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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광래 Aug 21. 2021

일로 만난 사이

직장인의 선

 "난 말이야. 일은 그냥 하라면 할 수 있었어. 근데 사람이 참 어렵더라."

 담배를 태우며 선배가 말했다. 선배라 하기도 뭐 한 너무 높은 선배. 나만한 아들이 있는 그런 사람이 담배를 태우며 하는 말이었다. 일로 만난 사이, 일 하려고 만났지만, 어쨌든 만나버린 사이. 그래서 사람이 참 어렵다고 느꼈다.




 회사에서 나는 그렇게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다. 주로 여기저기서 적당히 머무는 사람, 색으로 치면 회색을 선호했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런 행동은 쉽게 호감을 가져버리는 성격 탓에 생긴 습관이었다. 조금만 친해져도 마음을 열어버리는 사람, 나 혼자 친하다고 생각해버리는 사람, 그게 행동으로 이어져서 가끔은 당황스러운 사람. 벽이 없거나 예의가 없거나 배려가 없거나 셋 중 하나의 이름으로 비치는 행동들을 문제 삼아 교정하며 자라온 10년, 이제는 그냥 벽을 치고 지내는 것이 더 좋다고 느낀다.


 이전 회사에서도 그랬다. 나는 말은 따뜻하게 하지만 묘하게 친해지기 어려운 스타일이었다. 말은 많았지만 내 얘기를 하는 일은 별로 없었고, 주로 타인의 고민을 듣거나 그 사람들의 이야기에 첨언을 하는 게 주된 역할이었다. 바로 전 회사에서는 자아를 탐구하고 드러내는 일이 많았지만, 이전까지는 그랬다. 게다가 술도 유흥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으니,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관계를 형성하는 일이 참 어려웠다. 끝나고 마시는 소주 한잔에 조금씩 무너지는 모습도 보이면서 인간미를 섞는 게 회사생활이라면, 나의 회사생활은 생활은 없고 회사만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난 동료들은 항상 그저 그런 사이로 남아있다. 덕분에 딱히 싫거나 밉지도 않았지만, 누구 하나 친하지 않은 그런 사이. 하지만 더 슬픈 것은 그 배경에 청일점이라는 요소도 없지 않아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의 탓이 아니라, 내가 이성에게 치는 벽이 존재하는 이상, 나는 누구와도 친해질 수 없던 것이다. 아무리 부정하고 무시하려 해도 성별 차이는 내게 큰 벽으로 존재한다. 10년을 그런 환경에서 지냈으면서도.


 그래서 묘하게 이번 회사를 반겼을지도 모른다. 주위를 둘러봐도 남자밖에 없는, 나도 어쩔 수 없는 성별의 벽이 있었다는 것을 이번에 더욱 절실히 느꼈다. 똑같이 아무것도 안 해도, 똑같이 회색으로 지내도 무언가 편하다고 느꼈으니까. 그렇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성별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느새 일을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었지만, 선배와 따로 이야기를 나눈 적은 거의 없다. 은연중에 술 한잔 하고 싶어 하는 그의 모습을 봤으면서도 모른 체했다. 나는 무엇이 그렇게 싫었을까. 이제는 알 수 있다. 사실 벽은 내가 찾아다닌 것이다. 나를 방어할 벽. 상대로부터 벽이 있다고 느끼면서 도망친 게 아니라, 내가 도망치기 위해 적당한 벽을 찾고 있던 것이다. 그들의 성별, 학력, 전공, 주량은 그저 개성일 뿐이었다. 그들의 개성으로 나는 성벽을 쌓았다.


 이걸 안다고 뭐 달라지는 건 없다.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계속 이렇게 지내왔으니까. 그리고 살갑게 대하기엔, 거리감이 주는 안정도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궁금하고 알고 싶기도 하다. 어떻게 지내는지,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 솔직하게 인정해본다. 나는 정말 거리를 두는 지금이 행복한가. 적당히 두고 싶다는 마음은 있지만, 적당히 둘 줄 모르니 많이 두고 있는 것 아닐까.




 금요일 퇴근 전, 선배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선배님, 다음 주에 저녁 드실래요?"


 선을 넘었다. 직장인의 선, 퇴근 이후에는 건들지 않겠다고 생각한 나만의 선을 넘어버렸다. 그와 동시에, 내게도 선을 넘을 기회를 상대에게 주었다. 이 말 한마디가 어떤 화살이 되어 내게 돌아올지 나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좋을 것이라고 기대한 것들도 나를 죽여왔고, 나쁠 것이라고 생각한 것들도 꽤나 달콤했다. 그러니 나는 알 수가 없다는 것만큼은 인정해보기로 한다. 알 수 없다. 다음 주 저녁이 내게 무엇이 될지는, 그럼에도 분명한 한 가지는 내가 선을 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나 스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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