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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 SOOOP May 27. 2021

사진에 관한 잔상들

5. 가지고 싶은 꿈

열아홉 살에,

작가 장정일은 타자기, 뭉크 화집, 턴테이블을 가지고 싶어 했다.


그 시절 내가 가지고 싶었던 세 가지는

카메라, 만년필, 자동차였다.


세 가지를 다 가진다면, 어디로든 여행을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스의 영화감독 테오 알겔로 풀러스는

"신이 최초의 일주일 동안 창조한 것은 빛이 아니라 여행이었다”라고 말했다.


길이 아니라도 좋았다. 어디든 갈 수 있었고 무엇이든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바다가 보이는 민박집에 엎드려 엽서 한 장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단 하나도 가질 수 없었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고,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그 후 10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니콘 FM2 카메라와 펠리컨 만년필을 갖게 되었다.

더불어 빨간색 프라이드 자동차도 샀다.


빨간색 프라이드는 내가 원하는 장소에 언제든 데려다주었다.

그곳에서 니콘 FM2 카메라에 코닥필름을 넣고 사진을 찍었다.

해가 지면 펠리컨 만년필로 엽서를 쓰고, 시를 쓰기도 했다.


90년대의 어느 날 _ 니콘 FM2로 촬영


하지만 그렇다.

아마 나도 김수영 시인처럼 가지고 싶은 꿈을 잃어버린 그때가 올 것이다.


오래된 여행가방-김수영(金秀映)    


스무 살이 될 무렵 나의 꿈은 주머니가 많이 달린 여행가방과 펠리컨 만년필을 갖는 것이었다.

만년필은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낯선 곳에서 한 번씩 꺼내 엽서를 쓰는 것.      


만년필은 잃어버렸고, 그것들을 사준 멋쟁이 이모부는 회갑을 넘기자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아이를 낳고 먼 섬에 있는 친구나, 소풍날 빈방에 홀로 남겨진 내 짝 홍도, 애인도 아니면서 삼 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은 남자, 머나먼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한 삼촌…

추억이란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 잊고 있다가 문득 가슴 저려지는 것이다.      


이따금 다락 구석에서 먼지만 풀썩이는 낡은 가방을 꺼낼 때마다 나를 태운 기차는 자그락거리며 침목을 밟고 간다. 그러나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 주워온 돌들은 어느 강에서 온 것인지, 곱게 말린 꽃들은 어느 들판에서 왔는지.     


어느 외딴 간이역에서 빈자리를 남긴 채 내려버린 세월들. 저 길이 나를 잠시 내려놓은 것인지, 외길로 뻗어 있는 레일을 보며 곰곰 생각해 본다. 나는 혼자이고 이제 어디로든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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