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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광래 May 24. 2021

긴장이 아니라 몸이 아픈 거라고

공황과 우울 사이에서 - 2

 병원에서는 일 주일치의 안정제, 수면 보조제와, 7회분의 진정제를 주셨다. 전자는 꾸준히 먹고, 후자는 필요할 때 만 먹는 약이었다. 길가다가 갑자기 공황이 시작될 것 같거나, 과호흡이 진행될 때 먹는 약. 든든하진 않지만 미심쩍은 것이라도 보험은 필요했다. 나는 그렇게 주머니에 매일 보험을 들고 다녔다.


 발작이 멈춘 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나는 이것이 휴화산과 같음을 알고 있다. 적어도 내 증상은 그랬다. 일단 손이 떨리고, 다리가 저린다. 그리고 나면 손가락 감각이 둔해지고, 정신을 차려보면 호흡이 어렵다. 신경 써서 심호흡을 하면 머리가 어지럽기에 그냥 주어진 호흡대로 헐떡이게 되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말단에 힘이 빠지고 머리는 어지러워 온다. 그 짓을 몇 분 지속하다 보면 죽음의 형태가 찾아온다. 내겐 주로 총이었고, 여지없이 이 순서는 반복된다.


 냉정하게 말하면 정황을 다 파악하고 있긴 어려워서, 어느 정도는 논리로 짜 맞춘 경험이다. 미처 서술하지는 못했지만, 중간중간에 작은 경련도 몇 번 하고, 식은땀을 흘리기도 하니까. 특히 외부로 내가 내는 소리는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아마 짧은 신음이나 한숨이 섞여있었겠지. 1차적 생존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상황에서 감각은 생각보다 약한 존재가 된다. 죽기 직전의 사람이 주마등을 겪을 때, 꽤 많은 신음과 소음을 낸다고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감각이 흩여질 때는 자신의 행동조차 알 수 없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내 행동을 잘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방 후 3일 동안 진정제 없이 매일을 잘 보냈다. 인턴이라지만 사실상 독서실과 같아서 몇 건의 서류 처리와 민원만 맡으면 크게 할 일이 없었다. 주변 친구들은 필기시험을 준비했고, 나는 그 시간에 문학 읽기를 선택했다. 직장에 대한 압박을 받지 않기로 선택한 이후, 누구보다 더 적극적으로 여가를 즐긴다. 예전에는 보여주기 식이었다면, 지금은 정말 압박을 덜 느끼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렇게 밀란 쿤데라의 소설 몇 권, 올더스 헉슬리의 디스토피아 소설을 읽었다. 공교롭게도 책들은 모두 '나답게 살기'를 강조하고 있었다. 문학은 항상 그런 식이다. 직접 말하기보단 깨닫게 해 주니까. 최근 들어 문학이 더 편하다고, 쉽다고 느껴진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다.


 화요일 잊고 있었던 인적성 시험 결과가 나왔다. '축하합니다.' 오랜만에 보는 서두였다. 보통의 취업 메일은 두 가지로 시작된다. 감사합니다. 혹은 축하합니다. 전자의 경우는 '그렇지만, 제한된 인원에도 불구하고...'로 마무리되며 탈락을 알린다. 그에 비해 합격 메일은 단출하다. '축하합니다. 면접 일정 안내해드립니다.' 좋은 소식은 굳이 구구절절 말할 필요가 없다. 안 좋은 것들은 항상 말이 많곤 했다. 나를 다치게 한 것은 구구절절한 문장이었다.


 면접 대상자는 되었지만, 일정은 나오지 않았다는 점. 최종면접인데 5:1 이상의 경쟁이라는 점이 나를 조금씩 괴롭히고 있었다. 떨어지면 어떡하지라는 생각부터, 다른 곳과 겹치면 어떡하지, 더 마음에 드는 곳이 생기면 어떡하지 등. 일어나지도 않을 상황을 걱정하는 못된 버릇이 시작됐다. 그와 동시에 손이 떨리고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기에, 나는 주머니 속 보험을 꺼내 들었다. 너무 단호하게 봉투를 찢은 탓에 한적했던 사무실의 분위기를 찢은 것만 같았다. 그래도 먹어야 했다. 인데놀은 그런 약이니까.


 잠깐의 두려움이 지속되고, 호흡이 가빠지려는 순간 기분이 멍해지기 시작했다. 약간의 피곤함이 더해진 기분 좋은 노곤함. 생각의 연결을 하기가 힘들었다. 의식적으로 끊지 않아도 자동으로 끊어져버리는, 인데놀은 생각의 면발을 순면으로 만든다. 툭 툭 끊겨서 이어갈 수 없는, 평양냉면이 먹고 싶어 졌다.


 순간이 지나니 하루도 어떻게든 지나갔다. 그토록 어려웠던 일, 수없이 많은 명상과 대화 그리고 독서로 겨우 이겨냈던 일을 작은 알약이 순식간에 마무리했다. 이 경이로움 앞에 내 노력이 한없이 부질없어 보였지만, 그간 해 온 노력들이 함께 빛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크레딧 맨 위칸에 올라가는 것은 약물이지만, 하나하나 스태프들의 이름을 남기는 것처럼. 현재라는 영화는 같이 만든 것임을 다시 생각했다. 나도 이 정도면 꽤 괜찮은 후원사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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