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녹차밥과 토마토김치
12평 한옥집으로 이사 온 지 6개월째. 불볕더위라고 하지만 집은 시원하다. 에어컨을 새로 달았지만 아직 한 번도 틀지 않았다. 거실에 누워 이번 주말에는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다 몇 년 전 세종시에서 먹은 굴비와 녹차밥이 떠올랐다. 얼음을 띄운 시원한 차밥에 굴비 대신 토마토를 새콤달콤하게 무쳐 같이 먹으면 꽤 어울릴 것 같았다. 요리도 창의적 영역이다. 어떤 재료로 요리하고 무엇과 함께 먹을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맛있는 녹차잎을 사러가야 겠어
티백으로 녹차물을 만들 수도 있지만 왠지 진하게 우린 차에 밥을 말아야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과 함께 먹을 ‘식자재’이니 직접 보고 사야겠다 싶었다. 홍대 마포도서관 맞은편에 차 전문점이 있다. 평일 점심때 시간을 내서 방문하였다.
"사장님, 녹차잎을 사려고 왔는데요."
사장님은 3가지 녹차가 있으며 재배 시기에 따라 12만 원, 8만 원, 6만 원짜리가 있다고 했다. 각각이 우전, 세작, 중작으로 작고 어린잎일수록 비싸다.
"네? 제일 싼 게 6만 원이요?"
생각보다 가격이 꽤 나가서 놀랐다. TWG, 오셜록에서 티백을 사 본 적은 있다. 잎차를 사는 건 처음이라 시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저는 녹차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더 저렴한 것은 없나요?"
이렇게 묻자 사장님은 녹차밥이라면 잎을 사서 한 번 먹을 때 2~3번 우려먹고 마지막에 녹차밥을 해 먹으면 된다고 하였다. 한 번에 여러 번 먹을 수 있다면 그리 비싼 게 아닐 거라는 생각과 이왕 맛있는 녹차밥을 만들기로 했으니 사 보기로 했다. 60,000원. 내 생에 가장 비싼 차를 산 샘이다. 그런데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나 보다. 괜찮은 녹차를 샀다고 생각하니 집에 있는 머그컵에 먹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관계처럼 좋은 내용에는 좋은 외관이 필요하다. 다기를 사러 가자.
찻집 근처, 홍대 정문 맞은편에 도자기를 파는 집이 있다는 것이 번뜩 떠올랐다. 그런데, 찻잔이 또 하나의 거대한 세계였다는 것을 이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장인이 만드는 이목동 그릇
가게에 들어가 그릇을 보는데 손으로 직접 빚어 만들었는지 모양도 각각 다르고 표면도 거칠다. 도자기들은 어디서도 보지 못한 오묘한 빛깔과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맘에 드는 찻주전자를 들고 가격을 보았다. 3만 5천 원. 이 정도면 살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숫자 '0'하나를 세지 못했다. 350,000원. 한 손에 꼭 들어가는 가장 작은 크기 주전자가 35만 원이었던 것이다. 가게를 바로 나설까 말까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녹차잎을 처음 샀는데 혹시 저렴하게 차를 내릴 수 있는 다기세트가 있는지 말이다. 사장님께서는 주전자를 사지 않고 철망과 작은 찻잔, 수구(물 담은 그릇)를 사서 내려 먹으면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춰 먹는 느낌이 들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수구는 9만 원, 작은 찻잔은 2만 원. 철망은 2만 4천 원. 합쳐서 134,000원이었다.
맛있는 녹차 한 그릇을 먹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 될 줄이야
성격이 소심하고 거절을 잘 못한다. 귀가 얇은데 호기심도 많다. 또 한 번 생애 처음으로 비싼 찻잔을 구매하고 말았다. 맛있는 차를 먹을 욕심도 있었지만, 장인이 만든 다기들은 정말 아름다웠다. 각 제품들이 손과 뜨거운 열을 통과하여 살아남은 작품이라고 생각하니 상대적 높은 가격도 이해가 전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특히 손이 많이 갔을 것 같은 주전자 손잡이는 흙을 둥글게 빚고 칼로 여러 면을 깎았는지 보석처럼 영롱한 빛이 났다.
다기의 핵심인 주전자를 남겨두고 찻잔과 수구만 구매했다.
