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메카보 Jan 18. 2020

집이 그리워질 때

 미얀마에서 몇 개월이 지나자 집이 애타게 그리운 타이밍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새로운 경험을 하며 잘 적응하리라 기대했으나, 시간이 점차 지나자 집에 대한 그리움이 크게 자리 잡는다. 말로만 듣던 향수병이라게 이런 것일까? 미얀마에 오기 전 한국에서 함께 일한 동료가 ‘미얀마와 한국이 비행기로 6시간 정도밖에 안 걸리는 매우 가까운 곳이니, 급한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위치다’.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출국과 입국을 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관련 비자를 신정하고, 보증서류를 작성하고, 티켓팅 하고 근무를 조정 등의 많은 행정적 노력이 필요하고, 소요되는 비용도 상당하다. 즉 현실적으로 정기 휴가 외에 한국에 가기란 상당히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내면서 한국에 있는 집 생각이 간절해질 때는 종종 있었다. 먼저 몸이 아플 때 정말 집 생각이 간절했다. 미얀마에서 근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명 '물갈이'에 걸렸다. 한국에서 마시던 물과 성분이 다른 물을 마시거나 접촉하게 되면서 발생하는 우리 몸의 면역반응 중 하나라고 한다. 식수를 반드시 사 먹으며 조심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음식에 들어가는 물이 다르고, 샤워할 때도 물이 흡수될 수밖에 없다. 복통을 동반한 고열로 온몸에 힘이 빠졌다. 병원까지 걸어갈 힘도 없었기에 그냥 주말에 하루 진통제를 먹고 좀 쉬니 다행히 회복되었다. 그 후 몇 개월간은 좀 잠잠하더니 이번에는 갑자기 한국에서는 없던 알레르기가 생겼다. 업무뿐 아니라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눈이 가려워 어쩔 수 없이 나름 수소문해서 유명한 미얀마 현지 병원에 갔다. 세 시간여를 기다리고선, 진료 후 안약을 받았는데 한글이 적힌 우리나라 의약품이었다. 참 반가웠다. 안약을 넣고 좀 지내자 눈이 서서히 회복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갑작스레 얼굴 곳곳이 붉게 부어올랐고, 며칠이 지나자 온몸으로 증상이 퍼졌다. 그냥 며칠 지나면 나아지겠거니 했는데, 날이 갈수록 상황이 안 좋아져서 국제병원으로 갔다. 병원에서는 원인을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스트레스나 어떤 외부요인에 의한 피부질환으로 보인다며, 스테로이드 계열의 의약품을 처방해 주었다. 약을 먹고 또 바르니 약간 진정되는듯해 보였으나, 큰 효과는 없었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병을 얻어 고생하는 이들은 많았다. 더군다나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뎅기열에도 많이 걸렸는데, 곁에서 살뜰히 챙겨주는 가족들이 없다 보니 회복 속도가 매우 느렸다.

병원 밖까지 줄서서 기다리는 소문난 명의가 있는 안과 (좌) 그곳에서 처방받는 한국제약사의 약 (우)


 또 각종 경조사 소식을 접할 때면 한국에 절실히 가고 싶었다.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도 미안하지만, 무엇보다 장례식에 직접 얼굴을 보고 위로해 주지 못할 때는 그 미안함이 배로 더한다. 또한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하지 못함으로써 느끼게 되는 외로움도 크다. 특히 명절에 가족들이 다 함께 모인 자리에 함께 못하고, 전화를 걸어 유선상으로 안부를 묻고 인사하고 끝고 난 직후에는 참 낯선 외로움이 엄습해 온다. “난 뭘 하려고 여기 혼자 이렇게 와 있는 거지?” 그럴 때면 동료들과 멋진 식당에 가거나, 땀을 흠뻑 흘릴만한 운동을 하며 그 낯선 외로움과 조우하는 것을 피하고자 하나,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에 쌓여 결국 하나의 익숙한 감정으로 자리 잡는다. 이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한 번씩 사람을 크게 뒤흔든다.


 마지막으로는 ‘한국에서 먹는 음식’이 절실히 생각날 때가 있다. 미얀마에서도 한국식당에서 오래 일한 분을 요리사로 채용했기에 삼시세끼를 한식으로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외국 단기간 여행 시에도 매우 반가운 짜파게티나 신라면은 늘 박스채로 주방에 있었다. 또한 양곤에는 삼겹살, 곱창, 치킨 등 양곤에도 맛있는 한식당들이 많이 있었고, 주로 이곳에서 회식을 하니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한식을 많이 먹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늘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음식도 음식이지만, 음식을 먹었던 공간과 함께 했던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헛헛함으로 남아서 양곤에서 아무리 한식을 먹는다 한들 한국에서의 식사 때 느끼는 만족감을 채워줄 수 없는 것이었다.


한국식당 출신의 요리사가 늘 한식으로 식사를 제공하셨고, 식당에는 짜파게티와 신라면도 늘 준비되어 있어다.


 미얀마 프로젝트를 마친 이후, 누군가 해외에서 일할 계획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꼭 가족들과 함께 나가길 권유한다. 바다 건너 이사 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함께 지냄으로써 홀로 일할 때 잃어버릴 수 있는 가치 있는 것들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이 아플 때 곁에서 함께 해 줄 수 있고, 소중한 현재의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고, 훗날 기억을 떠올려 공감할 수 있는 재료들을 많이 준비 둘 수 있다. 그게 개인이나 가족에게, 그리고 회사에도 나아가 우리 사회에도 훨씬 유익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노가다(건설노동자)의 인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