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엔 흔했지만 요즘엔 드물어진 일 중 하나가 정전입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예고 없이 정전이 벌어져 밤에 세상이 암흑천지로 변하는 일이 수시로 일어나곤 했죠. 당시 양초는 집안에 상비해야 할 물건이었습니다. 그 시절을 겪은 분들이라면, 어둠속에서 더듬더듬 벽을 짚어가며 양초를 찾다가 방문턱에 걸려 넘어졌던 경험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겁니다.
양초에 불을 붙이는 순간, 어둠이 살짝 걷히며 주변 풍경이 극적으로 변합니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촛불을 따라 그림자가 출렁입니다.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사용해왔던 세간들이 새롭게 보이고, 촛불 주변으로 모인 가족의 얼굴도 조금 더 따뜻하게 보입니다. 어린 시절엔 그 모습에서 왠지 모를 묘한 포근함을 느꼈습니다. 그 포근함이 좋아서 전기가 다시 들어오는 게 아쉽기도 했고요. 겨울의 끝에서 등불처럼 봄을 밝히는 동백꽃을 바라보면 오래된 기억이 그 위로 아련하게 포개집니다.
동백은 매년 겨울과 봄 사이의 불분명한 경계를 파고들어 화등(花燈)을 밝힙니다. 개중에 성질 급한 녀석들은 한겨울에 눈꽃과 더불어 요염하게 피어나 눈길을 붙잡습니다. 계절을 거스르는 매혹 앞에 동백(冬栢)이라는 이름은 필연이었을 터이나, 사실 동백꽃은 겨울보다 봄에 흔한 봄꽃입니다. 동백은 대개 봄의 문턱인 3월부터 기지개를 펴 4월까지 꽃을 피웁니다. 그러다보니 동백을 춘백(春栢)이라고 부르는 곳도 있다지만, 동백은 역시 동백이라고 불러야 제 맛입니다.
동백꽃은 향기를 거의 느낄 수 없는 꽃입니다. 꽃향기를 맡아보겠다고 꽃송이에 코를 들이댔다가 자칫 비염을 의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대신 동백꽃은 강렬한 색의 대비로 때 이른 상춘객들을 유혹합니다. 동백꽃의 짙은 초록색 잎사귀는 붉은 꽃잎과 보색을 이루고, 붉은 꽃잎은 노란색 수술을 감싸고 있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빼앗기기 쉽지 않습니다.
동백이 다른 꽃들과 비교해 유별난 점은 지고 난 뒤에도 아름답다는 점일 겁니다. 동백 그늘 아래에선 시들기도 전에 송이 채 떨어진 동백꽃들이 새로운 꽃밭을 이루는 모습을 흔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생기 있는 꽃송이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며 처연함을 느끼기도 전에, 가지 여기저기서 동백꽃이 송이 채 하나둘씩 툭툭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옵니다. 이 때문에 동백의 절정은 가지에 매달려 있을 때가 아니라 바닥에 떨어져 있을 때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입니다.
동백이 밝힌 화등을 따라 꽃송이들이 깔린 주단 위를 걷다 보면 어느새 봄입니다. 그 무렵부터 회색빛 도시의 보도블록 틈새에도 풋기가 조금씩 돌기 시작합니다. 풋기가 제법 돌면 작은 봄꽃들이 나설 채비를 하고, 비로소 도시는 조금씩 정원의 모습을 갖춰나갑니다. 봄은 늘 달력보다 먼저 옵니다.
동백꽃을 만나는 방법 : 동백은 남부 지역에선 흔하게 볼 수 있으나, 수도권이나 내륙 지역에선 보기 어려운 식물입니다. 동백은 인천 옹진군 대청도와 경북 울릉도에도 자생하지만 육지에선 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리, 전남 구례군 화엄사, 전북 고창군 선운사 등이 북방한계선입니다. 동백꽃이 피는 곳과 가까운 곳엔 대개 맛집도 많은 편이니, 주말에 시간을 내 꽃구경을 다녀오시는 일정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