“주전자는 올해 12월, 아니면 언젠가 돈 많이 벌어서 다시 올게요. “
첫 다도 도전
찻집 사장님이 알려주신 대로 찻잎 3g과 80도 온도로 3분간 차를 우려냈다. 푸른빛이 도는 찻잔에 녹색빛 물이 우러나오자 작은 잔이 호수와 같이 넓게 느껴졌다. 오묘한 천연빛들이 한 그릇에 모여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녹차는 '정말' 부드러웠다. 시중에 파는 티백은 다양한 맛이 난다. 처음엔 달았다가 쓴 맛이 나는 차도 있고, 여러 잎과 꽃잎을 섞어 한 번에 다양한 향을 내뿜는 차도 있다. 그런데 이번에 산 녹차잎은 단순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맛이 났다. 그리고 두 번 정도 우려서 먹었는데 거의 동일한 맛이었다. 오래 두어도 씁쓸한 맛이 거의 나지 않았다.
다도는 어른들의 소꿉놀이라고도 한다. 또 차를 눈으로도 먹는 방식이라고도 한다. 새로 산 찻잔으로 차를 마시니 비대칭 거친 찻잔이 손이나 잎에 닿을 때마다 미묘하게 경험이 달라진다. 거칠었다가 부드러웠다가 알갱이가 느껴지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하다. 매끈한 머그컵으로 먹었을 때와는 분명 달랐다. 차는 자극적인 미각을 줄이고 몸 전체적인 감각으로 먹는 음식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녹차밥을 만들다
마지막 찻물에 얼음을 넣고 큰 볼에 옮겨 담았다. 그리고 밥통에 있는 밥을 말았다. 향긋한 풀향과 고소한 쌀알이 반찬 없어도 잘 넘어간다. 제대로 우린 녹차밥이 먹고 싶었을 뿐인데 멀리 돌아온 기분이었다.
토마토 김치 담기
토마토는 보통 샐러드나 소스 기본 재료로 많이 쓰인다. 그런데 토마토로도 김치를 만들 수 있다. 일반 김치처럼 소금에 절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겉절이에 가깝다. 고춧가루, 마늘, 양파, 부추, 액젓 등 김치 속 재료와 동일하게 집에 있는 재료로 뚝딱 무치면 된다. 액젓과 토마토가 의외로 어울린다. 토마토 김치를 담아 먹을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재료]
토마토(큰 것 작은 것 상관없습니다.)
당근
오이
액젓
식초/라임
설탕/매실청
고춧가루
토마토 김치는 크게 2가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요리가 가능하다.
1. 태국식 무침
토마토를 작게 자르고 액젓과 식초 또는 라임, 설탕, 고수를 넣으면 완성이다. 들어가는 양념은 적지만 태국 레스토랑에서 먹는 파파야 샐러드와 유사한 맛이 난다. 저렴하고 매우 빠르게 만들 수 있다. 이 토마토 무침은 토마토를 많이 먹게 되는 장점이 있다. 밥과 같이 먹어도 좋고 단품으로 맥주와 함께 야식으로 먹어도 좋다.
2. 한국식 김치
토마토에 양파, 당근 등을 넣고 김치 속 재료를 넣는다. 액젓과 마늘, 매실청, 고춧가루 등을 넣으면 된다. 토마토를 김치라고 생각하면 처음에는 의아하게 느낄 수 있다. 토마토는 야채이기도 하고 과일 같기도 하고, 많이 시지도 또 많이 달지도 않아 어떤 재료를 만나도 쉽게 조화를 이룬다. 김치 속을 만드는 것이 번거롭다면 마트에서 파는 오뚜기 겉절이 양념팩, 새미네 김치양념을 구매해도 좋다. 이 양념을 산다면 1분 만에 요리가 완성된다. 토마토는 수분이 많아 며칠 이내로 먹는 것을 추천한다.
녹차밥과 토마토 김치의 조화
쌉싸름한 녹차밥에 빨간 토마토 김치 한 알을 얹어 먹으면 시원하고 상큼한 여름이 입 안에서 터진다. 녹차밥과 방울토마토, 녹색과 빨강의 조화. 차인 듯 밥이고 샐러드인 듯 김치인 듯 뭔가 애매한 것들의 조합. 익숙한 식재료를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는 재미가 있다. 그리고 생각보다 맛있다. 서양식 삼삼한 샐러드를 많이 못 먹는 사람도 액젓과 칼칼한 고춧가루 양념 덕분에 토마토 김치는 많이 먹게 될 것이다.
녹차잎과 다기 세트를 사고 나서 즐거운 습관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퇴근 후, 하루를 정리할 때 녹차를 먹게 된 것이다. 다기를 꺼내 의식적으로 집중하는 시간이 좋다. 누군가의 정성이 들어간 제품과 함께 시간을 보내니 시간 역시 조금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함께 하지 못한 이목동 ‘찻주전자’는 다음에 만나자!
*만드는 자세한 과정은 아래 유튜브를 통해 확인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