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두 달이나 됐다.
"어차피 작가는 못 돼. 그냥 글을 쓰고 싶어."
친구들을 만나면 항상 하는 말이었다.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동경과 두려움이 동시에 있었기에
글쓰기의 계기는 작가가 맞지만 지속하게 하는 힘은 작가가 아니었다.
어쩌면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너무 아팠기 때문이었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때였다. 많은 것들이 생각대로 안됐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다지 큰 일들은 아니었다.(물론 가벼운 일들도 아니었다.)
매일 울고 싶었고, 짜증을 부리고 싶었는데 요동치는 감정을 표현할 수 없으니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작지 않은 체구였지만 고작 인간의 몸이라 감정을 담기에 한참은 부족했다.
그래서 적당히 은밀한 공간에 글을 남겼다.
보여지고 싶었지만, 모두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나를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들이라면 조금은 허락해주지 않을까 싶었다.
인스타그램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내겐 블로그가 적당했다.
광고와 공모전 이야기를 들으러 온 구독자들에겐 죄송했지만 구독 취소를 감수하고 그게 제일 적당했다.
시인에 대한 반발심으로 시를 썼다.
요동치는 감정을 다 붙잡고자 표현에 담았다. 가끔은 더 격하게 쓰기도 옅게 쓰기도 했다.
하루 종일 가면을 쓰고 온 날이면, 블로그에 진심을 썼다.(그 때의 글들 때문에 친구들이 많이 걱정했다.)
한 달 정도 지속된 배출은 어쩌면 배설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글들을 버텨준 친구들이 감사하다.
방파제를 지은 것인지, 달의 인력이 약해진 것인지 파도가 잠잠해지고 남은 것은 글을 쓰는 습관뿐이었다.
'기고'라는 제도를 알게 된 때도 그때였다. 눈에 보이는 모든 글쓰기 교육에 지원했고
원고를 투고할 수 있는 곳이면 메일, 문자, 우편을 가리지 않고 보냈다.
신춘문예를 어렴풋이 생각한 것도 이때였다.
몇 건의 글이 좋은 기회로 매체에 실렸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자랑도 했었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가득했다.
그렇지만 좋은 글은 나의 역량을 벗어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끔은 좋은 글을 쓰지만 더 많은 별로인 글을 쓰곤 했다.
이슬아 작가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92년생 동갑내기, 센세이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가.
솔직히 질투의 감정으로 시작된 관심이었다. 막 글쓰기의 재미를 배워가는 내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녀의 글과 나의 글을 비교했다. 단순히 글을 짧게 잡았다는 이유만으로 타협할 수는 없었다.
문학과 에세이는 아니었지만, 나도 많은 글을 써 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내게 재능이 있다고도 했었고... 상도 탔던 일이다."
그렇지만 내가 좋은 글에 집착할수록 더 글을 쓰기가 어렵고, 더 별로인 글들만이 세상에 나왔다.
그렇게 나는 내 글을 죽였다.
"재능과 꾸준함을 동시에 갖춘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창작을 할 테지만 나는 타고나지 않은 것에 관해, 후천적인 노력에 관해 더 열심히 말하고 싶다. 재능은 선택할 수 없지만 꾸준함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십 년 전의 글쓰기 수업에서도 그랬다. 잘 쓰는 애도 매번 잘 쓰지는 않았다. 잘 못 쓰는 애도 매번 잘 못 쓰지는 않았다. 다들 잘 썼다 잘 못 썼다를 반복하면서 수업에 나왔다. 꾸준히 출석하는 애는 어김없이 실력이 늘었다. 계속 쓰는데 나아지지 않는 애는 없었다."
- 이슬아, 경향신문 직설 <재능과 반복> 중에서
브런치 작가가 된 지 두 달째, 이제는 글쓰기 재능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동갑내기가 던진 말이 파동을 일으켰는지 알 수 없지만, 글쓰기 재능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잘 썼다는 인정이 없이도 꾸준히 글을 쓸 수 있는 것이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글에 재능은 없지만, 쓰기 중 '꾸준히'라는 영역에는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슬아는 조금 더 노력에 방점을 찍었다면, 나는 내 노력이라는 재능에 박수를 치고 싶었다.
"빛나는 재능들을 바로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누군가는 유전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것을, 또는 그 모든 걸 넘어서는 노력을 재능이라 부르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질리지 않는 것. 수십 년 한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것. 같은 주제에 수백수천 번씩 비슷한 듯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것."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어떤 일에 뛰어난 것 같은데 얼마 동안 해보니 질린다면, 그 일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당장 뛰어난 것 같지는 않지만 하고 하고 또 해도 질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도해볼 만하다."
-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중에서
4개월째 글을 쓰고 있다. 당장 뛰어나진 않은 것 같다. 몇 번의 기고가 있었고 좋은 반응을 얻었기에 아예 없지는 않지만 분명 지금은 뛰어나다고 자부할 만한 일은 아니다. 100일간의 글쓰기를 도전하며 너무 글이 안 써져 뒤통수를 때리고 허벅지를 꼬집기도(학창 시절부터 집중이 안되면 하는 버릇이었다.)하지만 질리지 않는다. 매일을 쾌감 속에서 글을 쓰지는 않지만 5년 넘게 해 온 게임을 단숨에 접게 한 만큼 질리지 않는다. 아직 '하고 또 하고'의 시간까지 가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얼마 동안'을 100일로 정했다.
백일잔치는 잔병치레로 죽는 아이가 많던 시절에 아이가 태어난 지 100일이 되면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데서 출발했다고 한다. 그때 이름을 지었다고 하니, 100일이란 의미는 진정한 탄생의 의미가 될 수도 있겠다. 100일이다. 내가 100일 동안 글 쓰는 사람으로 살아있을 수 있다면, 내 몸에 글쓰기의 호흡이 돌고 이 삶을 지속할 수 있게 될 테니, 그때가 필명이 생기고 글쟁이로 살아가는 자부심이 될 것이라 믿는다.
지금은 신생아의 졸필이다. 다소 거슬리는 표현이 많고, 비정형의 장기 기관으로 인해 호흡과 소화가 어려운 글들이지만, 어느 정도 자신 있다. 나는 이미 백일을 겪어 본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