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감 경력직

솔직히 그땐 그랬습니다.

by 파르르

오랜만에 포트폴리오를 정리할 일이 생겨서 짬을 내서 컨셉을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어떤 생각으로 기획을 했었고, 나는 어떤 생각으로 작업을 했을까 되짚어봤다. '제작물에 대한 욕구가 강하지 않은 것을 보니 여지없이 ENTP구나. 웃기네.' 요즘 내가 가장 즐거운 이유 중 하나는 늘어난 스스로와의 대화 시간 덕분이다. 고민을 스스로와 나누고, 제 삼자의 입장이 된 것처럼 상황을 점검하고 문제를 진단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행동을 결정하고 행동을 한다. 이렇게까지 제 리듬을 찾게 될 줄은 몰랐다. 삶에 취기가 빠진 듯. 또렷한 정신으로 생각을 정리한다. 차곡차곡, 눈앞의 할 일과 생각들을 정리한다. 여전히 긴장을 풀면 우수수 쏟아지는 계획과 포부 때문에 정신 못 차리지만, 한 손으로는 할 일을 하고 있다. 적은 비중이지만 할 일을 하느라 아무 생각도 못한 적도 있다. 멀티 플레이가 안되다니! 다른 의미로 기뻤다. 잡생각이 많이 나던 버릇이 조금씩 고쳐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떤 기획자였을까. 고민하고 고민하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고 깊은 이야기를 많이 나눈 친구. 우리가 제일 친한 친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겐 그렇다. 이 녀석은 마음에 안 들면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구다.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람. 하여튼 녀석은 내게 여러 가지 조언을 건네주었다. "너는 따지고 드는 게 장점이지.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말이야."


적절한 동감과 반박의 사이에서 통화를 마치고 다시 기획의 시간을 가지니 하루가 금세 마무리됐다. 집중력이 높으니 시간이 빨리 간다. 예전부터 느낀 건데, 확실히 집중력도 중력이다. 시간이 빨리 흐른다. 적절히 떠오른 생각을 정리해서 친구에게 카톡을 해 두었다. 거의 일기장처럼 내 생각을 줄줄이 쓰고, 약간의 피드백을 들었다. 녀석은 엑셀 정리를 하느라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런데도 뭔가 기분이 들떠 보인다. 아, 끝나고 애인을 만나러 간다고 한다. 그래 그렇게 좋을 일이지.


녀석은 최근에 연애를 시작했다. 항상 이렇다 할 만족 없이 방황하는 연애를 하던 녀석이었는데. 자기 입으로 감히 역대급이라는 표현을 쓴다. 약간 꼴 보기 싫긴 한데. 그건 아마 좋아 죽는 모습이 보여서 그런 것이지. 질투나 부러움은 아니다. 행복해 보이고, 행복해서 보기 좋다. 아마 몇 년 전이었으면 그렇게 바라보지 못했을 텐데. 지금이라서 참 감사하고 다행이었다.


주변인의 행복을 축하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행복이었다. 내가 열등감에 빠졌던 때, 나는 누구의 행복도 빌어주지 못했다. 나보다 행복한 사람들이 미웠고, 내가 행복해질 수 없으니 그들을 끌어내리려 했다. 어이없는 질투도 많았다. 원래부터 경쟁의식은 심했지만, 이기겠다는 도전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것을 훼손했다. 별 것 아니라는 듯. 열심히, 잘, 행복하게 지내는 사람들의 가치를 비하했다. 끊임없이 비교하고, 차이를 재고, 그 차이를 극복하기보다는 상대를 깎아내리는, 그리고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들만 곁에 남기는. 지극한 자기 연민은 그렇게 나를 잠식해나갔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다. 나는 내가 그들처럼 되고 싶었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몸을 움직일 시간이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냥 그땐 그랬다. 이 말이 이렇게 좋은 핑계가 될 줄은 몰랐다. 과거를 미화하고 싶지도 않고, 특별히 비하하고 싶지도 않은 지금은 그냥 그렇게 생각한다. 그땐 그랬다.


물론, 가끔씩 열등감이 올라오는 시간이 있다. 새벽 혹은 한낮의 태양 아래서. 한없이 밝은 것들을 보면 낮아지고 위축될 때가 있다. 하지만, 이제는 오래 두지 않는다. 관념을 정리하고 현실에만 집중한다. 그러면 어느새 그림자는 걷히고 밝고 따뜻한 빛이 들어온다. 밝은 것들은 따뜻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림자는 그저 그늘일 뿐이지. 그것이 악이고, 슬픈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이런 여유가 생긴 이유는 내가 경력직이라서 그렇다. 열등감 경력직. 이것이 우대 조건인 시절이 왔다. 뜨거운 우리네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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