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마라탕을 먹는 이유
오 헨리 단편 소설 중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 <크리스마스 선물>이 있다. 소설 줄거리는 가난한 젊은 부부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을 팔아 상대방 선물을 산다는 내용이다. 아내 델라는 머리카락을 잘라 시곗줄을 사고 남편 짐은 금시계를 팔아 아내의 빗을 산다. 델라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삶은 흐느낌과 훌쩍거림, 미소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중에서도 훌쩍거림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인생에 훌쩍거림이 필요하다. 그래서 마라탕을 먹는다. 뇌 과학적으로 쾌락과 고통을 처리하는 기관은 같다. 고통이 반복되면 쾌락이 되고 쾌락이 반복되면 고통이 된다. 인간은 감각의 상승과 하강 사이에서 평형을 맞추며 살아간다. 영원한 기쁨도, 무한한 슬픔도 없다는 말이다. 인간 감정에서 끝없는 고요함은 평화가 아니라 지독한 고통이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사랑할 대상을 찾아 감정의 전환점을 만들어야 한다. 나에게는 그것이 마라탕이었다. 화산 분출구 같은 마라탕은 국물 아래 넓적 당면, 메추리알, 소시지, 피쉬볼, 건두부, 목이버섯, 고수, 청경채를 숨기고 있다. 바다부터 육지까지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각기 다른 재료들이 한 그릇에 모여 있다. 미각이 지루할 틈이 없다. 산초 기름으로 코팅된 재료들이 무작위로 젓가락에 걸려 올라올 때마다 감각이 롤러코스터를 타기 시작한다.
특히 마라탕이 땡기는 순간은 내가 가장 미울 때다. 하기 싫은 일을 미루는 나를 발견 할 때, 혼자 있을 때, 열받은 일에 씩씩거릴 때, 지루함에 내가 지루해질 때 마라탕을 찾는다. 마라의 화끈거리는 고통이 입과 위를 때리면 불편함은 환희로 바뀐다. 콧물 눈물을 동반한 훌쩍거림이 끝나면 걱정 가득한 일상이 덜 아픈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화끈거리고 싶어서 마라탕을 먹는다. 남자를 보고 마지막으로 설렌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포도를 먹어도 보라색이 되지 않고 바나나를 먹어도 노랗게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마라탕을 먹으면 얼굴이 빨개진다. 매운맛은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들고 가슴을 뛰게 한다. 이건 분명 사랑이다.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면 몸이 먼저 반응하고 다음에 머리가 이해한다. 첫눈에 반하는 순간을 마라탕이 감각으로 재현해 준다.
그렇다. 나는 사랑을 하지 않아서 배가 고프다. 사람과 사랑에 빠지면 배가 고프지 않다. 몸은 허기를 덜 느끼고 음식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낮아진다. 그러나 외로운 사람은 문득문득 강렬한 허기를 느낀다. 여기에 담백하고 부드러운 쌀밥은 어울리지 않는다. 사랑 없는 삶은 충분히 밋밋하기 때문이다. 심리적 허기에는 탄수화물과 지방, 단백질을 다량 함유하고 향신료 레이어가 촘촘하게 쌓인 마라탕 정도는 먹어야 배가 부르다. 어차피 사랑이든 마라탕이든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대상을 보기만 해도 도파민이 분출되어 행복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그러니 침이 고이는 붉고 매운 음식을 안 먹을 이유가 없다.
마라탕은 끝까지 행복할 수 없는 쾌락을 오른손에 쥐여주고 왼손에는 신체적 통증을 동반한 불쾌를 준다. 나는 마라탕을 먹으면서 감각의 저글링을 한다. 스스로 자기를 괴롭힌다는 자책과 일상의 무료함을 매운맛으로 채워주겠다는 보상 심리가 동시에 존재한다. 마라탕을 계속 먹으면 배탈이 나고 살이 찌고 식대를 몽땅 소진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유일한 대상이라면 나를 희생할 가치가 있다. 오 헨리는 <크리스마스 선물> 소설 말미에서 이들의 사랑을 이렇게 평가했다
“서로를 위해 자기들의 집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현명치 못하게 희생한 두 어리석은 젊은이의 시답지 않은 기록을 여러분에게 어쭙잖게 설명했다. 그러나 요즘의 현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지막 말은, 선물을 준 사람 중에서 이 두 사람이 가장 현명했다는 것이다.”
사랑에 즐거움과 슬픔이 동시에 존재하고 맑은 날과 흐린 날이 끝없이 교차하는 것이라면 어리석은 판단이 가장 현명한 선물로 뒤바뀌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