다. 계획했던 것들을 꽤 많이 지키지 못했다.
대신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바래다주었고, 대리님과 잠깐 점심 산책을 했다. 책을 꺼내 잠깐 읽었고, 조승연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들을 관찰했고 몇 개의 눈동자와 잠시 마주쳤다.
그래 이 맛이다. 가끔씩은 순간에 취해서 더 나은 선택을 할 테다. 현재 눈 앞의 행복에 집중하는 일. 짧은 쾌락이 아닌, 더 중요한 무언가를 분명하게 선택하는 일. 한 번쯤은 감정에 충실해보고, 때로는 이유 없는 본능에 몸을 맡기기도 해 본다. 철저한 계획 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힘. 나는 그것을 가지려 한다. 움켜쥐기 위해 손에 쥔 계획을 잠시 놓아 본다.
계획, 상식, 원칙은 중요하기에 파괴할 때 더 큰 쾌감이 따른다. 하지만, 그 쾌감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순간의 안전을 얻기 위해 근본적인 자유를 포기하는 자는 자유도 안전도 보장받을 자격이 없다."
펜실베이니아 주의 개척자였던 펜 가문이 세금을 내지 않는 행태에 아무도 저항하지 않을 때, 벤자민 프랭클린이 외쳤다. 자유! 내 마음에도 주기적으로 프랭클린이 출몰한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자유는 나에게도 근본적인 무언가 이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계획을 짜고 상식을 말하며, 원칙을 지킬 것이다. 태도는 근육의 일이라, 꾸준히 무언가에 힘을 써야 단련이 된다. 다만, 그 근육을 더 큰 자유를 쥐는 데 쓸 것이다. 꾸준히 계획을 세우고, 상식을 말하고, 원칙을 지키지만, 누구보다 과감히 던져버릴 것이다. 그간 단련된 아귀힘이 더 많은 자유를 내 손에 쥐게 만들 것이니까. 이것이 아마도 내가 계획을 사랑하는 이유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