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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 SOOOP May 21. 2021

사진에 관한 잔상들

4. 올림푸스 PEN EE3

내 기억이 맞다면,

6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카메라를 빌려와서 집 우물 앞에서 사진을 찍어주셨다.

그때는 카메라가 무엇인지, 어떤 기종 인지도 몰랐지만

지금 와 생각해보니 올림포스 PEN EE3 하프 카메라였었다.


또 다른 기억 하나는

내 인생의 첫 여행을 했을 때다.

나는 지리산을 오르기 위해 구례에 갔었다.

사실, 산을 오르기 위한 목적이 아니고 산장을 가보고 싶은 게 목적이었다.

산장이란 데를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지리산의 산장을 TV에 나오는 별장쯤으로 알고 있었다.

구례에 도착해 터미널 근처 사진관에서 카메라를 하나 빌리고

등산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없이 2월 말 늦은 오후의 산행을 시작했다.


그러나 산장에 다다르기 전에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날씨는 더욱 거센 눈발을 날리고 있었고,

정말로 가까스로 도착한 피아골 산장은 내가 그리던 산장이 아니었다.

그저 한낱 대피소였다.

무모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대피소 지킴이 아저씨가 군용 담요 한 장을 던져주었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도 추위를 견디기가 어려웠다.

등이 시리다는 말.

이것은 '절대 혼자 해결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라는 걸 알았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 더 이상 잠을 이루지 못한 새벽녘,

드센 바람이 몰아치는 산장 밖으로 가부좌를 틀고 있는 어느 한 인간을 보았다.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그는 견고해 보였다.


춥지 않냐고 물었을 때,

"춥다"라고 했다.

"다만, 생각을 버리면 춥지 않다"라고 껄껄껄 웃으며 얼어붙은 입으로 말했다.


서둘러 산을 내려왔다.

그런데 카메라가 온데간데없다.

호기 좋게 몇 장의 사진을 찍은 기억만이 오롯이 남았다.


"학생이 먼 돈이 있겄어. 돌아가서 알바라도 해서 갚아."


카메라를 빌린 사진관에 갔을 때, 

사진관 아저씨는 별일 없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그 카메라가 올림푸스 PEN EE3였다.


Out Of The Window _ 6컷 촬영 _ 전남 순천


Out Of The Window _ 3컷 촬영 _ 파리 퐁피두


지금은 이 작은 반판카메라를 작업도구로 쓰기도 한다.


<창밖(Out Of The Window) 시리즈 작업노트>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지상의 풍경들은 잿빛이다. 누군가 오래도록 선 채로 그 풍경을 바라다본다. 그의 눈빛은 높다란 곳에서 아래를 유심히 살핀다. 그러다가 어느 한 곳에 멈추기도 하는데, 빼곡한 집들 사이의 시시한 다툼과 불통의 사연들, 때론 충만한 기쁨의 사연들이 대기의 중압감을 견디고 있음을 알게 된다. 눈을 좀 더 높이 뜨면 대지 위에 제 무게로 균형을 잡고 있는 건물들과 숲의 나무들이 있다. 강이 흐르고 바다가 있다. 지상은 어느 때보다 풍요롭고 부산스러워 보인다.     


창 안은 다소 어둡다. 낮이 들어왔다 나가는 동안 구름에 살짝 그을린 달이 얼굴을 밀고 들어온다. 오후 7시의 시간은 촘촘하게 방 안을 적신다. 커튼을 양옆으로 밀고 다시 창밖을 본다. 작고 아담한 섶섬이 눈앞에 있다. 섶섬은 앞쪽에 상가들이며 집들, 거리를 품고 있다. 도라지 위스키와 노른자를 띄운 쌍화차를 한 잔 두고 <섶섬이 보이는 방>을 그렸던 이중섭의 젊은 날, 노래가 흐른다. 파도가 일렁인다. 밤이 되면 저 먼먼, 대지의 숲 속이거나 바다를 향해 울부짖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언뜻 불타는 세멜레의 사랑이 귓속에 차오르기도 한다.      


어느 날이다. 망루에 올랐다. 창으로 바람을 막은 망루는 햇빛의 움직임에 민감하다. 창 하나가 또 다른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빛의 각도, 눈의 움직임은 60개의 파노라마를 생성한다. 창 하나씩이 겹쳐지고 중첩되면서 같은 것 같지만 다른 풍경이 다채로웠다.     


<창 밖 Out of The Window>은 여행으로부터 얻어진 것이다. 낯선 여행지의 호텔 방안에서 창밖을 바라보거나, 복도의 창을 통해서 또는 높다란 전망대에 올라 창 너머의 풍경을 바라다 본 것들이다. 이번 작업은 바깥 풍경 그 자체보다는 풍경을 통해 얻어지는 다채로운 안쪽 풍경이 더 궁금했다. 어두워지는 방안에서의 나는, 먼발치의 대지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숲의 나무들의 속삭임을 더 듣고 싶었는지 모른다. 창유리 하나가 만들어내는 다른 광경으로의 전이. 이것이 이번 작업의 매력이다. 그리고 이제는 고물카메라가 된 하프카메라의 장점을 다시 찾은 것이 하나의 소득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프카메라를 통해 또다른 창을 만들어 창 안의 창, 창밖의 창을 좀 더 확산시켜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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