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여름이 무르익으면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풍경 하나가 있습니다. 여름방학이 오고 햇살이 뜨거워지면, 동네 소녀들은 길가의 풀숲을 뒤적여 봉숭아의 꽃과 잎을 땄습니다. 소녀들의 언니들은 봉숭아의 꽃과 잎을 백반과 함께 찧어서 동생들의 손톱에 붙인 뒤 헝겊으로 감싸고 실을 동여맸습니다. 소녀들의 옆에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린 시절의 저는 백반을 입에 넣었다가 시고 떫은맛에 놀라 뱉어냈죠. ‘백반(白礬)’과 ‘백반(白飯)’의 차이를 알지 못해서 벌어진 촌극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까르르 웃어대던 소녀들은 다음날 일제히 붉게 물든 손톱을 뽐냈습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정겨운 풍경입니다.
봉숭아라는 이름을 모르시는 분은 별로 없을 겁니다. 봉숭아는 일제강점기 때 망국의 한을 담은 곡인 홍난파의 ‘봉선화’나 트로트가수 현철의 히트곡 ‘봉선화 연정’ 등을 통해 많은 분들에게 익숙한 식물이죠. 간혹 봉숭아와 봉선화를 서로 다른 식물로 알고 계신 분들도 있는데, 둘은 같은 식물이 맞습니다. 꽃의 모양이 봉황을 닮아 봉선화라고 부른다는데, 봉황을 직접 눈으로 본 일도 볼 일도 없는 저는 봉선화보다 봉숭아란 이름에 더 정감이 가더군요. 둘 중에 입에 더 잘 붙는 이름을 선택해 부르면 족할 일입니다.
봉숭아는 봉선화과의 1년생 초본으로 인도와 동남아시아 지역을 원산으로 합니다. 봉숭아가 언제 우리나라로 귀화했는지에 대해선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매년 여름이면 전국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식물을 굳이 남의 식구로 취급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오랫동안 가까운 곳에서 인연을 맺어왔으면 그게 곧 식구이죠.
봉숭아는 매년 7~8월에 붉은색, 흰색, 자주색, 분홍색 등 다양한 색깔의 꽃을 피웁니다. 이 때문에 손톱에 붉은색 대신 다른 색을 물들이겠다고 흰색, 자주색, 분홍색 꽃을 잔뜩 따와 손톱에 물들였다가 낭패를 본 추억을 가지신 분들도 많을 겁니다. 꽃의 색깔과 상관없이 봉숭아가 손톱에 물들이는 색깔은 언제나 붉은색이니 말입니다. 봉숭아가 손톱에 물들이는 염료성분도 사실 꽃보다는 잎에 더 많다고 합니다.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인 경험이 있는 분들은 그때 기억을 돌이켜 보시죠. 꽃과 잎을 함께 찧는 풍경이 떠오를 겁니다. 붉은색이 붉은 꽃이 아니라 푸른 잎에 더 많이 숨어있다니, 참 신기한 노릇입니다.
요즘에는 봉숭아라는 이름을 알아도 그 꽃을 알아보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제가 포털 사이트에서 ‘봉숭아 물들이기’라는 검색어를 입력해보니, 간편하게 손톱을 물들이는데 사용할 수 있는 분말형 제품 목록이 줄줄이 뜨더군요. 봉숭아를 모르면서 봉숭아물을 들이는 풍경이 아름다운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여름방학을 맞은 자녀들이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번 기회에 자녀들과 함께 봉숭아를 직접 채취해 손톱에 물들이는 시간을 가져보시죠. 어린 시절의 추억만큼 오래 남는 기억도 없더군요.
봉숭아꽃을 만나는 방법 : 도시에서 봉숭아꽃은 여름방학이 올 무렵, 사람 손이 많이 닿은 화단에서 많이 보입니다. 아파트 단지가 즐비한 신도시보다는 골목이 많은 구도심에서 많이 눈에 띄는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