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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새 Jan 19. 2021

품종개량의 꿈

그나저나 나의,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어머님은 처음에 나를 썩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셨다.

당신의 아들은 나를 만난지 백일째 되는 날, 제대로 된 청혼을 하고 내 허락을 득한 후였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2008년 당시. 아주 오래 사귄 연인들 조차도 '결혼식장 예약'이 '청혼'보다 먼저이던 시절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른들의 '허락'을 위해 인사를 드리러 간 것이 아니라, '통보'를 위해 쳐들어갔던 셈이다. 어머님이 딱히 반대하신 것은 아니었다. 그냥 조곤조곤 당신이 내게 던지시던 질문들이 호의만으로 이뤄지진 않았던 것 같다.







6개월 전이었다. 아홉 살 조카의 '안경' 소식을 듣고 갑작스럽게 여덟 살 딸의 간이 시력 테스트를 하게 된 것이.

가벼운 마음으로 달력의 글자들을 테스트하는데, 아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부분을 읽어내지 못했다. 내가 보고 있는 세상과 아이가 보고 있는 세상이 다르다는 것을 서늘하게 알게 된 순간이었다.


다시 체크한 아이의 시력은 0.75D나 떨어져 있었다. 평균보다 더 빠른 속도로 아이의 눈은 나빠지고 있었다. "엄마가 눈이 나쁘신가요? 아니면, 아빠??"

의사 선생님은 첫 진료 때부터 '시력'은 유전의 영역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본인의 소견을 시원하게 밝힌 바 있었다.

"둘. 다. 나빠요. 선생님..."

굳이 따지자면, 나는 난시가 심한 일반근시였고, 10년 전에 라식 수술을 하고 새로운 세상을 살고 있다. 아이의 아빠는 초고도 근시에 가까운 고도 근시. 지금도 알이 큰 스타일의 안경은 아무리 안경알을 압축하더라도 선택이 불가능하다.


오십 보 백 보. 도찐개찐 상태에서도 선생님은 딸이 조금 더 나쁜 상황의 아빠 눈을 물려받은 것 같다 하셨다.

"아빠의 다른 많은 좋은 것들도 물려받았으니, 괜찮아요 선생님..."

쿨하게 대답하고, 병원을 나서는 내 발걸음이 무겁고 무겁다.

안경이 필수인 그 생활을 모르면 몰랐지. 라식수술로 신세계를 맞이하기 전까지 나는 얼마나 불편한 세상을 살아왔던가. '안경빨'이라도 세울 수 있는 건, 보통 뽀로로나 유재석 같은 '남자들'이다.


이런 거까지 꼭 닮을 일이냐며.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부모들이라면, 특히 10살 이하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부모들이라면, 유전의 축복과 저주에 대해서 할 말이 참 많을 것이다. 특별히 티를 내거나 가르치지 않았음에도 나를 닮은 모습들. 내 배우자를 닮은 모습들.

타고났다고밖에 설명되지 않는 무엇인가가 정말 많다. 솔직히 거의 다이다.

이것만큼은 닮지 않았으면 했지만, 그것마저도 닮은 우리의 2세들.


이러한 우리의 2세들에게 일생일대 품종개량의 기회가 한번(이나 두 번쯤..?) 주어진다.

나와 배우자가 전달한 부족한 유전자를 메꿀 절호의 찬스.


자식을 키워보니 알 것 같다.

드라마나 소설, 현실 속 부모들이 그렇게 자식의 짝을 반대하는 것은 그 상대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나 자신이 모자라서였다. 내가 일생에 걸쳐 부족함을 느끼던 그 부분. (그것이 머리가 나쁜 거든, 성실하지 못한 거든, 못 생긴 거든, 주눅 든 성격이든) 그 약점을 그대로 닮은 내 2세가 그 부분만큼은 보완된 2세를 맞이했으면 하는.

나의 간절한 품종개량의 꿈.






나중에 알게 되고 (피식 웃었던) 어머님의 실망 포인트는 나의 키였다.

나는 작은 편이지만, 그다지 그 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다. 키가 크면 당연히 좋겠지만, 키가 작아서 겪은 불합리한 일이 살면서 별로 없었다고 해야 하나. 나를 제외한 가족들 모두 큰 편인 것도 한몫했다. 동생들이 나보다 훌쩍 큰 키였지만, 그래도 나는 언니이고 큰누나였다. 결혼을 하고 보니, 남편의 집안은 명절에 모이면 친척들 간에 주고받는 첫인사가 '키'에 관련된 것이었다. "ㅇㅇ이 키가 아버지보다 더 컸구나." "**이는 엄마만큼은 커야 할 텐데." 이 가운데도 가장 아담한 편인 어머님의 키에 대한 품종개량의 꿈이 얼마나 크셨을지 지낼수록 알게 되었다. 솔직히 '키' 정도가 제일 중요한 꿈인 것은 그런대로 평탄한 삶이라고 생각하지만, 당사자들은 또 아니겠지. 지금도 우리 딸과 통화하실 때, 자주 하시는 말씀이 "키는 이모나 외삼촌 닮자~"이다.


어머님께 여덟 살 딸의 눈이 많이 나쁘고, 시력이 저하되는 속도 또한 제법 빨라서 걱정이라고 말씀드리면 아마 괜찮다 하실 거다. 나도 며칠이 지나니, 처방받은 안약을 믿고 야외 활동을 최대한 많이 시키면서 과학의 발전을 기다리면 된다 생각하며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다. 어두운 곳에서 책 읽지 말아라. 티브이를 너무 가까이에서 보지 말아라. 등의 잔소리가 눈 건강에는 큰 의미가 없다 하니, 그것 또한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이를 키우면서 마음이 내려앉는 순간이 앞으로도 참 많이 오겠지.

우리의 약점이 그대로 드러나, 아이와 나를 동일시하고 어떻게든 고치고 싶은 순간들이 많이 찾아오겠지.

그 아이가 어느 날, 자기 같은 짝 하나 데리고 와서 나의 품종개량의 꿈을 깨뜨릴 어느 도 맞이하겠지.




그나저나 나의, 당신의 (품종개량의) 꿈은 무엇입니까.



[ 출처 : 딸기 신품종_한호 일보 2020.1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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